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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민수기 2강 `레위인을 택하신 하나님 ⁠`(민수기 3:11,12 )2021-09-27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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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민수기 2강


레위인을 택하신 하나님


말씀/ 민수기 3-4장
요절/ 민수기 3:11,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오늘 말씀은 레위인을 택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레위인을 택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장자는 나답이요 다음은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니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로 모세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우시고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론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의 이름은 나답, 차자의 이름은 아비후, 그 아래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론의 장자 나답과 차자 아비후가 제사장 직무를 행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레위기 10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을 가져다 분향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는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준엄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상세히 기록된 레위기 10장에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에 비해 본문에서는 제사장의 직무가 중대하며 이러한 제사장을 돕는 이들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5-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레위 지파를 따로 떼어 그들이 제사장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3:39절을 보면 당시 레위인의 총 수는 22,000명이었습니다. 민수기 2장에서 계수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인의 수는 총 60만 3,550명이었습니다. 여기에 레위인의 수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레위인 22,000명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도와 그들이 제사장 직무를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된 자들입니다. 이중 실제 회막 일에 봉사하는 사람은 30세부터 50세까지 8,580명입니다. 22,000에서 8,580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30세가 되기를 기다리며 여러 면에서 자기를 준비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입니다. 또 50세가 넘어 현직에서 은퇴한 이들입니다. 아마 대다수는 30세가 되기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청소년들일 것입니다.


현재 20세 이상 된 군인의 수는 60만 3,550명입니다. 이들은 전쟁시 군인이 됩니다. 또 지금은 광야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국가의 기초를 놓는 산업역군이 됩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인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22,000명의 레위인이 전쟁시 힘을 보탠다면 너무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또 전쟁이 아닌 평화시라도 레위인 22,000명이 국가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제사장을 도와 성막을 옮기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굳이 레위인을 따로 뽑아놓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전쟁시에는 모든 청년을 다 군인으로 돌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레위 지파 22,000명을 따로 세우시고 그들은 그들의 인생 전체를 온전히(9) 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도와 성막 섬기는 일에 헌신하도록 하셨습니다. 태어나서 만 30세가 되기까지는 직접 일을 하지 않지만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면서 몸과 마음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만 50세가 되어 은퇴한 후에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해주고 기도하면서 죽을 때까지 주의 성막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사드리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의 핵심은 제사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첫 제사는 아담과 하와의 자녀인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는 제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장벽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사법 체계에서도 중한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짓지 않은 사람 사이에 장벽이 생깁니다. 곧 죄를 범한 사람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보고 싶어도 그가 범한 죄로 인해 아내와 그의 사이에 장벽이 생기고 아내와 함게 생활할 수 없습니다. 제한적인 면회는 가능하지만 면회 중에도 둘 사이에 장벽이 있습니다. 잠간의 면회 시간이 지나면 그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제사장은 바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 인간의 죄를 대속해줄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바르고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바칠 때 사람의 죄가 용서됩니다. 하나님과 그의 사이에 있던 장벽이 무너지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러한 제사장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누가 이런 직무를 감당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 대신 자기 자신을 흠없는 속죄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붉은 피로 인해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장벽이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2,000년 전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는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31-3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2,000년 전 딱 한 번 제사를 드리고 자기 직무를 끝내신 분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중요한 직무는 물론 제사를 드리는 것이지만 빼뜨릴 수 없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직무는 백성들의 죄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의 죄문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이 제사장 직무를 예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이신 이 예수님을 도와, 온전히 자기 삶을 드려 섬길 레위인을 따로 뽑아 예비하셨습니다. 구약 시대 때 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돕도록 레위인을 따로 떼어놓으신 하나님은 신약 시대 대제사장 예수님을 도와 섬길 레위인들을 따로 뽑아놓으셨습니다. 그 레위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제사장 예수님을 도와 함께 이 세상 사람들의 죄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섬길 영적 레위인들입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가 다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으라’는 불신자의 눈으로 볼 때 이렇게 좋은 황금 주말의 피크 타임에 아침부터 모여 예배드리는 이 시간은 정말 시간 낭비처럼 보입니다. 이 시간에 밀린 잠을 푹 자거나 아니면 주중에 일 때문에 해보지 못했던 취미 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삶이 더 윤택해지겠습니까!


