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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35강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 (누가복음 20:19-21:4)2022-11-28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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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누가복음 35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말씀/ 누가복음 20:19-21:4

요절/ 누가복음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신앙인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9-26절을 보십시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지난 말씀에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포도원 주인과 소작농의 비유 말씀을 주셨습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소출을 내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주인이 보낸 농부들을 능욕하고 때린 농부들을 향해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했습니다. 주인은 이들에게 계속해서 종을 보내다가 마지막에는 자기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세상에 이런 주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농부들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비유 말씀을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여겼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또 지금 그들의 눈 앞에서 이 비유 말씀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은 회개하는 대신 예수님에게 덫을 놓아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그들은 정탐을 보내 예수님을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내용인즉 예수님은 정직하여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바를 두려움없이 말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

 

당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핫 이슈였습니다. 주로 갈릴리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민족주의자들은 절대로 세금을 바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황제에 의해 임명이 된 대제사장들과, 역시 로마 황제에게 왕권을 부여받은 헤롯 왕 및 그의 정치적인 지지자들인 헤롯 당원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의 경우 성전 제사제도를 유지하고 이스라엘의 종교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타협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뜨거운 감자와 같은 이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답변을 하더라도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대중의 인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 것이고 예수님은 민족주의자들에게 테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만약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은 즉각 로마 군인의 체포대상이 될 것이었습니다. 또 만약 노 코멘트를 한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겁장이로 보일 것이었습니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데나리온 은전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물으셨습니다. 당시 데나리온 은전 하나는 노동자 하루의 품삯으로 오늘날로 치면 10만원 정도 됩니다. 이 데나리온 은전의 앞면에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초상과 라틴어로신성한 아우구스트의 아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뒷면에는 여사제 혹은 티베리우스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인의 초상과대제사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은전에 카이사르의 형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이 답변을 들으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원문상바치라는 표현은되돌려 주어라(give back, return)’는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포도테 타 카이사로스 카이사리” “가이사의 것은 도로 가이사에게 되돌려 주어라이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참으로 신적 지혜가 담긴 말씀입니다. 세금을 반드시 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는 결국 세금을 내라는 말이니 반박할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우상의 형상과 글을 새겨 사람들에게 자기를 신인 것처럼 선전한 카이사르에게 그것을 다 모아 다시 되돌려 주라는 의미이니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아포도테 타 투 쎄우 토 쎄우”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시 로마 황제 카이사르가 온 세상을 다스렸던 것처럼 오늘날 이 세상은 하나님없는 인본주의, 세속주의, 쾌락주의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속주의, 인본주의, 쾌락주의 사상에 기초한 법과 제도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신자가 이것을 거부하려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신자가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신앙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이러한 법과 제도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깊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주의, 쾌락주의, 인본주의 사상에 기초한 법과 제도는 지키지만 그 정신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카이사르가 요구하는 세금은 내지만 그 은전에 새겨진 생각과 사상, 곧 카이사르가 신적인 존재요 대제사장으로서 온 세상을 통치한다는 그 생각은 온 몸과 마음으로 거부하고 그 은전을 카이사르에게너 다 가져라하며 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신자의 삶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오늘날 망망대해와 같은 거대한 세력은, 권력, 쾌락입니다. 요즘 대세는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즐길 수 있는 것은 마음껏 다 즐겨보자입니다. 젊은이들은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해 불륜 및 각종 퇴폐적인 성적 행위를 서슴치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마약하는 사람을 쿨한 사람, 멋진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도 조금씩 들어오고 있습니다.

 

배가 바다 위를 항해하지만 배 안에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처럼, 신자는 죄와 쾌락이 바닷물처럼 범람하는 세상을 살지만 거룩함과 영적인 순결을 지키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배의 일부분이 바닷물에 잠기는 것은 용납하지만 바닷물이 들어올 수 없도록 단호히 조치하는 것처럼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의 법과 제도를 지키지만 내면에 하나님 한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영적인 삶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도록 지켜야 합니다.

