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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에베소서 4강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3:14-4:16)2019-02-0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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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에베소서 4강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말씀 / 에베소서 3:14-4:16
요절 /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어떤 청년이 완전한 교회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없다네, 그리고 그런 교회를 찾는 다면 절대 그곳에 가지 말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물었습니다. “왜 입니까?” 라고 하니 “불완전한 그대가 그 교회에 다님으로 그 완전한 교회가 깨어질까 두렵네”라고 답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불만으로 가나안 성도, 안나가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나가도 되고 싫으면 안 나가도 되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왜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됨을 지켜나가야 하는 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은 강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 기도와는 좀 거리가 멀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의 서신서 곳곳에 기도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는 사실상 기도의 종이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빈다는 표현은 얼마나 경건한 기도의 종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그가 기도할 때 붙든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이십니다. 이 말속에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 나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양한 족속, 다양한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의 첫째 기도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그는 에베소 성도들이 속사람이 강건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속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될 때 갖게 되는 새 자아를 뜻합니다. 이 거듭난 자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고 그것을 행하고자 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속사람이 강해지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겉사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사람은 거듭나기 전 자아를 뜻합니다. 이 겉사람은 우리가 육체의 욕망과 소원에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성도이지만 겉사람이 강한 사람은 결국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될 욕망과 소원을 따라 삽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강해지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혼자만의 기도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기도지원을 받고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지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겉사람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17a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예수님은 그를 믿는 제자들과 세상끝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하셨는데 물리적으로는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마음에 계시고 성도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입니까? 예배후에 고향가는 분들 있는데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든든하고 즐겁습니까? 그런데 그 여부가 성도의 주님께 대한 믿음의 여부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마음의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셋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사랑에 있어 성장하기를 기도했습니다. 17b-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뿌리가 박힌다’는 표현은 사랑을 나무로, ‘터가 굳어져서’ 라는 것은 사랑을 건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사랑의 거목이 되고, 사랑의 초고층건물을 세우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제자들이 능력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 제자를 많이 키우는 사람이 되기보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다른 분야는 훌륭한 데 사랑측면에는 어린 싹이나 묘목수준일 수 있습니다. 초가삼간이나 황량한 터만 있는 격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차원 높게, 그리고 폭넓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이 성도 안에 충만히 채워집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면 빈약하고 허무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신앙생활의 방향을 어떤 직분을 얻거나 어떤 일을 성취하는 데 두면 그 신앙생활은 한계에 직면합니다. 그 자리나 직분을 얻으면 신앙생활이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게 됩니다. 또한 그런 자리나 직분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오르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한계에 이르고 기쁨이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 됩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자신의 소망을 직위나 직업 형태로 가져 왔습니다. 의사, 판사, 검사, 공무원, 교사, 소방관, 간호사..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소망은 사랑하는 것, 사랑을 배우는 것,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위치나 타이틀이 인생의 방향이 되면 그는 행복한 삶을 살기 힘듭니다. 허무와 천박함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는 것에 인생의 방향, 신앙의 방향을 두면 무한히 성장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에 신앙과 삶의 목표를 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며 기도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붙드는 말씀입니다. 보통 성도들이 좋은 학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구할 때 이 말씀을 붙듭니다. 내가 생각하는 학점보다 더 좋은 학점을, 내가 구한 직장보다 더 좋은 직장을, 내가 구한 배우자보다 더 나은 배우자를 주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적용시켜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한계를 정해놓고 합니다. “이 사람은 내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어” “이 사람하고는 내가 공존이 불가능해” 심지어 “저 사람이 나가든지, 내가 나가든지 해야 해”라고 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사랑을 부어주실 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기이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부어지면 내 생각과 판단을 넘어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하기 힘든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섣불리 하나님의 응답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내 생각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놀라운 기도응답이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어질 때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 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무엇을 권면합니까? 에베소 교인들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히브리서 3:1절을 보면 그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하늘나라 시민들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지탄을 받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이들처럼 비난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지도자들끼리, 성도들끼리 주먹다짐을 합니다. 고성을 지르거나 멱살을 잡고 끌어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처음 교회에 온 사람들이나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 실망합니다. 우리모임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고 고개 숙이고 인사안하기, 안볼 때 째려보기 정도를 합니다. 

