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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28강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 16:1-31)2022-09-26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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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8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말씀 / 누가복음 16:1-31

요절 / 누가복음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오늘 말씀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자 누가는 1 3절에서 누가복음을 순서대로, 차례대로 잘 관찰하여 기술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볼 때 큰 맥락가운데서, 앞 뒤 상호 연관성가운데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죠. 제자들이 듣고 있고 바리새인들이 엿듣고 있죠. 본문은 13장으로부터 쭉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에서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14장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인가를 알려 주죠.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명을 따라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천국잔치에 초대하는데, 그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소유에 마음에 빼앗겨 초대를 거절합니다. 밭을 사서, 소를 사서, 새 신부를 얻어서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15장은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세리와 죄인들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은 누가 구원을 이루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려 주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데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잃은 자를 찾으시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 집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아무 조건없이 영접해 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왜 구원하시는가? 우리의 비참함과 삼위 하나님의 기쁨때문임이 나옵니다. 뒤이은 16장 오늘 말씀은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맥락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실제 삶을 도전하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에게 도전하시고,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십니다. 이 시간 그 도전이 무엇인가를 듣고서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도전하십니다.(1-13)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는 갈릴리에 살지 않으면서도 그곳에 땅과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타 지역의 부자들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자들은 청지기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다른 지방에 있다보니 청지기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청지기가 그런 청지기 인 것 같습니다. 슬쩍 슬쩍 공금을 횡령했는지, 주인 몰래 증권투자, 가상화폐에 투자하여 큰 손실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소식을 주인이 들었나 봐요. 즉시 청지기를 소환합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증거가 분명하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인은 해고를 통보합니다. “~ 장부 정리해그동안 주인의 소유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이제 중년의 나이에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어요. 급박한 상황이 되자 청지기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아이고 부끄럽구나.” 그러다가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 올랐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4) 주인 집의 채무자들에게 선심을 써서 나중에 쫓겨난 후에 그 사람들이 내 노후를 책임지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답은 사람이다이런 생각이 들자 청지기는 놀라운 스피드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5-7절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했겠지만 샘플로 두 사람만 나옵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묻습니다. “얼마를 빚졌소?” “기름 백 말입니다” “그럼 여기 오십이라 쓰시오장부에 적힌 100말을 화이트 펜으로 지우고 그 위에 50말이라고 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려는데 그에게내가 베푼 은혜~ 절대 잊으면 안돼오.’ 두번째 사람을 불렀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빚졌소” “밀 백 석입니다” “여기 팔십이라 쓰시오또 돌아갈려는 그를 향해서내가 베푼 은혜는 절대 잊지 마시오당부합니다. 이렇게 한명 한명에게 인심을 썼습니다. ~ 이 사실을 주인이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 이 사람 보소. 쫓겨나는 판에 어디서 장난질이야~.”하며 경찰서에 고소를 하든지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의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8절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이 칭찬을 하다니~ 납득이 안됩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일터인데 왜 이것을 칭찬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이 가장 난해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칭찬한 것은 청지기의 부도덕성이나 장부 조작 같은 사기의 기술을 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고 대비한 점, 그리고 일처리를 신속히 한 그 점을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대비하라는 예로서 많이 등장하는 것이 두바이 성공신화입니다. 두바이는 면적이 제주도의 두 배 정도 되고 원래 인구 30만도 안되는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한낮의 기온이 50도까지 올라가고 사막과 바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집트처럼 관광객이 몰려올 문화 유적지도 없습니다. 진주를 캐서 먹고 살던 이 나라는 20세기 들어서 일본이 양식 진주를 해서 헐값으로 세계에 공급하자 두바이 진주산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먹고 살기 막막했는데 1966년에 석유가 나왔습니다. “~ 이제 우리도 사우디처럼 잘 살겠지~”. 그런데 기쁨도 잠시 석유 매장량이 너무 없는거에요. 50년이 지나면 2020년에 석유가 고갈된다는 거에요. 두바이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왕이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직 석유가 나오고 있는 50년동안에 석유로 번 돈으로 투자를 잘해서 석유 없이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 경제를 만들자그렇게 할려면 경제 인프라를 구출할 창조적 브레인들이 필요한데~ 자기도 그렇고, 자기 아들들도 그렇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니 다 공부를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아들 셰이크 모하메드왕자를 영국으로 유학보내자보내면서 아들에게 당부합니다. “나는 네가 거기 가서 공부 잘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학위 따는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똑똑한 친구들을 사귀어라그래서 아들은 가서 공부보다는 똑똑한 친구들을 영국과 미국에서 많이 사귑니다. 그래서 2000명을 두바이로 데려옵니다. 이 사람들이 고액연봉을 받고 국가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됩니다. 이들 생각에서 나오는 수 백 개의 경이로운 디자인의 호텔들과 해상 주거단지와 아파트와 테마파크가 들어섭니다. 두바이는 20년만에 중동 해양 비즈니스 메카로 발돋움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GDP 90퍼센트 이상이 무역, 관광, 부동산, 건설, 금융, 호텔등 석유로 벌지 않는 돈으로 메꾸어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중 하나가 됩니다. 물론 두바이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부동산 버블도 있었고 슬럼프와 위기를 여러 번 겪었지만 중요한 것은 가난하고 자원도 없는 그 나라가 미래에 다가올 현실, 석유가 고갈될 것을 보고서 왕이 주어진 시간 동안에 최선을 다해서 미래를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도 아닌 모슬렘들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합니다.