 

27-33절을 보십시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당시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다윗 시대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예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 이르러 대제사장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자체적으로 정할 수 없었고 로마 정부가 임명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정치 권력과 부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매년 내는 성전세를 성전에서 수수료를 받았고 또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준비하는데 그 제물을 성전에서 일정한 수익을 챙기고 팔았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권이 어마어마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당시 적대 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바리새인들이 인정하는 구전율법과 탈무드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모세오경만을 권위있는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또 천사들의 존재와 내세를 인정하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눈에 보이는 이 현세가 전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죽으면 내가 누리는 부와 권세가 내 후손에게 유전됨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유지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경우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생긴다는 논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일곱 형제와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써 준 율법에 의하면 형제 중 한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형을 위해 자식을 낳아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형에게 주신 땅이 소실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 형의 삶과 유산이 후손에게 계승되도록 했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큰 형이 결혼을 했는데 그만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모세의 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런데 동생도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렇게 일곱 형제가 다 형수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나중에 형수도 죽었습니다. 자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이 형수는 누구의 부인이 되어야 합니까? 부활이 있다면 이 난제를 해결할 길이 없으므로 그들은 결론적으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34-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가고 시집가지만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 없고 천사와 동등한 존재요 부호라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오해한 것은 부활이 이 세상의 삶이 똑같이 그대로 연결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후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과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나 다니엘서를 통해 부활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손쉽게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을 통해 부활을 입증하셨습니다. 모세오경의 글에서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 아래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이누구누구의 남편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현재 그 사람이 그 누구누구의 남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지요? 만약 어떤 사람의 아내가 죽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의 남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홀아비라고 이야기하든지, 홀로 되었다, 혹은 한자어로상처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논증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셨습니다. , 그런데 아브라함이 죽었습니다. 부활이 없으므로 그의 존재는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주 어디를 가도 아브라함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을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실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언뜻 이 예수님의 논리를 완전히 납득하고 수긍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졌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논리를 수긍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2천년 전 사두개인들이 더 똑똑한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가 지식이 쌓여 더 똑똑해진 것일까요? 아무튼 예수님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나는아무개의 남편이라고 자신을 칭했다면 그 아무개가 지금 현재 살아있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셨다면 아브라함은 지금 현재 살아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아무개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하신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공과 명예를 맛본다 해도, 인생 최고의 행운과 축복을 누린다 해도,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복권에 당첨되거나 사업이 잘 되어 큰 돈을 소유하게 된다 해도 하나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면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것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아무개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하신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세상만물보다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아무개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습니까?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학생 시절 늘 등록금과 생활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경제적 어려움이 있지만 마태복음 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마음을 드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좋은 알바도 주시고 장학금도 받게 하셔서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집값이 싼 곳으로 멀리 이사가서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고싶은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땅을 지켰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성경공부를 하겠다는 양을 보내주셨습니다. 또 그양을 통해 여러 양도 소개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1:15,1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러분, 젊은 날 복권을 사는 대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복권은 길을 지나다가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내 위로 떨어지는 것보다 당첨될 확률이 더 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은 예외없이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고 천사들과 만물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41-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에게 질문을 하던 이들에게 역공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하셨는데 왜 시편에서 다윗은 메시야를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는가? 조상은 후손의 아버지와 같은데 어떻게 다윗은 자기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야를 나의 주님이라 칭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자 누가도 여기에 대해 본문에서는 답을 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그 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저자 누가의 의도에 따라 누가복음 남은 부분과 사도행전을 유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5-47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추구하지만 속으로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명예와 권세와 부를 누리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를 지적하셨습니다.

 

21: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 당시 화려한 헤롯 성전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백성들에게 헌금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부자들이 헌금을 많이 하면 그것을 선전하고 부자들에게 여러 특혜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천원짜리 두 장을 헌금한 것입니다. 민망한 이야기이지만 어떤 목사님들 중에는 요즘 거지도 천원짜리 주면 안받는데 누가 천원짜리를 헌금했느냐고 야단을 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의 액수보다 먼저 그의 마음을 보십니다. 본문의 과부는 일주일 생활비 중 쪼개어서 헌금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부자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을 드려 헌금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과부는 종교 지도자들과 대비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추구했으나 속으로는 현세적인 것을 추구했습니다. 이에 비해 본문의 과부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렸습니다. 신자의 참된 신앙의 모델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본문의 과부입니다.

 

결론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세속적인 의미와 성공과 명예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고 나의 마음과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