또 크리스챤들이 주일날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중에도 틈만 나면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드립니다. 마치 연인 두 사람이 서로의 관계를 위해 틈만 나면 문자보내고 카톡 보내고 전화하고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통화하고 주말에는 하루 종일 만나 함께 하는 것처럼 크리스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시간을 물쓰듯 쓰는 사람입니다. 뭔가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성경을 보고 기도합니다. 또 다른 사람의 죄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 중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갈 때, 또 하나님 앞에서 중한 죄를 짓고 살아갈 때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물쓰듯 씁니다.

이런 크리스챤의 삶은 현대 실용주의 관점에 볼 때 정말 낭비 같습니다. 그 시간에 주식투자를 해서 재테크를 하고 그 재테크한 돈으로 비싼 물건을 구입하면 그 물건을 만든 회사의 경영실적이 좋아지고 회사의 경영실적이 좋아지면 더 많은 청년들을 고용할 수 있고 더 많은 청년들이 고용되어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결혼도 더 빨리 할 수 있게 되고 자녀도 더 많이 낳을 수 있게 되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크리스챤들 중 과학적 재능이 있는 이들이 그 시간에 과학 연구에 미친듯 몰두한다면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같은 엄청난 인물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크리스챤들 중 문화 예술에 재능이 있는 이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로 고민하는 시간에 문화 예술 활동에 전심전력한다면 그들 중 제 2의 피카소가 나올런지 누가 알겠습니까! 피카소같은 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국격을 얼마나 높이겠습니까! 그런데 매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사람들의 죄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나 하고 앉아 있으니 속이 터질 노릇입니다.

저의 부모님도, 또 저를 아는 많은 친척 분들도 제가 언어를 잘 하는 능력과 은사를 살려서 그 길로 나갔더라면 뭔가 일가를 이루었을텐데 하면서 안타까워합니다. 제가 지난 저의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몇몇 사람들의 신앙 문제를 안고 함께 고민하다가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빌리 그래험처럼 세상이 떠들석할만큼 무슨 큰 일을 하거나 업적을 남긴 것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다가 보낸 청춘이었고 젊음이었고 세월이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김창완의 청춘이라는 노래 가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나를 두고 간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정둘곳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동산 찾는가


