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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34강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19:28-20:18)2022-11-14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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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4 (이 아브라함)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19:28-20:18

요절 / 누가복음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오늘 말씀은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그 권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 보고자 합니다. 권위가 무엇입니까? 하나의 권리, 즉 주어진 상황에서 결정을 하거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관리하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 권위를 주실 때 한가지 조건이 있었죠. 보다 더 높은 권위인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도록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하나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죠. 하나님과 같아질려고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덤이었습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과 비극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이 깨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권위를 찬탈해 갔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권위가 인간에게 행사되게 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사 그 일을 성취하고자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권위가 어떤 것인가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 분의 권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배우길 기도합니다.

 

19 2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이 말씀은 앞에 나온 내용을 말합니다. 한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가죠. 그때 종들에게 한 므나씩을 주고장사하라고 합니다. 주인이 왕이 되어 왔을 때 주인의 권위에 복종하여 열심히 장사한 사람들은 왕이 된 주인에게 더 큰 권위, 여러 고을을 다스리는 권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반면 주인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무시하고서 장사하지 않은 종은 있는 것조차 빼앗깁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십니다. 주님이 가시는 예루살렘 길이 어떤 길입니까? 대적자들의 소굴이며 고난과 능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행보가 빨라집니다. 아버지의 구속 계획을 이루시고자 지체치 않으십니다.

 

