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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종로2부 여름수양회 2강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19:17~42)2021-07-18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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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종로 여름수양회

다 이루었다!

말씀/요19:17~42

요절/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여러분, “Serendipity”를 아시나요? ‘우연의 발견’이라는 말입니다. 이 ‘우연의 발견’이 세상의 흐름 자체를 바꾸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인류사에 큰 변곡점을 가져 왔지만 설명할 길이 없는 경우에 그저 ‘그건 우연이었어!’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신의 영역이 바로 ‘Serendipity’라고 다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말씀을 준비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바꿔 놓은 “Serendipity”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 비밀을 발견하고 그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7-1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나갔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모든 옷을 벗긴 후, 십자가 형틀에 밀쳐 눕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손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대고, 있는 힘껏 “쾅!, 쾅!, 쾅!” 내리쳤습니다. 망치 소리와 함께 대 못이 예수님의 살과 뼈를 관통하여 형틀 깊이까지 박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에 두 명의 죄수를 양옆에 두고, 그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우두머리로 주목받았습니다. 이 십자가에는 본래 누가 달려야 했습니까? 18장 40절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는 바라바가 매달려야 했습니다. 바라바의 뜻을 아십니까?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금 ‘사람의 아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이 모습은 사람의 아들인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아닌 예수님이 달려 계심을 보여 줍니다.


19-22절을 보십시오.

발라도는 예수님의 죄 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써 붙였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말에 ‘유대인은 천박한 것을 왕으로 삼고 있다’ 조소를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당시 세상의 모든 언어였던 히브리어/헬라어/로마어로 동시에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발라도는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 따로 계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버린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왕이시다’고 직접 선포하신 것입니다. 19-22절에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문구에 대해 ‘기록/쓰다(write)’ 4번(NIV) ‘읽다(read)’ 2번(NIV)씩 반복/강조되어 있습니다. 왜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왕이신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왜곡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23-24절을 보겠습니다.

군인들은 바닥에 버려진 예수님의 ‘옷(NIV : clothes)’을 취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 성인 남성의 옷은 겉옷/허리띠/터번(모자)/신발/속옷 5가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4명의 군인은 속옷을 제외하고 1개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제 남은 ’속옷’도 4조각으로 나눠질 상황이었습니다.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로부터 통으로 짠 것’으로, 나뉘면 쓸모없이 버려집니다. 군인들은 ‘이것을 한 사람에게 몰아 주자’ 며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성경은 왜 이 부분을 상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을까요? 첫째, 그들이 무심코 행한 그 악한 행동이 오히려 시편의 말씀(시22:18절)이 이루어짐을 알려 주고자 함입니다. 둘째, 복음의 핵심 곧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악함이나 강포함에 의해 결코 찌 껴 훼손될 수 없음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하나님의 ‘의’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정당(옮음)함을 매우 강한 어조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공의 갑옷으로 삼으시고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NIV: vengeance)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59:17) 여기서 ‘Vengeance(보복)’는 법률적 용어로 ‘법적 다툼에서 철저한 검증을 통해 결국 고발인이 옳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옷을 주고 계십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자랑하며 입고 있는 명예/자존심/성과/인격의 옷은 다 누더기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영접한다는 것은 자기의 입던 옷을 벗고 예수님이 주시는 옷을 입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25절을 보시죠.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갖은 여인들이 그 곁에 있다고 자세히 소개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리아’ 이름의 성경적 변천을 보면 그 비밀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는 본래 ‘쓴 물’의 뜻을 갖은 ‘마라’에서 왔지만, 후에 “기쁨/환희”의 뜻 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을 수 없는 쓴 물을 만났을 때 그것이 어떻게 해서 단물이 되었나요? ‘여호와가 지목한 한 나무가 물에 던져졌을 때 쓴 물이 단물’(출15:25a)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을 행하게 되는지에 대한 모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라’와 같이 “쓴 물”의 인생도 ‘기쁨’ 과 ‘환희’의 ‘마리아’로 거듭나게 만드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26~2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요한이 십자가 곁에 있는 걸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새로운 가족의 관계를 맺게 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방향에 순종하여 어머니 마리아를 모셨습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새로운 공동체, 교회를 탄생시키고 있음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서로 순종함으로 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당연합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루어진 줄 아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루어진 것을 아셨는데, 목마르다’ 하신 내용이 잘 연결됩니까? 눅14장에 ‘잔치를 준비한 임금의 비유’를 볼 때,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면’ 다음 말로 ‘오소서!!’ 라고 초청을 해야 문맥이 맞지 않나요?


