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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디모데후서 특강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 (디모데후서 2:1-13)2018-02-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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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디모데후서 특강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 


말씀/ 디모데후서 2:1-13

요절/ 디모데후서 2:3-4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봄학기를 앞두고 오늘 말씀을 특강으로 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봄학기 우리가 어떤 자세로 각자 사명의 땅에 나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먼저 디모데후서의 배경을 잠간 살펴보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한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목자요 감독으로 세웠습니다. 대 목자인 바울이 개척한 교회를 물려받은 디모데는 여러가지 면에서 에베소 교회를 감독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수한 내면을 가졌지만 마음이 여리고 연약했습니다. 교회 내에 디모데보다 연로한 장로님들, 우리로 치면 시니어 목자님 사모님들이 많아 젊은 그가 감독으로서 일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또 교회 내에 영지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이들이 있어 이들과 치열한 영적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가 믿고 의지하는 바울 목자님마저 로마 감옥에 재투옥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인간 목자인 바울을 의지할 때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구원하시고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를 에베소 교회의 목자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강해질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가 많은 증인 앞에서 바울에게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 복음을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합니다. 충성되다는 것은 복음을 변질시키지 않고 들은 그대로, 있는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교사들은 복음과 그리스의 이원론적 영지주의 사상을 혼합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복음과 아시아의 신비주의 사상을 혼합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변질시켰습니다. 변질된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을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생명을 살리지만 변질된 복음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디모데가 변질된 복음으로부터 에베소 양떼들을 지킬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충성된 성경선생들을 많이 세우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다음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러므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좋은 병사란 어떤 병사입니까? 흔히 좋은 병사하면 체력이 강하고 멘탈이 강한 병사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최홍만처럼 체격이 크고 건장해도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할 생각부터 한다면 그는 좋은 병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좋은 병사는 체격이나 멘탈보다 좋은 군인정신을 가진 병사가 좋은 병사입니다. 좋은 병사는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적진에서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우를 버리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줄행랑을 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그렇게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군인답게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을 택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군인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여러가지 생활의 불편함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군생활이 힘들다고 거칠고 험한 말을 내뱉지 않습니다. 군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런 어려움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내합니다. 또 그는 충성스럽습니다. 그에게 보직을 주면 그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맡은 바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합니다. 


바울은 좋은 병사였습니다. 그는 그를 병사로 소집한 총사령관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그는 셋방에서 비교적 편하고 자유로운 외부인 면회가 가능했던 1차 투옥 때와 달리 로마의 음침한 반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곳은 밤이 되면 뼛속까지 습기와 냉기가 스며들었습니다. 그러한 아픔보다 바울을 더 아프게 했던 것은 박해가 시작되자 여러 복음의 동역자들이 복음을 배반하고 떠난 것이었습니다. (딤후 1:15) 바울은 떠나간 이들을 생각하며 아파하고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총사령관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이곳으로 가도록 작전명령을 내리신 것으로 알고 순종하여 왔습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다음 작전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른 강한 멘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와 같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서, 군인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순수하고 마음이 여린 디모데가 여러 고난 가운데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한편에는 혹시 디모데도 딤후 1:15절에 언급했던 부겔로와 허모게네처럼 고난이 너무 힘들고 두려워 바울을 떠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바울은 디모데를 인간적으로 위로할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냐 힘드냐, 너무 힘들면 괜찮으니까 따뜻한 휴양지에 가서 한 몇 달간 푹 쉬었다가 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적인 위로를 하는대신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러므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고 말합니다.  


병사로 부름받은 자에게는 여러가지 고난이 따릅니다. 먼저는 단체 생활을 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집에서 자기만의 방에 침대에 누워 혼자 자다가 전시용 텐트에 들어가 차가운 바닥 위에 가죽 텐트 한 장 깔고 국방색 전투 이불을 덮고 여러 전우들과 함께 자야 할 때 고난스럽습니다. 또 새벽 한 밤 중에 일어나 불침번 근무를 서야 할 때, 불침번 근무를 마치고 막 자려고 하는데 잠이 안와 눈이 말똥말똥할 때, 겨우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기상나팔이 울려퍼질 때 고난스럽습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성격, 모난 성격, 험한 말을 내뱉는 동료 병사들과 생활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상관의 명령에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절대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또 전쟁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전쟁시 지휘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수백 수천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는 고문관(어리버리하게 행동함으로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크게 방해하는 군인)이 절대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고문관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뙤약볕 아래 무수히 많은 반복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런 훈련의 숙달여부가 실제 전쟁시 전우의 목숨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 때 나 한 사람이 고문관처럼 어리버리하게 행동하다가 수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가지 고난 가운데 있는 디모데에게 이와같이 그가 군인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돕습니다. 그가 고난 가운데 심약해져 직분을 버리고 전장을 이탈할 생각을 하거나  두려움에 빠져 고문관같은 행동을 한다면 에베소의 여러 양떼들은 늑대같은 거짓 교사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서 강한 군인 정신을 갖도록 돕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좋은 병사가 강한 것은 그가 체력이 좋거나 멘탈이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병사가 강한 것은 그를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삶의 자세와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를 좋은 병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소망 가운데 불러준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분명한 삶의 자세와 목표가 있었습니다. 마치 돋보기가 한 촛점에 빛을 모을 때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를 소망 가운데 병사로 불러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한 가지 그의 삶의 촛점이 그를 불꽃처럼 뜨겁게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심약해진 디모데에게 우황청심환을 복용하도록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마인트 컨트롤을 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를 믿어주고 그를 에베소 양떼들의 감독이요 목자로 세워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그 한 가지 열망으로 불타오르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초대 교회 성도들과 비교하여 연약한 가운데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군인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좋은 병사로서의 자세를 갖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자기가 군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사령관이신 예수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단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싫어요”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한 달 먼저 군에 입대한 고참의 명령도 서슬이 퍼런데 총사령관의 명령 앞에서 “싫어요”라니요! 군인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런 대답을 거침없이 내놓는 것은 그가 자기를 민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민간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운데 뙤약볕 아래에서 훈련받으라고 하면 차라리 나를 데려다 고문을 해라 반항하고 추운데 나와서 훈련받으라고 하면 그냥 이 자리에서 죽겠다고 말합니다. 민간인은 전쟁이 벌어질 때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양떼들을 죽이는 원수 마귀와 또 그의 하수인들과 영적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급소에 한 발 맞으면 치명상을 입히는 거짓 복음, 세상 쾌락, 물질주의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민간인 마인드를 가진 크리스챤은 있으나 마나 한 크리스챤입니다. 