 

! 그렇다면 신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늘의 기업을 얻는지 알고 있습니다. 영적 비밀과 실체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세계를 위해 자신의 재물을 투자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재물을 이 땅에 쌓아둔다거나 썩어질 것들에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보다 더 미련한 자가 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죠.

 

본문에 대한 두번째 해석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고리의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이자를 받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22:25) 그래서 돈을 빌려줄 때 미리 이자까지 합쳐서 장부에다 그 금액을 썼습니다. 예를 들면, 500만원을 빌려주었다면 장부에는 이자까지 포함하여 1000만원이라고 썼다는 것이죠. 그러면 나중에 1000만원 받고서도 율법조항을 잘 지킨 것처럼 행세했겠죠.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을 수 있습니다. 당시 빚진 사람들이 누구였겠습니까? 많은 경우 부자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 농부들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보통 소작료를 곡식으로 내는데, 흉년이 들어 소작료를 내지 못하면 빚을 지게 됩니다. 그게 흔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주인이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준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요? 요즈음 경제가 힘들다고 임대료를 깎아주는 건물주를착한 건물주라고 하는데, 이 주인이착한 지주란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집 나간 둘째가 유산을 다 탕진했어도 문제 삼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이 주인도 경제논리보다 자신의 토지에서 일하는 소작농들이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들과 좋은 관계성이 유지되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청지기는 그런 주인의 뜻이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그동안 자기 마음대로 과도한 이자를 붙여 거기서 나온 돈으로 사리사욕을 채웠을 수 있습니다. 청지기가 해고통보를 받고서야 재물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자기 미래를 위해 소작농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지만 아무튼 주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되었습니다. 소작농들의 입에서는우리 주인, 참 좋은 사람이야. 선하셔~’ 소문이 돌았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았겠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재물이 자신의 뜻에 맞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9절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여기서불의의 재물이란 부정하게 번 돈이 아니라하늘의 보화와 대조하여세상의 재물을 가리킵니다. ‘친구는 누구를 말합니까? 가난한 이웃을 가리키며 좀 더 나아가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고(25:31-46), 또 우리를 영원한 처소로 인도할 분도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세상 재물의 가장 큰 효용 가치는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친구로 사귀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에 가장 모범적인 인물은 삭개오입니다. 그는 여리고 지방의 세리장으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의 돈은 어쩌면 주님의 말씀 그대로불의한 돈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을 영접하고 그 회개의 표시로 그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했습니다. 불의하게 남에게 빼앗은 재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주님께 고백했습니다(19:8). 이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그가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19:9-10).

우리가 주님을 친구로 사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회개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물질의 회개이기도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돈 주머니를 회개한 자가 진정 회개한 자다라고 했습니다.

 

10-1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것, 불의한 재물, 그리고 남의 것에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재물을 마음 첫 자리를 두고 재물에게 충성하란 말처럼 들릴 수 있으나 그 말이 아닙니다. 재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용도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맡은 재물을 세상 사는 동안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큰 것, 참된 것, 너희의 것을 거기에 걸맞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13).

 

14절부터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도전입니다.(14-31)

바리새인들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듣고서 비웃었죠. 그들이 돈을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였지만 그 마음속은탐욕과 악독이 가득’(11:39)하였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불의하게 돈을 버는 방법이 세 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서기관직을 맡았기에 판결을 불의하게 하여 뇌물을 받았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과부들의 재산을 착취했으며, 다른 사람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법적 대리인으로 있으면서 횡령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옳다 하였습니다.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죄와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자신들은 죄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도 받지 않았고( 7:30) 그리스도의 교훈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 조상들이 물려준 인본주의적인 종교규례만 따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어떤 바리새인들은 수첩에다가 자기가 행한 금식 횟수나 구제 횟수를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그 횟수가 많은 어떤 바리새인은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를 빚졌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뭐라 하십니까?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환기시키시며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께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생활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기 좋아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모세의 자리에 앉아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어느 모임에서든지 윗자리에서 행세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오르려는 시도를 미워하십니다.

 

이어서 16절에서 주님은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고 침입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율법 시대는 갔고 복음의 시대가 왔다.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세리와 죄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고 있다. 그러나 행위로 율법을 만족시키겠다고 주장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하십니다.