노래 가사처럼 청춘의 세월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흘러갔습니다. 이 세월의 시간을 세상에서 유익이 되는 돈과 명예와 성공을 위해 사용했더라면 뭔가를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고 고민하고 몇몇 청년들의 삶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보낸 세월은 마치 레위인처럼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었고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실용적이지 못한 삶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소중한 세월이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번영하는 그 삶의 영광 뒤에는 레위인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한 개인을 복주시고 번영하게 하실 때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드리고 삶을 드리는 헌신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황금 같은 주말 피크 시간에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주님께 나와 예배드리고, 우리 사회를 위해, 더 나아가 세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 크리스챤들이 영적 레위인으로서 주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또 우리가 주중의 귀한 시간에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말씀으로 자신의 내면을 채우는 것 역시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이 역시 영적 레위인으로서 주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이 헌신으로 인해 우리가 일정부분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재테크에 마음과 시간을 드리지 못하고, 남들이 다 즐기는 여가 시간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희생이 있기에, 이 헌신이 있기에 누군가 복을 받게 됩니다. 생명이 살아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기까지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낳을 때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일정부분 희생합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support하기 위해 눈간에 주름이 지고 때로 허리가 휘기까지 열심히 일을 하며 자기 인생을 희생하여 드립니다. 이러한 희생과 헌신을 통해 자녀가 태어나고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한 생명이 훌륭하게 자라기까지 반드시 보이지 않는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레위인으로서 자기를 희생하여 드리는 이 헌신을 통해 한 생명이 복을 받게 됩니다. 은혜를 받고 자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레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헌신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와 예배하고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더 나아가 온 세계를 위해 기도하며 주를 섬기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레위인은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마지막 10번째 재앙의 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바로의 죄로 인해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설주에 발린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을 사자가 지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장자들은 그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가진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제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장자, 더 나아가 심지어 짐승의 첫 새끼까지도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장자들이 주를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는 대신, 레위인들이 그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3:46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 장자의 수가 전체 레위인보다 273명이 많았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한 사람 당 5세겔씩 돈으로 대신하여 속전을 내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도 오차가 없이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는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삶의 진정한 소유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내 인생의 소유권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소유권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모든 굴레와 억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청년들, 특히 그 부모님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일수록 어려서부터 부모의 요구와 간섭으로부터 억압당했다고 느끼고 그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부모님의 가치관과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는지, 내가 어렸을 때에는 힘이 없고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해 부모님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굴복했지만 이제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된 나는 이런 부모님의 강요와 억압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부모님은 부모님의 인생을 사세요. 저는 이제 제 인생을 살게요.’ 이런 생각입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이 사회가 불공정하며 사람들을 잔인하게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드라마에서 게임에 지면 바로 목숨을 잃습니다. 이 게임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목숨을 걸고 게임에 참여합니다. 이 설정을 통해 작가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가 이토록 잔인한 게임보다 사실은 더 잔인하고 참혹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전 세계의 청년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되었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이러한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해지기 원하며 진정한 나의 삶을 찾기 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공정의 굴레, 황금 만능주의의 굴레로 고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죄의 굴레로 인한 고통이 가장 큽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채찍질 아래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것처럼 죄의 세력은 우리를 노예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바로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때로는 인구 수를 조절한다면서 남자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버리라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또 피라미드를 비롯한 대규모 공사를 강행하면서 히브리인들을 공사장에 동원했습니다. 이 공사에 수많은 히브리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억압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로의 군대가 그들을 지켜주는 점도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집트의 청년들은 군인으로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지만 노예 백성이었던 그들은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가끔 명절이 되면 주인이 던져주는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청년들은 죄의 굴레로 인해 고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가 주는 순간의 달콤한 쾌락에 중독되어 마치 마약 중독자들처럼 쇠하여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죄의 굴레에 매여 고통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가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게 되었습니다.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삶의 소유권이 죄의 통치권을 잡고 있던 마귀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경제학에서 유명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 개인이 최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가성비가 가장 좋은 쇼핑을 할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여러 경제 이론이 바로 이 가정을 전제로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생각할 때 이 짧은 인생의 시간 동안 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만족, 최고의 기쁨, 최고의 유익을 추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함정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내가 기준이 되어 최고의 것을 추구하려 하다보면 항상 불만족이 있습니다. 잘 나가는 것 같은 다른 청년과 비교가 되고 내가 가진 것보다 남이 가진 것에 더 눈이 돌아갑니다. 내게 있는 것보다 내게 없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워하게 됩니다. 또  하루하루를 살면서 자기가 하는 일에 기쁨과 보람과 만족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 돈을 벌어 저축을 해도 이 저축한 돈으로 언제 집을 사고 차를 살까 생각할 때 마음이 늘 급하고 하루하루 삶에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근본적인 불안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은 삶의 안정감을 빼앗고 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내 인생의 진정한 소유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루하루 오늘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삶에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또 내 삶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불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다가 하나님이 영원한 집으로 오라고 부르시면 그때 가면 됩니다. 마음에 나의 문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와 아픔을 돌아볼 여유가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크리스챤은 그 삶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이 곧 크리스챤입니다. 하나님께 내 삶의 소유권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나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고 나를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만족해하는 삶에서 있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묻습니다. 당신의 삶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 앞에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