이제 봄학기가 되면 다시 양들의 생명을 앞에 놓고 캠퍼스의 상대주의, 무신론 사상, 쾌락주의 적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이 전투를 앞두고 용감히 나가 싸울 전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옆에 있는 동역자를 부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다음으로 바울 사도는 경기하는 자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경기하는 자는 고대 올림피아 제전 경기에서 면류관을 얻기 위해 경기에 참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는 멀리뛰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달리기, 레슬링, 복싱, 또 레슬링과 복싱의 혼합경기인 판크라티온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올림피아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면류관을 받았으며 고향의 도시에 돌아오면 성대한 개선식을 치루었습니다. 사방에서 모여든 관중들은 우승자에게 꽃과 잎을 뿌렸습니다. 당당하게 4두 전차에 서서 입성하는 우승자를 위해 사람들은 성벽을 일부 허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우승자에게 주는 특권은 도시마다 달랐는데 아테네의 경우 귀빈관이라는 최고급 식당에서 평생 무료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 또 공적인 자리에서 사제들과 함께 영예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며 일생 세금 면제의 특권이 주어졌고 공공장소에 세워둔 기념 석주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스파르타의 경우 올림피아 우승자는 전쟁에서 왕의 바로 곁에 서서 싸울 수 있는 명예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이 올림피아에 참가하여 승리자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안긴 임효준 선수의 경우 중학교 때부터 정강이뼈 골절, 오른발 인대 파열, 오른 발목 골절, 요추부 염좌 등 크고 작은 수술을 무려 7번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승리자의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19세의 늦은 나이에 한국인에게 생소한 스켈레톤을 시작한 윤성빈 선수의 경우 2012년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거의 꼴찌를 하였습니다. 조종은 커녕 그냥 썰매에 끌려 내려왔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포기할까 생각했으나 일단 두 달만 버텨보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시합에서 25명 중 15위로 점프했습니다. 이에 가능성을 발견했고 스켈레톤을 다시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2015년 소치 올림픽에서 27명 중 16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 썰매타는 것이 편안해지고 심지어 재미가 있다고 느껴질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올림픽 시상대에 서서 메달을 받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여러 고난 가운데 있는 디모데에게 그가 영적인 경주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경주자는 그 경주가 끝난 후 받게 될 영광의 면류관을 기대하고 달립니다. 그 달리는 과정에서 때로는 발에 물집이 잡히고 숨이 끊어질 것 같고 때로는 사점을 통과하는 마라톤 선수처럼 정말 더 뛰면 바로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사로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끝까지 참고 견디면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하게 되고 승리자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디모데도 현재 힘든 고난이 경주와 같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경주가 때로는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그 경주 후에는 승리자의 면류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든 훈련을 받지 않고 편하게 쉬고 놀다가 그냥 경주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4년간 피나는 훈련을 받으며 오직 이 날이 오기만을 준비한 선수와 4년간 놀고 싶을 때 놀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먹고 싶을 때 먹어 살이 피둥피둥하게 찌고 배가 나온 선수가 경쟁이 될 리가 없습니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마자 훈련으로 자신을 연단하고 준비한 선수는 그야말로 야생마처럼, 표범처럼 결승선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에 비해 배가 나온 선수는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디모데는 할 수 있으면 이러한 고난의 과정 없이 곧바로 승리자의 면류관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길을 가신 후에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올림픽 위원회가 아무리 선수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편애하고 사랑해도 규정대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하지 않은 선수에게 금메달을 줄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주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셔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말씀을 순종하며, 예수께서 앞서가신 고난의 길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지 않은 종에게 승리자의 면류관을 주실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문화의 함정은 ‘편리하고 간편한 것이 좋은 것이다, 빠르게 결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최고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삶이 최고다’ 하는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한 순간을 위해 오랜 기간 치열하게 준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경주를 마치지 않은 자에게 승리자의 면류관은 없습니다. 경주할 때 힘들고 그만두고 싶습니다. 이때 결승선을 통과한 후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면류관을 받을 그 날을 상상하면 다시 경주를 계속할 힘을 얻게 됩니다. 