성도들이 하늘나라 시민들처럼 품격 있는 공동체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첫째,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겸손을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땅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섬겨주심으로 그때부터 겸손은 최고의 미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후 겸손은 굴욕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높고 위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 싸움의 원인은 교만한 사람 곧 나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탁월한 정치가였던 크롬웰은 지도자가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바른 정치를 한다고 했습니다. 가끔 자동차 뒤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나도 내가 무서워요” 그 말처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나입니다. 소 두 마리를 키우면 안 싸운다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당신이 옳소” “내가 졌소”입니다.  사람들은 섣불리 내가 졌다고 말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되면 내 의견보다 좋지 않은 그의 의견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어 나나 공동체가 잘못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맞고 상대방이 틀린다고 해도 상대방도 신앙양심이 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아주 틀리면 주님이 핸들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진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 겸손히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섬김으로 원만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온유입니다. 온유란 강한 자가 자신의 힘과 권위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절제하고 부드럽게 상대를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온유한 분이라고 소개했고 바울도 자신이 유모처럼 유순하다고 말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결국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지는 것 같으나 사실은 천천히 이기는 것이요 최후의 승자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강하시지만 이런 온유함을 수천 년 동안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원어로 ‘먼 분노’란 뜻입니다. 분노에서 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분노하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을 듣자마자 급격하게 판단하고 감정의 노예가 되어 급격하게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화를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하면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화가 날 때 10 까지 세라는 말이 있는데, 한 10시간쯤 후에 화를 내보는 것입니다. 즉 서울에서 무슨 말을 듣고 비행기를 타고 가며 생각한 다음에 유럽공항에서 그 말에 대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래참고 사랑으로 용납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다운 품격을 유지할 수 있고 관계나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바울이 우리가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하나 됨은 무엇을 말합니까? 88 올림픽 때, 모든 소매치기들이 하나 되어 국가지대사때는 소매치기하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애국심으로 하나된 케이스입니다. 여기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 한 몸을 이룬 것을 말합니다. 보통 힘써 지키는 것은 소중한 가치들입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이란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길 래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4-6절을 보면 ‘하나 됨’에 대한 언급이 7번이나 나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를 나누는 것은 한 몸을 찢는 살인 행위와 같습니다. 한 성령님이 교회에 운행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령님을 대적한 큰 죄입니다. 성령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죄악입니다.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자녀들이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됨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됨은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 되도록 하기위해 예수님이 그 핏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됨이 이처럼 중요한데, 수많은 교회공동체는 분열되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계속 남아있는 겉사람 때문입니다. 자존심, 자기중심적 생각, 혈기, 미움 등이 이것을 막습니다. 또 소중하기에 하나됨을 파괴하고자 하는 사탄의 역사도 간교하고 집요합니다. 사탄은 조금만 틈만 보여도 그 사이를 틈타 관계를 이간질시키고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서 미움의 종이 되게 하고 교회에 열정을 빼앗아 갑니다. 그렇게 해서 이미 수많은 교회가 사탄의 간교한 시험에 넘어갔습니다.


자연스럽게 있으면 이렇게 사탄의 밥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고자 애써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교회가 문제가 있고 지도자가 문제가 있고 성도중에 같이 하기 힘든 사람이 있는 데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문제가 있고 완전하지 않기에 하나됨이 의미가 있고 그것이 아름다우며 믿음을 배우게 되는 감사제목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문제가 있을수록 더욱 하나되기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분열과 관련하여 여러 직분의 존재가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직분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서 생긴 현상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으니. 마귀권세를 정복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며 성도들에게는 전리품들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이 곧 구원의 은혜와 직분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에 하늘에서 무덤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값없이 받게 된 선물이 직분이기에 우리가 직분을 자기자랑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교회에는 여러직분이 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복음의 원형을 전달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기초입니다. 현재 사도와 선지자는 없고 사도적 가르침이 존재합니다. 이 사도적 가르침을 수호하여 이것이 교회의 기초가 되게 해야 하는 데 이 일을 주로 하는 분들이 교회 지도자 곧 감독과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입니다. 그 외 직분으로 복음전도자, 목사와 교사가 있는데 목사란 원어로 보면 목자입니다. 로이드존스는 목자직은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교사는 진리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한다고 말했습니다. UBF에는 스탭목자, 시니어목자, 팀목자, 요회목자, 1:1 목자, JBF교사, EBF교사, BBF교사, 각 부서팀장 등의 직분이 있습니다. 각 팀에는 팀장이 있고 부원이 있습니다. 주일날 서빙하는 직분, 예배실을 청소하는 직분도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서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강하게 한다는 뜻이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또 다른 사역자들이 되기까지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직분의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자기 광내고 자기만족을 얻도록 함이 아닙니다. 그러니 직분을 가지고 우열을 비교하며 열정을 내고 무기력하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어떤 작은 직분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라고 했습니다.(롬 10:19) 한 목자님은 요회목자도 아니고 보고모임도 없지만 아무도 모르게 매일 퇴근후에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그는 복음전도자의 직분, 발의 직분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보통 자신이 피싱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자신이 피싱하지 않는 양들에 대해서도 열과 성을 다해 말씀을 준비해 가르칩니다. 이분은 교사의 직분을 하나님앞에서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교회내에서 권세를 잡으려 하는 이 때문에 교회가 분열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세우려는 사람은 큰 직분, 드러나는 직분, 하고 싶은 일만 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는 사람은 어떤 직분을 맡아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이 시간을 빌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고 충성하신 분들께 감사하고 박수를 드립니다. 우리가 은사와 직분의 목적을 분명히 알므로 주어진 직분을 열정과 충성심으로 감당하며 무슨 일이든지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지체 중에서 영적 어린아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란 기본적인 영적 교훈과 진리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진리에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게 되어야만 성장이 가능합니다. 참된 사랑이란 진리를 확고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랄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첫째로, 머리되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체는 신경조직으로 머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성도들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성장합니다. 때마다 예수님에게서 사랑과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개인신앙이 있다고 합니다. 일만 하면 힘들어지고 개인신앙이 견고하고 주님과의 늘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교회에서 직분을 맡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체가 가만이 있으면 그 지체는 약해지고 퇴화됩니다.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부족해도 자기 역할을 할 때 그 지체가 건강하고 성장합니다. 직분이 나를 지켜줍니다. 또 우리가 힘들어도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해야 주님의 몸된 교회가 전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분열하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에도 소극적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지체들 간의 불만과 불완전한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울 좋은 꼬투리요 이유가 됩니다. 또 우리가 무슨 직분이든지 주님이 주신 직분에 충성하여 주님이 피로 사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 나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