29-34절 내용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어린 나귀가 필요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제자들이 준비해야 마땅했으나 아무도 미리 준비해 놓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예비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 나귀의 임자가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주가 쓰시겠다말하라 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도둑놈 취급받으면 어떻게 해요?’ ‘어렵겠는데요.’ 이렇게 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명한대로 했을 때 어떻게 되었나요? 나귀 임자가 군말 없이 즉시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이 말에 자기의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내어 주죠, 청지기로써의 정체성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내어줄 때 그 결과가 무엇이죠? 자기의 나귀가 그저 물건을 나르거나 사람들의 이동수단으로서 평범하게 쓰임 받는 나귀가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는 나귀가 되었죠. 예수님이 왕으로 입성할 때 가장 귀하게 쓰임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귀 주인에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똑같은 물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쓰시면 Best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주가 쓰시겠다하면 기쁨으로 내어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져온 나귀 새끼 위에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깔아 안장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그 위에 태웠어요. 이를 본 백성들이 다 겉옷을 벗어 주님 가시는 길에 깔아 양탄자를 대신하게 하였어요. 이러한 예의를 표함으로 그들은 주님을 왕으로서 대접하며 왕으로 영접하며 환영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스가라 9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요 겸손의 왕으로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비교해 볼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총독 빌라도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아마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평소에는 지중해변 가이사랴에 거주했습니다. 거기서 휴양하며 향락을 즐겼죠.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와 대제사장에게 유대지역을 다스리도록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명절이 되면 총독 빌라도는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 북쪽에 있는 안토니오 요새에 머룰렀습니다. 명절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소요나 반란을 예방하는 것이 그의 큰 임무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행차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거대한 전차에 타고 있었고, 그 뒤로 말은 탄 기마병들이 따랐으며, 완전 무장한 보병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화려한 깃발들이 하늘을 메웠고, 창검과 방패들이 햇볕에 번쩍이며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행렬의 앞뒤에는 행차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진동하였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는 빌라도, 누가 더 왕처럼 보입니까? 또 그 행차의 성격이 각각 어떻게 다른가요?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37-38절은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먼저 주님이 능력있게 행하신 천국 사역을 찬송하였습니다(37). 이어서 주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왕으로 높였습니다(38). 38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이스라엘의 왕, 유대인의 왕이 되어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왕이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온 세상의 왕으로 입성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여정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수도 예루살렘일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목적지는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들리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십니다. 그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통치권을 가지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 발아래 굴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그 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영원토록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구주, 그의 왕이 되어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왕이십니까? 그렇다면 다 함께 외쳐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왕이십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이 찬송은 예수님의 탄생시 천사들이 했던 눅2:12 찬송과 비슷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다른 점은 예수님의 탄생시에는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중에 평화이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하늘에는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왜 다를까요? 제가 묵상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북한에서 핵을 모두 폐기하기로 결정했다면 누구에게 평화가 될까요? 핵 위협이 제거되니 남한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이런 날이 오길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생각해 보면 되겠습니다. 하늘과 땅이 불화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 성자 예수님을 보낸다면 어디에 평화가 임합니까? 땅에 임합니다. 특별히 구원 받기를 갈망하던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죄 값을 지불한다면 어디를 향하여 화목을 요청하는 것이 될까요? 하늘을 향하여 화목을 요청하는 것이고 평화가 하늘에 임합니다. 특히 천상교회에 있는 믿음의 선진들에게 전해지는 평화의 소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대화하실 때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에 그토록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 됩니다. 언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나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타나게 될 때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하는 일을 하실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셨던 인류의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만천하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 얼마나 자비롭고 선하신지, 그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 또한 하나님의 그 지혜, 그 경륜이 드러날 때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 세계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놀라고 황송하여 다 무릎 꿇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39절에서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제자들이 찬송하는 일을 금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주님은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하십니다(40). 그동안 대중 앞에서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기 꺼려했던 주님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증거합니다. 일찍이 선자자들은 메시야가 강림하면 온 우주 만물이 찬송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55:12)라고 했고,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2:11)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신 일은 온 우주 만물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도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요 천사들도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구원자요 중보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전도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뜻입니다. 그러기에 전도와 찬송은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갑니다. 그런데 가까이 올수록 예수님의 얼굴에 수심이 짙어갑니다. 급기야 성을 보시며 우십니다. 본문에 나오는울다란 뜻은 그냥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비통한 통곡을 말합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우는 것과 같은 그런 울음을 울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우실까요? 42-44절까지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루살렘의 뜻이 무엇입니까? ‘평화의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평화의 성아~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의 눈에 숨겨져 있도다하십니다. 그들은 진정한 평화가 뭔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서 평화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기 백성에게 왔지만 예루살렘은 영접하지 않습니다(1:11). 배척합니다. 오히려 잡아 로마의 권위를 의탁하여 죽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평화롭게 사는 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국이 무엇입니까? A.D.70년에 그들이 의탁했던 로마에 의해 수백만명의 살육을 당하며 예루살렘 성이 초토화됩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쟁기질을 하여 농사를 지을 정도였다고 기록합니다. 이 참화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2천년동안 나라없이 떠도는 유랑민족이 되죠. 평화의 도시가 심판의 도시가 됩니다. 예루살렘의 미래를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신 심판의 주이십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멸망토록 한 그 원인의 중심부가 어디일까요? 헤롯궁입니까? 아닙니다.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분노하시며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서슬퍼런 눈빛과 엄하고 거친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강도의 소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강도는 마귀를 상징합니다(10:10). 그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특기입니다. 성전에 기도 소리가 가득해야 하는데 장사하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탈취하여 지도자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시행되어야 할 곳이 지금 마귀들이 활개치며 마귀의 권위가 행사되고 있습니다. 맘몬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끝이 파멸인 것을 내다 보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쫓아내심으로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전이 회복될 수 있습니까? 4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죄를 몰아내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움이 있어야 하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채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말씀으로 채우셨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성전에 죄에 대한 회개의 비움과 말씀의 채움이 날마다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꾀했습니다. 이들은 누구죠?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산헤드린 구성원은 산헤드린 공회원 70명과 대제사장 1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이스라엘의 종교문제를 다루는 최고 법정역활을 했죠. 로마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성전을 관리하였습니다. 성전에 산헤드린 건물이 있었고 산헤드린 건물 앞 이방인의 뜰에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상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세로 내기 위한 환전과 제물로 드릴 가축을 팔면서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 이윤의 일부를 로마권력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자 누가는 산헤드린 구성원을 이야기할 때대제사장들이라며 복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죽을 때까지 섬기는 종신제로서 단 한 명만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규정하셨습니다. 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며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이었죠. 저자 누가는대제사장들이란 표현을 통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의도적으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산해드린에서 나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꾀했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20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성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갈릴리 촌 사람이 와서 자기들이 합법적으로 장사하도록 허락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성전에서 복음 장사를 하고 있는 예수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이 말은우리는 로마로부터 합법적으로 권위를 위임받아 성전을 관리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우리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맘대로 하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대답 대신 역으로 질문하십니다. 3.4절을 읽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요약하면 세례요한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과 같이 예수님의 권위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인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받았다는 것이죠. 회사에서 과장님이 대리에게~ , 일하지 않고 어디가?”, “회장님이 심부름시켜서 가는데요하면 끝납니다.