 

그러면 복음의 시대가 왔으니 율법이 없어지는 거냐?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17절에서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쉽습니다. 율법의 요구와 위협은 우리의 죄에 대해 여전히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성경은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 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기 편의대로 뜯어 고치고 해석함으로써 자신들은 율법을 매우 잘 지킨다고 생각하였고, ‘스스로 옳다하였습니다.(15) 그 대표적인 예가 이혼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힐렐 학파 사람들은 어떤 이유든 남편이 이혼 의사를 밝히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해석했습니다. 가령 아내가 만든 음식이 맘에 안듣다든지, 아내의 목소리가 이웃집에 들릴 정도로 크면 이혼의 조건이 됩니다.  재력있는 바리새인들은 부인이 맘에 안 들면 이혼하고 젊은 여자를 신부로 맞아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2:16)’고 했습니다. 그들은 실상 율법을 모독하고 어기는 죄를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18) 이 말을 왜 하는 것입니까? “너희 바리새인들아~. 너희는 죄인이다. 구원받아야 한다. 지금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 회개하고 그리로 들어오라이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19-31절 비유를 통해 지옥에 가게 됨을 경고하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자색옷은 겉옷으로써 예수님 당시 왕이나 귀족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자색은 그 어떤 염료로도 제대로 색을 낼 수 없었는데 다만 뿔고동에서 채취한 염료로만 가능했다고 합니다. 페니키아산 뿔고동 일만마리에서 50㎠ 의 자주색 옷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운 베옷은 속옷으로서 금 무게보다 두 배가 더 비쌌다고 합니다. 부자는 명품중에 명품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롭게 생활하며 즐겼습니다. ~ 이러한 삶은 당시 바리새인의 로망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조되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지 나사로입니다. 그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있었습니다.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는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핧었습니다. 여기서 개들은 들개로써, 부자집 음식물 쓰레기를 먹을려고 모여 들었겠죠. 집 떠난 둘째가 돼지에게 무시받은 적이 있는데, 여기 거지 나사로는 개들에게 개무시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자는 전혀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마치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채 지나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거지가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눈을 떠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자기가 지옥에 와 있는거에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당연히 천국에 갈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통중에 있다가 눈을 들어 천국을 보고서 또 놀랍니다. 거기에 나사로가 있는거에요. 나보다 못한 사람이 왜 저기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지옥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지옥은 행위를 교정하는 장소가 아니라 형벌을 가하는 장소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더 나아지지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다고 하였습니다.(22:11) 그래서 지옥에서 형벌을 받으면서도 분해서 이를 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죄인들의 운명과 성품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보면, 부자가 지옥에 있어도 그 인격과 가치관이 전혀 변화지 않음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모습입니까? 현세를 살아가고있는 바리새인의 인격과 가치관을 대변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나사로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 종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섬기기 위해 천국에서 지옥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또 자기 가족을 위해 천국에서 세상으로 다시 돌려 보내라고 합니다. 아니 그동안 세상에서 거지로써 고생하다 지금 천국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데 다시 세상으로 거지로 돌려 보내라고 하다니~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습니다. 두 번째는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8) 목자 심정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계가족 몇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물론 형제를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 세상의 불신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회개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느니라”(딤전2:4)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바리새적 종교관을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하며 멀리했어요. 이방인들을 지옥 땔감으로 여겼어요. 자기와 자기 가족, 자기 민족만을 생각하고 그들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믿지 않습니다. 29절에서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 즉 성경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회개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대뜸그렇지 아니하니이다’(30) 강하게 반발하며 불순종합니다. 죽은 자를 살려 보내라고 자기 주장을 합니다. 죽은자가 살아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여러 방향과 비유로 알기 쉽게 가르쳤지만 바리새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표적만을 구했습니다. 많은 표적과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귀신이 들렸다며 오히려 공격했습니다. 본문의 부자의 요구처럼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믿기는 커녕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를 했습니다.(12:10)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그들은 목격하고 알았지만 로마 경비병들과 함께 사실을 은폐하고 공모하고 거짓말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였습니다.(28:12-14)

 

!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비유속의 부자처럼 지옥에 가게 된다고 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옥행에서 천국행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성경은 누구에 대한 기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유에서아브라함을 등장시키고 그 앞에아버지란 호칭을 넣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리새인들의 혈통적 조상이죠. 그리고아버지란 호칭은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붙였던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23:9)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말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대제사장과 같은 중보의 역할을 해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거란 바리새인들의 기대를 표현한 것입니다. ! 진정한 대제사장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요 길입니다.

 

예수님은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하십니까? “너희들 천국에 가는 걸로 아는데~. 아냐. 이대로 있으면 지옥에 가~. 그러니 회개하고 빨리 구원의 문인 나에게로 와서 나를 따라와.’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듣기 거북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깨우치려는 예수님의 은혜의 가르침입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요즈음 청년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잘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세상 지혜는 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반면 성경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하늘나라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생명을 취하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나의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로 생명을 살리는데, 선한 일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우리 모두 하늘 부자가 되는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