따라서 본문을 문맥대로 연결해 보면 ‘내가 목마르다’ 하는 말씀은 분명 우리를 십자가로 초청하는 음성입니다. 너무 지나친 해석인가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타는 목마름 가운데 있던 한 여인에게 영생수를 주시려고 모든 걸 준비하여 찾아가서 처음 건넸던 말씀이 생각나시나요? “물 좀 주시겠습니까?”(요4:7)였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 예수님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줄 수 있는 참된 자유와 생명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초청의 음성으로 ‘목마르다’라고 하실까요? 예수님은 몇 개월 전 초막 절 끝날엔 큰 소리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외치셨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에 무슨 차이가 생긴 것입니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그 후에(28절a)’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공관복음을 참조할 때, ‘그 후’는 특정 ‘사건 ’ 이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절정이 이르렀던 정오 때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온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이셨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쪼개어져, 버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고통을 아십니까?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었고, 그로 인해 목마름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목마름 가운데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목마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시작되었다’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부모와 연결되었던 ‘탯줄’의 흔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그것 아십니까? 이 빈자리는 얼마나 깊은지 터진 웅덩이, 무저갱이라는 지옥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를 채우고자 종교를 만들고, 문명의 발전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누군가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칠흑 같은 외로움을 채울 사랑에 집착합니다. 어떤 이는 위법인 줄 알면서도 타는 육신의 욕구에 무엇엔가 중독됩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은 날마다 타는 목마름으로 탄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도다”(요4:18)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요4:26) 이 시간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십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그분이 나의 메시야 구원자’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30절 상반절 ‘받으신 후에’까지 읽겠습니다.

이 부분은 마치 영화의 ‘팔로우 샷’ 처럼 ‘신 포도주’를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우선 우리 눈으로 ‘신 포주가 가득 담긴 그릇 속 신 포도주’을 향하게 하고, 그 ‘신 포도주’가 다시 해면에 적셔지고, 우슬초를 거쳐 예수님의 입가에 다달았을 때, ‘예수님이 이 ‘신 포도주’를 기꺼이 받으심’으로 ‘신 포도주’는 장면에서 살아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신 포도주’는 묵은 것 곧 구약의 대표인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범법자에게는 자비가 없는 ‘ 생명의 댓가’ 곧 ‘피’입니다(레17:11a) ‘신 포주가 가득히 담겨 있다’는 점은 율법의 요구 수준이 최고조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가운데 있는지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커다란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모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할 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고자 성경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다고 말합니까? 다 같이 3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매우 뜻밖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망가지고, 파괴되어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사함 곧 속죄(Redeem)를 완전하게 이루었습니다. ‘속죄’란 ‘죄의 속박에 있는 자를 댓가(속전)를 치루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카파르’에서 온 말로 ‘가리다, 덮다, 화해하다’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구원 방주는 ‘코페르’나무로 만들고 ‘역청으로 칠’하도록 했습니다.(창6:14)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구원)할 때 옷자락으로 ‘덮으소서’라고 했습니다(룻3:9). 언약궤 위에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속죄소’의 기능은 언약궤를 덮는 ‘덮개’였습니다(출25:21). 이처럼 ‘속죄’의 의미는 구약에 자주 등장합니다. 속죄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와 ‘댓가’입니다. ‘죄(sin)’‘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과녁(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죄’를 짓는 것이며, 그러면 ‘댓가(속전)’를 지불해야 합니다. 죄의 댓가는 사망입니다(롬6:23a).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이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시는 속죄가 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로마서 8장1-2절은 말씀합니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과 연결하는 완전한 속죄의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1:51) 예수님은 야곱이 꿈에 본 벧엘(하나님의 집)과 연결된 ‘사닥다리’를 ‘인자’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연결해 주는 것은 오직 한 길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이고, 그 실체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사닥다리 곧 십자가를 보이시며 주신 약속을 알고 있습니다.“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이 시간 하나님께서 야곱 같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 이루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붙들게 하셨음을 감사 찬양 드립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째, 십자가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도 요한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35절a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예수님의 죽음은 요한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다 보고서 왜 그러한 죽음을 죽으셨는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복음서/서신서/요한계시록 성경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응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응했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던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친히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십니다.


셋째,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증언해 주십니다. 요한일서5:6은 말씀합니다. “이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이 ‘물’ 과 ‘피’로 임하셨다고 증거합니다. 물은 저주받은 육신이요, 피는 참 생명 곧 하나님을 가르킵니다. 성령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야 말로 ‘육체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완전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는 우리의 영생과 영벌을 결정합니다.

