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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성탄 1강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마태복음1:1~25)2021-12-06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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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성탄 1강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말씀 마1:1~25

요절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은 신약에서 첫 번째 복음서로 등장합니다. 기록된 순서대로 하면 마가복음이 4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배치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책이 아니라 연결된 책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성취되다’, ‘이루어지다’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약속된 말씀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서 그의 복음서를 열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먼저 선포하고 난 다음,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요셉에 이르기까지 14대씩 3대로 나누어 기록함으로써 메시야가 오시기까지의 구속 역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1차적으로 혈연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나아가 이방 세계에까지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결정적 열쇠요 주인공이라고 선포합니다.


저는 이 시간 첫째, 하나님께서 구속역사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 둘째,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임마누엘의 은혜와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파트, 족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


1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계보는 원어로 비블로스 게네시오스입니다. 계보에 관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기원에 대한 내용을 핵심적으로 집약하여 표현해 놓은 것이 1절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BC 약 2,100 년경 갈대아 우르 지방에 살았던 사람으로 히브리 민족의 조상입니다. 갈대아 우르 지방은 우상 숭배가 번창하였는데 아브라함도 우상 숭배자로 살다가 인생을 마칠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를 택하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그 후 여러 번에 걸쳐 그에게 그의 후손 가운데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2:18을 보겠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갈3:16에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그 '씨'로 오신 분이라고 밝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사랑과 정의로 다스린 가장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구체화하사 다윗의 후손 가운데 그와 같은 영적인 왕을 메시아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사무엘하 7:12,13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이 약속의 말씀은 앞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마태는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약속의 성취자요 다윗에게 약속했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왕으로 오신이가 예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 2장에 동방박사들은 이방인들인데 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십니까 물었습니다. 마27장에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자 예수께서 네 말이 옳도다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에 대한 별칭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그리스도 구원자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왕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2절부터 16절까지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여느 족보와는 다르게 기록되었습니다. 이 족보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다루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족보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족보에는 낳고 낳고라는 표현이 계속 등장합니다. 이 족보는 창5장의 계보와 대조를 이룹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아담의 자손을 기록한 족보입니다. 이 족보에는 낳고 죽었더라 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 마지막이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족보에는 계속 낳고 낳고가 반복되고 죽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죄의 씨로 태어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죽는 것으로 마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이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롬5:21절 같이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함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위의 족보에서 보듯이 인간은 죄와 허물이 많습니다. 특히 유다와 다말의 동침으로 낳은 아들들, 다윗왕의 간음죄,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 중 세명이 행실이 바람직하지 않은 창녀 출신이거나 간음의 죄를 저지른 여인들입니다. 라합과 룻은 이방 여인입니다.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 네 대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의 역사를 보면 다윗왕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가 끊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약속이 폐하여 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죄악됨과 실패를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사 그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족보를 자랑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별로 자랑 할 것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유대인들만의 구주가 되기를 희망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족보에 이방 여인들을 집어 넣으사 그리스도가 유대인들만의 구주가 아니요 온 인류의 구주가 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원어로 보면 낳다라는 표현이 수동태입니다. 그러나 16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는 능동태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은 스스로 오신 분 다시 말해, 육적인 혈통을 통해 나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창 3:15절에 약속한 여자의 후손으로 나십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죄로 인해 뒤틀어진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족보속에 넣어서 유대인들과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약속의 후손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어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파트, 임마누엘의 은혜


