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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로마서 제3강 '하나님의 의'(로마서 3:21-31)2018-08-1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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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로마서 3강


하나님의 의




말씀/ 로마서 3:21-31


요절/ 로마서 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은 종교 개혁자 루터가 말하기를 성경 전체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고 했던 부분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영원한 생명과 직결되며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뿌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경의 핵심을 알고 내 신앙생활의 가장 뿌리를 견고히 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이드 존스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원더풀한 한 문구를 고르라면 본문의 ‘이제는’을 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 문구는 링컨의 노예해방의 선언과도 같습니다. 링컨이 서명한 노예 해방 선언문을 보면 ‘1863년 1월 1일부터’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노예로 예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라는 문구로 이어집니다. 그가 이 서명을 사인하고 선포한 순간 수백년동안 노예로 살아가던 모든 이들이 이제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이제는’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무엇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한 번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라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얻을 수 있는 의와 상관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상관없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그 의로움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방식이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인간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다 죄인이 된 것을 보시고 어쩔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2천년 전 갑자기 생각해내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율법과 선지자들, 그러니까 구약 성경의 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를 범한 인간들에게 ‘의’를 주시는 새로운 방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2절은 짧고 단순하지만 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를 받게 되는 비밀을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믿음’입니다. 로마서에서 ‘믿음’과 대조되는 개념은 ‘행함’입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행함’ 혹은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말씀 중 지킬 것은 잘 지키고 행할 것은 잘 행할 때 선생님 보기에 좋은 학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 ‘의’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 말씀을 똑같이 지킨다 하더라도 이왕이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지키면 더 예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이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고위직에 있던 자이건 사회적 하층민이건 중한 죄를 범하면 똑같이 사형처벌을 받듯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일방적인 선물로 받았다는 점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가질 때, 무엇을 믿을 때 이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됩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절은 죄의 직접적이고도 최종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도저히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참아보실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추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볼 때 집 안에 바퀴벌레가 들어오면 밟아서 죽인다음 그 자리를 물티슈 등으로 깨끗이 소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퀴벌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기저기에 약을 뿌립니다. 이와같이 죄는 그 죄를 범한 자를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극도로 혐오스럽고 추한 존재로 만듭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하나님과 영원한 분리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그 비밀은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입니다. 속량이란 단어는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말인데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몸값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로는 redeem, redemption입니다. 그러면 죄를 범한 죄를 죄인들을 위해 왜 속량이 필요했을까요? 당시 노예들의 경우 결코 자기가 자기를 속량할 수 없었습니다. 한 노예의 몸값은 그가 죽을 때까지 노동할 수 있는 노동력 전부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노예가 만약 자기가 일해서 그 노동력의 대가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면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일하다가 늙고 지쳐서 눈을 감는 순간 - 그 순간이 그에게는 노예의 삶에서 해방이었습니다. 이런 그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는 그의 몸값을 반드시 다른 사람이 대신 지불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속량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요즘 법정에서 선언하는 죄의 대가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그가 범한 죄에 비해 너무 가벼운 것 아닌가, 어떻게 그런 판결이 나올 수 있는가 말합니다. 그가 행한 그 흉악한 범죄 행위, 한 사람의 인격을 완전히 말살한 행위를 생각할 때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도 결코 중한 처벌이 아니라고 분개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범한 죄의 무게를 공정하게 판정하실 때 오직 영원한 죽음만이 그가 범한 죄에 합당한 판결이라고 여기십니다. 지옥에서의 영원한 죽음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각 사람은 자기가 범한 죄에 합당한 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한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도록 그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 내어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살이 찢기고 손과 발목에 굵은 대못이 박히고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피묻은 음성으로 절규하실 때 그를 외면하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그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리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하나님께서 대신 지불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묻은 절규와 고통과 생명을 지불하고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볼 때 그것은 값없이,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전적인 호의로 속량받은 노예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제가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로 그가 베푸신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속량을 받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의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시대 때 대속죄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 시대 때 지성소 안에 법궤를 덮는 덮개가 있었습니다. 이 덮개 위에 천사 둘이 서로 마주보며 날개로 덮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언약궤 위의 이 덮개와 천사는 하나님의 보좌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유대 종교력으로 7월 10일, 곧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지성소, 곧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이 성소에 들어와 희생제물의 피를 이 덮개 위와 앞에 뿌렸습니다. 그러면 지난 1년간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모든 죄가 다 용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덮개를 속죄소(atonement cover), 혹은 하나님이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좌(施恩座, mercy seat)라고 불렀습니다.