이번 봄학기 주님은 우리를 영적인 경주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경주의 끝에 주실 면류관을 예비하여 두셨습니다. 이 경주를 하기 위해 때로는 피곤을 참고 때로는 만사 귀찮다는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절제와 인내가 요구됩니다. 사실 평생 이런 경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힘듭니다. 그러나 우선 이번 한 학기 해보자 생각하면, 두 달만 더 해보자 생각한 윤성빈 선수처럼 이번 한 학기만 해보자 생각하면 힘이 나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봄학기 올림픽에 참여하는 선수처럼 자기를 절제하고 인내하는 가운데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 가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따라 달리는 영적인 경주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다음으로 바울 사도는 수고하는 농부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만만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농부의 일만큼 부지런함이 요구되는 일이 또 없습니다. 저의 조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는데 새벽 4시에 닭이 꼬끼요 하고 울면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8시가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셔서 손주인 저의 밥을 차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밭으로 일하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면 고구마를 삶아 김치와 함께 맛있게 드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커다란 알루미늄 통을 어깨에 매고 나가셨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그 통이 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논에 농약을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어린 저는 농사짓는데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성장한 후 농사일이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논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감자밭, 고추밭, 깻잎밭도 돌봐야 하고 섬이었기 때문에 염전일도 해야 하고, 김과 파래도 말려야 하고 정말 일이 끝없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농부가 이와같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편하게 놀고 쉬면서 봄과 여름을 보내면 가을에 맺을 추수의 열매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추수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승리자의 면류관을 얻지 못하는 경주자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명예나 영광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편하게 놀고 쉰 농부는 추운 겨울 기간 본인과 자기 가족을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게 만듭니다. 쌀을 팔아 자식들 등록금도 마련하고 생계도 유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그 수치와 비참함과 배고픔의 고통을 생각할 때 농부는 지금 차라리 성실하게 일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디모데는 에베소 감독으로 살면서 농부처럼 부지런해야 했습니다. 하루가 시작되면 교회와 양들을 위해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했습니다. 매주 말씀 공부 노트와 주일 메시지 준비를 시간과 마음을 다해 감당해야 했습니다. 양이 어려움에 처하면 심방가서 도와야 했고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혼돈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집중적인 말씀공부로 도와야 했습니다. 그를 공격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기도하는 가운데 지혜롭게 잘 대처해야 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그가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이로 인해 맺게 될 생명의 열매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추수의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될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농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농부에게 게으름과 안일은 치명적입니다. 씨를 뿌려야 할 때 그 타이밍을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비가 안 오는 가뭄의 때에 논에 물길을 터주지 않으면 또 한 해 농사를 마치게 됩니다. 홍수가 나면 얼른 물이 빠지도록 또 길을 터야 합니다. 농부는 늘 논과 밭에 마음과 시간과 정성을 드리며 부지런하게 일해야 합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영적인 농부로서 주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귀찮다고 씨뿌리기를 뒤로 미루고 비가 안와도 논에 나가보지 않고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스마트폰이나 쳐다보고 있으면 추수의 때에 영원한 수치와 빈곤과 가난함과 배고픔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농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힘듭니다. 그러나 올 한 해 영적인 농부로 살아보기를 기도합니다. 추수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이상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말한 비유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군인의 비유, 경기자의 비유, 농사의 비유는 공통적으로 자기의 부르심과 신분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이 군인정신이 결여된 군인입니다. 꿈이없이 억지로 맹훈련을 받는 사람입니다. 농사짓기 싫은데 농사짓는 농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과 직분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고 주께서 주시는 총명을 덧입도록 말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여러 고난 가운데 마음이 연약해진 디모데에게 바울은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디모데가 자신의 부르심과 신분을 기억할 때 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강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또한 디모데는 바울 목자님이 감옥에 갇힘으로 매우 연약해졌습니다. 바울 목자님이 에베소에 심방오셔서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조언도 해주시고 도와 주시면 큰 힘이 될 터인데 감옥에 갇히셨으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그는 죄인처럼 감옥에 매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실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혔으나 복음의 말씀은 매이지 않아 로마 간수와 다른 죄수들, 또 로마의 고위 관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또 바울이 감옥에 갇혔기에 디모데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10절에서 바울은 택함받은 자들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합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는 것은 반드시 약속한 것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함께 살고 끝까지 인내하면 주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천지는 무너질지라도 이 주님의 약속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다른 무엇보다 이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님께서 그를 영적 군인으로, 면류관을 위해 경주하는 선수로, 추수를 기대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농부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 주님께서는 오늘날 이 시대에도 우리를 군인으로, 선수로, 농부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이 참으로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봄학기를 앞두고 이 주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