31-42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말씀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다른 두 행악자와 달리 예수님의 뼈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드려지고(출12:46) 흠 없는 의인으로 죽으심(시34:19-20)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여러 사람이 예수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성령이 임한 자는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맘 깊이 통곡(슥12:10)하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위해 엄청난 양의 몰약과 침향을 준비하여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이 또한“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다.” 이사야(53:9절)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모든 된 일이 사실이라면 이제 한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요한일서1:3절은 그 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Fellowship)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Fellowship)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구원받았다고 자처하는 이들에겐 십자가 구원에 대한 적지 않은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 이루었으니 이제 맘 놓고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자의적 해석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체면과 주문을 걸어서라도 ‘깨끗해 보이려는 자기 주도적 형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죄에는 2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죄책(죄의 댓가를 감당)과 죄성(죄를 향하려는 본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책이 온전히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인 못 하는 것은 ‘죄성(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성’이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이에 대해‘그럼, 예수님이 다 이룬게 아니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여기에 ‘하나님과의 사귐(Fellowship)’의 섭리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입니다. 사람들에게 죄성은 죄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만, 거듭남을 맛 본 자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은 ‘내가 누구인지, 이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수 있는가!’를 반드시 발견하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제가 도구라는 표현을 썼지만, 성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영역입니다. 성령이 거듭난 자를 붙드십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니면 안됩니다. 이것이 ‘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의 사귐(fellowship)’의 진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영원한 곳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님과 사귐이 깊어지도록 우리 모두를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저는 사춘기 시절 잘못된 성 개념으로 심신이 미약하였습니다. 91년 대입 고사장에서 앞에 앉은 여학생 화장품 냄새 때문에 든 온갖 생각과 불안감에 결국 낙방했습니다. 칸막이가 높이 쳐 있던 국민대 어학 실습실에서 시험을 안정감 속에서 봤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와서 김게바 목자님과 성경공부 관계를 맺고, 이사야53:6절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다시 찾아온 정신 분열적 두통으로 버려진 듯한 불신까지 겹쳐 빈 강의실에서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평소 심적으로 불안할 때 암송하던 로마서 8장을 급히 펴보면서 로마서8:25 말씀이 다시 붙들어 주었습니다. 내가 ‘성경이 말하는 참된 소망이 있다면 인내’가 필요함을 알게 되어 그 강의실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98년 결혼 후, 요셉을 낳고 얼마 안 되어 직장을 나와 유학 준비하던 것이 오히려 3년의 경력단절과 극심한 물질문제를 가져왔습니다. 선교사님 소개로 첩첩산중 곤지암에 있는 작은 사업장으로 인도되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막막함 속에서, 저는 ‘나의 목자’ 주님께 날마다 기도하였고, 시편 23편은 저의 인생 요절이 되었습니다. 그 후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께서 저를 독수리 날개로 업어 바람처럼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을 통해 몇몇 직장을 거쳐 자동차 그룹사에 경력으로 인도함 받아 14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나를 추천하여 합격시킨 팀장은 출근 대기 일주일 전부터 돌연 출근하지 말라는 협박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들어간 날엔 ‘한 달 안에 스스로 나가게 하겠다’ 하였고, 맘에 들지 않으면 종종 조인트를 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4년의 세월 속에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회를 얻었고, 현재는 저로 하여금 팀장 자리에서 사람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순탄해 보였고, 이것이 은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근 5년간 험악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의 시작은 교회 내에서 형성된 투자 이슈였습니다. 결국 15년 5월쯤 문제가 터져 피해 규모는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관계 문제에서 오는 맘의 또 다른 상처였습니다. 저는 냉소적으로 되었고, 입만 열면 사람과 교회를 비방했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있던 신앙의 근간이 흔들렸습니다. 저는 설 곳이 없었고, 동시에 쌓았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게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가혹한 댓가를 치루고서야 내게서 사라진 것과 남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이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불쌍한 가족과 어려운 시절 나를 인도했던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긴 터널의 끝에서 주님은 요계3:18절 말씀으로 가련한 자를 붙드셨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아라” 불같은 시험일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사라’ 하시고, 미움과 피해의식 속에 주저앉아 있는 내 모습 속에서 여전히 자기 의를 붙들고 있는 저의 벌거벗음을 보게 하시며 제발 당신이 주시는 ‘의’의 흰옷으로 그 수치 됨을 가리라 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이 주시는 안약이 아니면 빛을 볼 수 없는 영적 소경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주의 말씀 덕분에 이렇게 어그러진 무릎을 다시 펴고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이 시간 신앙의 시간/경험치와 무관하게 제가 얼마나 눈먼 강아지와 같이 연약한 자인가 고백하고, 십자가의 주님이 나를 세워 주심을 봅니다. 내가 할 수 없기에 그래서 주님이 나 때문에 죽으셔야 했음을 봅니다. 이것이 제 삶에 일어난 최대의 기적입니다. 제가 날마다 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를 알고, 나의 주님을 알아가길’ 기도드립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신앙의 틀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틀이 무너져도,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앞에 굳게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죄와 허물까지도 다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의 옷을 입혀 주셔서 흔들릴 수 없는 주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로 하나님과 연결하여 주시는 완전한 구속의 길이 되십니다. 이제 날마다 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