본문에서 화목제물로 번역된 단어가 원문상 ‘힐라스테리온’으로 바로 이 속죄소, 시은좌를 가리킵니다. 많은 경우 본문에서 화목제물이라는 단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화목제물은 그 피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그의 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보좌인 시은좌, 또 속죄소 위에 뿌려진 피였습니다. 구약 시대 때 짐승의 피가 땅에 있는 시은좌 위에 뿌려졌을 때 효력이 있어 1년간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는 힘이 있었다면 영원하고 참된 거룩한 하늘 보좌 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뿌려졌을 때 그 피가 가진 속죄의 능력은 어떠할까요? 그러므로 히브리서 9:13-1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피의 능력으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속죄제물(expiation), 또한 화목제물(a sacrifice of atonement)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들은 힐라스테리온(속죄소)을 속죄제물(RSV), 혹은 화목제물(NIV)로 의역하여 번역합니다. 속죄제물이란 그 피의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화목제물이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화목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할라스테리온이 다른 헬라문헌에서는 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유화제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유화제물(宥和, propitiation)이라고 번역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KJV, NASB)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뭔가 무기력하고 늘 죄의식에 시달리고 힘이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피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그 피는 어떠한 죄라도 능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죄로 더러워진 검은 천과 같은 내 마음을 붉은 피로 씻어 흰눈보다 더 깨끗한 천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피의 능력을 믿을 때, 그 속죄의 능력을 믿을 때 담대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천군천사와 함께 계시는 그 하늘 보좌 위에 기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피의 능력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은 첫째로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 때 하나님은 죄 문제가 있으면 그 때마다 짐승의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때 죄사함은 엄밀한 의미에서 간과(leave sins unpunished)였습니다. 그렇다고 구약 시대 때의 죄용서는 온전한 용서가 아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구약 시대의 죄용서는 장차 예수께서 참된 속죄제사를 드리실 것을 담보로 하신 것이고 참된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 현재 내 통장에는 잔고가 없는데 언젠가 입금이 될 것을 담보로 미리 돈을 끌어다 쓰는 것과 흡사합니다. 만약 때가 되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참되고 영원한 속죄제사를 지낼 것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속성으로 인해 결코 죄를 용서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참되고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실 것이 담보됨으로 하나님은 구약 시대 때 많은 죄들을 그때그때 처벌하지 않으시고 간과하셨습니다. 또 죄를 범한 그 사람 편에서 볼 때는 온전한 용서를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만약 하나님이 의롭지 않게 된다면 우주 전체가 무너질 것입니다. 한 나라도 만약 통치자가 의롭지 않다면 무법천지가 될 것입니다. 중남미에 있는 나라들은 마약 조직 등으로 인해 법 질서가 거의 붕괴 상태라고 합니다. 마약 조직이 대명천지에 자기들에게 적대적인 시장을 납치하거나 총격을 가해 살해합니다. 이런 나라들은 조만간 무너질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의롭지 않으시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법은 그 명분과 정통성을 잃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는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의로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담보로 범죄한 자들의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의롭다” 하는 표현은 원문상 ‘다카이오오’이고 영어로는 ‘justify’입니다. 이것은 본래 법정 용어입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의롭다’라고 선포하고 망치로 세 번 쾅쾅쾅 치는 것입니다. 이른바 칭의(稱義, to delcare righteous)입니다.


이 칭의는 로마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이 이 칭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모든 성경이 이 칭의가 가진 의미를 자세히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칭의가 가진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보증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행한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 중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선포는 심판대 앞에서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심판대 앞에서 ‘내가 전에 너를 의롭다고 선포하였고 그 선포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둘째, 칭의는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역경과 어려움을 다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이 땅에서 여러가지 삶의 고난과 역경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를 아무리 여러 번 읽어보아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여러 고난과 아픔, 환난을 겪기도 합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 칭의는 그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렇다면 이런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지 않겠습니까! 칭의는 그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실로 로마서 5장과 6장 8장의 놀라운 전개내용은 전부 이 칭의로부터 시작합니다.


셋째, 칭의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죄는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심어주셨던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영광을 가졌던 사람들이 과거의 영광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듯 사람들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거나 함으로 다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더 비참해질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칭의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때마다 죄에 넘어지고 병들고 늙어가는 이 몸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그 날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칭의는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근간이요, 기초가 됩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행위나 자기 인간 조건을 의지합니다. 자기 행위나 조건을 의지할 때 늘 불의감에 시달리고 자기 정죄감에 고통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신앙 생활을 오래하면 사람이 병든 닭처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의의 선포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마치 사자새끼와 같습니다. 사자 새끼도 어렸을 때에는 귀엽고 별로 강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집이 커지고 갈기가 나며 그 위엄과 용맹함이 뭇 사람을 압도하게 됩니다. 칭의의 진리를 붙드는 사람이 바로 이와같이 됩니다.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본래 한없이 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정죄감과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그 결과 내면이 병든 닭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본문 말씀을 통해 놀라운 칭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사 그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어주신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 이 하나님의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면 세상이 뭐라고 하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신다면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 다른 것이 필요없다. 나는 그것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기록한 저술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한다고 불평하고 원통해 하는 사람은 이로써 그들이 선행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만족에서 나왔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난을 당할 때 원통해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평판을 위해, 혹은 은밀한 자기애와 교만으로부터 스스로를 위해 행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행이 핍박을 받는다면 기뻐함과 동시에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확신하자.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일들은 무엇이든 세상에 의해 못 박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조차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는 우리에게 본을 남기셨다.” 칭의를 확신한 그의 글은 참으로 그가 용맹스러운 사자와 같은 내면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그 모진 반대와 위협과 박해를 극복하고 종교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해가 갈수록 갈기가 나고 근육이 솟고 사자처럼 용맹스러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칭의의 진리를 믿은 우리 신앙선배들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안타깝게도 날이 갈수록 병든 닭처럼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칭의의 진리를 붙들지 못하고 나의 행위와 나의 인간조건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새롭게 마르틴 루터처럼 이 놀라운 칭의의 진리를 굳게 붙들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7-31절은 칭의의 결과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으며 하나님은 할례자의 하나님이 되실 뿐 아니라 무할례자의 하나님도 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의 법이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움을 말씀합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강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전혀 새로운 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붉은 피를 하나님의 보좌 위와 앞에서 뿌리심으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늘 언제든지 믿음을 보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 칭의의 진리를 붙드는 가운데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