 

예수님은 9-18절에서 불의한 농부 비유를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농에게 세를 놓았습니다. 보통 가치있는 포도열매를 얻으려면 5년이 필요합니다. 주인은 충분히 기다렸다가 종을 시켜 농부들에게소출 얼마를 소작료를 받아오게 하였습니다. 소출 얼마를 받고자 합니까? 주인과 농부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성을 계속 유지하려면 농부는 소출 얼마를 주인에게 줘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농부는 어떻게 합니까? 소출 얼마를 주지 않고 거저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때리기까지 합니다. 농부는 주인을 무시했고, 관계성을 깨버렸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이때 주인이 어떻게 하죠? 농부들은 관계성을 깼지만 주인은 관계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계속 종을 보냈고 급기야 아들까지 보냅니다. 아들은 공경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했나요? 오히려 아들을 죽입니다. 자기들이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죽인 그들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요? 욕심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소작농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주인과 농부라는 관계성이 희미해졌습니다. 욕심이 생기니 정체성을 잃었고, 정체성을 잃으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죽음을 낳습니다(1:15). 그들이 욕심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소출의 얼마를 드려야 합니다. 소출 얼마를 드리는 것이 욕심을 이기는 길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는 길입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 대상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들은 농부들입니다. 그들이 비록 성전에서 일하는 지도자이지만 하나님께 소출 얼마를 드려야 하는 농부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으로 대접받으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공식적인 호칭은아버지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하시며너희의 아버지는 한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하셨습니다(23:9)

 

오늘 우리에게소출 얼마를 드림은 무엇입니까? 내 삶의 한 부분, 주일예배, 십일조, 재능의 일부분을 드리는 것등입니다. 주인은 어떤 시점까지는 참지만 계속하여 참지는 않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지만 예수님은 새 건물인 교회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건물 성전 시대가 가고 인격 성전 시대가 열립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버린 돌이 오히려 사람을 심판하는 심판의 돌이 됩니다. 예수를 버린 사람은 최후의 심판때 그 돌에 맞아 산산히 부서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배웠는데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본래 가지신 권위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아버지의 권위에 굴복하심으로 그 권위를 더욱 곤고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에 복종하셨습니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가 해야 할 일을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왕으로 입성할 때나도 폼 좀 잡고 싶은데, 말을 타고 입성하면 안될까?’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는대로 하죠. 또 소식을 들어보니 그동안 포도원 농부들이 소작료를 안내고 아버지가 보낸 종들을 때리고 나중에는 상해를 입혀 종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보았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이번에는 네가 가야겠다할 때아버지, 나를 사랑하세요? 내 아버지 맞나요? 내가 죽어도 좋아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죽음의 길일지라도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여 농부들에게 나아가셨습니다. 사지로 당당하게 앞장서서 가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게 하시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동일하게 우리구주 예수님은 주님의 권위에 복종하여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땅에서 왕같은 제사장의 권위를 주시며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권위를 주십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주가 쓰시겠다하시며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십니다. 성전을 깨끗케 하십니다. 말씀으로 가르치십니다. 소출의 얼마를 바치라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하늘로 이끄시는 구세주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왕이요 구주로 모시고 이 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축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