18-2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약속되었던 그 계시가 이제 역사속에서 실현됨을 보여줍니다. 18-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제 그 분이 우리 곁에 어떻게 오셨는지 살펴볼까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했습니다. 당시 유대 풍습에 의하면 이 약혼부터가 결혼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략 1년 정도 친정에 거하며 약혼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 이후에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려가 아내를 취하고 부부생활을 하였습니다. 19절에 남편이라 칭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인 요셉을 가까이 하지 않은 이 시기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것은 독자들을 위한 표현입니다. 정작 남편인 요셉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요셉은 자신과 동침한 일이 없는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요셉이 당황했을까요? 19절에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결혼 전의 부정에 대한 구약의 처벌은 사형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돌로 쳐죽이도록 하는 대신 이혼증서를 써주어 마리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결정을 내리고자 하였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드러내거나 비판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행하는 것, 이것이 성경에서의 통상적 의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조용히 파혼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본문 표현으로는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입니다. 요셉이 이를 생각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 곧 천사가 개입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천사는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혼인 관계의 최종 절차로 여자를 집으로 데려오면 혼인 관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거기에 더해 이름과 탄생의 의미까지 알려줍나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히브리말로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아 예수는 다 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수아와 호세아 예수아는 히브리식 표현이고 예수는 헬라식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도움이시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에 해설을 붙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다. 성경에서 구원의 핵심은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우리 죄를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요 실제며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본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고 죄의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성경은 명쾌하게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입니다. 롬3장 26절은 말합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을 함께 의로운 자들로 인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우리를 그의 몸의 지체로 묶으셨습니다. 저자 마태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마28: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임마누엘의 은혜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하스 왕은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신앙있는 척을 했으나 실은 눈에 보이는 애굽왕을 의지했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참으시고 임마누엘의 약속을 징조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당시의 정황을 연극으로 잠깐 보겠습니다. (3분 41초 분량)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아하스 왕을 꾸짖으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징조로 이사야 7:14절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당시의 예언은 젊은 여자가 낳은 아이가 철들기 전에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망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 8:10절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 이는 이방을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유다를 위기에 몰아넣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위협 속에서 남유다가 그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쳐들어오기전에 하나님이 막아주셨어야지 하나님은 왜 보호자가 되신다면서 어려운 일들과 고통을 사전에 막아주시지 않는가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게 내버려두시는 게 무슨 하나님의 은혜요 보호하심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것에 1차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바른 시야가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문제 등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시기까지는 죄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고 계십니다. 바로 그 죄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정화시켜 그의 거룩함에 이르게 하기 위해 성령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그 분의 의지와 열심과 능력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를 감사 찬양합니다.


마태복음 저자 마태 역시 임마누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돈을 좇아 세리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와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그를 보시고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의 내면의 외로움을 씻어주셨습니다. 이기적이고 좁은 내면에 풍성한 사랑이 넘치도록 변화 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배고픔도 견뎌야 했고 세리 시절보다 더한 모욕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내면에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었기에 기쁨으로 이를 감당했습니다. 죄 아래 있을 때 맛보지 못한 희락과 평안과 안식을 누렸습니다.


저는 직장생활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자였습니다. 6개월마다 자주 이직을 하고 나이 40이 넘어 결국은 실직을 하고 생계를 위해 노가도 하고 새벽에는 동역자와 같이 신문배달도 하였습니다. 3자녀와 동역자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절망스러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신문배달 후에 동역자와 합심기도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였습니다. 이때 시골에 계시던 누님들은 고생하는 저를 보고 직장도 구해주고 아파트도 사주고 종교의 자유도 줄테니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당장 내려오기 힘들면 저 혼자서라도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누님들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믿음의 길을 계속해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한 번은 제가 다니던 직장이 어려워져 울산에 1년 정도 파견 근무를 갔습니다. 그런데 월급도 안나오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절망스러웠습니다. 저는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숙소 근처 교회 새벽기도를 나가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복음성가를 통해서 만나주셨습니다.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흘리신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은 인생 낙오자와 같은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려주셨고 이런 저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혼자서 울산에 떨어져 있지만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와 항상 함께하고 계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후 저는 힘들지만 기쁨과 감사함으로 끝까지 직장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도 직장을 통해서 훈련하고 계십니다.

제가 모시는 회장님은 애민하고 까탈스롭고 철두철미하신 분입니다. 반면에 저는 자기중심적이고 무디고 대충대충 일을 하는 성격입니다. 그러다보니 사소한 것에서도 회장님의 지적을 받고 때마다 반성문을 쓰고 스스로 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런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것에 심히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기사들은 이런 회장님을 견디지 못하고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대부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안에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소원을 주셨습니다. 히12:2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말씀처럼 저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회장님의 방향에 순종하고자 씨름하게 하셨습니다. 하루 하루 견디다 보니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훈련이 통과할 때까지 잘 견디고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저는 참으로 연약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부족한 자입니다.

동역자가 2019년에 갑자기 암에 걸렸습니다. 저는 동역자가 죽을까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은 저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동역자가 자신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자고 요청을 하였지만 저는 같이 기도를 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산책겸 운동을 같이 가자고 사정을 해도 같이 가주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연약함과 저의 자기중심적인 내면은 지독히 매정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함께 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목자님들의 기도지원과 물질적인 후원을 받으며 감당할 힘을 주시고 동역자의 건강도 많이 좋아지게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투병하는 기간 동안 자립적으로 성장하며 믿음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연단들을 통해서 내면을 훈련하셨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저와 함께하신 임마누엘의 은혜를 감사 찬양합니다.


우리는 모두 임마누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