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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봄 학기 준비 특강 요나서 제2강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요나3,4장)2021-02-22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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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나서 2강 메시지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부제 : 요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말씀 : 요나서 3-4

요절 : 요나서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는 짧지만 재밌고 참 풍부하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같습니다. 두고두고 묵상할 거리들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이시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요나와 같은 우리의 좁고 자기중심적인 내면을 돌아보고 태평양같으신 하나님의 넓은 마음과 사랑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그 내용은 첫 번째 주셨던 명령과 같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이스라엘에서 700km 떨어진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3일 동안 걸어야 될 만큼 큰 성읍이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니느웨는 둘레가 96km 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서울보다 살짝 큰 도시였습니다.

 

요나가 어떻게 사명을 감당했습니까? 요나는 그 성읍에 들어가 하루동안 다니며 심판을 예고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요나가 하나님께 훈련을 받고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사역에 어떤 문제점이 보입니까? 그는 사흘길되는 지역을 하루만 다니므로 축소사역을 했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1/3만 드린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어땠습니까? 메시지가 너무 짧습니다. 외국어였기 때문일까요? 그의 메시지는 수상한 메시지입니다. 왜 니느웨가 40일이 지나면 무너지는 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핵심사항인 니느웨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니느웨 백성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까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메시지를 외쳐 전한 것은 심정때문이 아니라 목소리 높혀 신나게 심판을 선언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상을 볼 때 요나는 하나님께 아직도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은 정말 C급 선지자요 C급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역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A급 폭풍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를 보면 사역자와 그 사역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천재들처럼 요나의 암구호같은 짧은 메시지를 다 알아 듣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요나가 지나간 곳마다 회개의 물결이 니느웨 시가를 휩쓸었습니다. 이런 소식이 니느웨 왕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앗슈르단 3세라고 추정되는 왕도 보좌에서 내려오더니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위에 앉았습니다. 굵은 베옷은 극한 슬픔을, 재는 파괴와 멸망을 상징합니다. 왕은 솔선수범 회개에 앞장 섰고 더 나아가 대신들을 통해 조서를 내려 전 시민이 회개운동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그 조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7-9절입니다. 조서는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금식, 금수하며 다 굵은 베옷을 입고 애통하며 부르짖으며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도록 촉구했으며 특히 강포의 죄를 확실히 떠나도록 당부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심판을 철회하셔서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권면했습니다. 왕과 대신들은 어떻게든지 니느웨가 망하지 않도록 심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짐승이나 가축들까지 회개운동에 동참시킨 것은 니느웨 백성들이 멸망당할 때 그들에게 속한 짐승들도 공동운명이기 때문이요, 짐승들도 회개할 점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의 회개는 간절했고, 처절했고 철저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그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철저히 회개한 니느웨 백성들과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준비된 심령이 회개 역사의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요나가 훌륭하거나 그의 메시지가 훌륭해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심령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여러 가지 하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역사적인 증거에 의하면 요나가 BC 760년 니느웨에 도착하기 3년 전에 온 나라가 깜깜해지는 일식이 있었고 요나가 찾아온 그 때를 전후로 17년간 전염병팬더믹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니느웨 백성들은 자신들이 이웃나라들에게 강포를 행하고 심히 잔인하게 하였기에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을 깨닫고 마음으로 뉘우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딱 요나가 등장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보다 못한 사역자가 와서 메시지를 전했더라도 다 회개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할 때 사역자가 훌륭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구원역사의 관건은 내가 얼마나 훌륭하느냐보다 하나님이 구원얻을 사람들의 심령을 얼마나 예비하셨느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자격여부에 너무 매이지 않고 부담과 염려를 내려놓고 단순히 구원사역에 우리를 순종함으로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구원 대상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정말로 강포하고 잔인한 자들이었습니다. 모두의 공분을 산 천인공노할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회개하였고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1997년 한국사회를 충격과 경악가운데 빠뜨린 지존파라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25세가 두목이었고 대부분은 20대 초반의 철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고 부자들을 증오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을 하나씩 죽이고자 방향을 잡고 인육을 먹으며 결기를 다지고 5명을 죽인 후에 체포되었습니다. 그중에 부두목이었던 김현양이란 자는 체포당할 때 조금도 반성하는 기운도 없으며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한다고 말하며 특히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를 욕하며 잔혹하게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일말의 동정심도 갖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만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담임목사님 마저 말렸습니다. 그러나 이재명 집사는 그들이 죄와 사탄에 씌워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 것으로 알고 불쌍히 여기고 돕고자 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교도소를 방문하여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중 회개한 한 사람은 하얀 편지지만 바라봐도 송구스런 죄인임을 깨닫는 다고 말할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부두목 김현양은 이재명집사에게 이제 생각해보니 자신의 눈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으며 참으로 자신이 어리석었고 죽어도 다 죄값을 치룰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하며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를 찬양하며 죽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지존파들의 회개와 구원을 통해 구원의 대상에 제한이 없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어떤 죄인도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그들이 회개할 때 새 사람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니느웨 백성들의 놀라운 회개의 모습을 통해 어떤 사람도 소망을 가지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니느웨에 내리기로 예정된 진노가 내리지 않자 요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을 받지 않게 되자 하나님의 처사에 불만을 터트리며 화를 냈습니다. 그는 내 이럴 줄 알았다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품과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통해 사역하게 하시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면 용서할 작정을 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얼마나 화가 나고 실망했는 지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요나가 죽겠다고 한 것은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겠다고 말한 것과 유사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과 전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그렇게 되었는데 전부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 뜻대로 다 되었으면 쾌재를 부르고 생의 의욕이 불탔을 것인데, 그러지 않자 풀이 죽어 로뎀나무 아래 누워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엘리야 선지자보다 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 뜻대로 안되자 성을 내며 하나님께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기쁘지, 하나님의 뜻대로 되면 싫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 데 풀이 죽고 의욕이 없어진 분들은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뜻대로, 사도들의 뜻대로도 되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수년내에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수 십년이 걸렸습니다. 바울사도는 아마도 자기가 죽기 전에 주님이 오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이곳저곳에 다니며 복음전파의 깃대를 꽂고 로마 감옥에서 1차 출옥되었을 때는, 땅끝인 스페인까지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울이 죽기 전에 재림하신 것이 아니었고 그로부터 2,000년이 흘렀어도 오시지 않고 계십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종들의 뜻대로 다 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다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누군가의 바램대로 망해 있을 것입니다. 혹 내 뜻대로 되었다면 나는 심히 교만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지만,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다 되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뜻대로 다 되지 않는 다고 성내거나 풀이 죽어 있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며 내 뜻대로 안된 것에 어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 지 잘 찾고 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나의 못되 먹은 심보가 어떠합니까? 그는 니느웨 성읍이 내려다 보이는 동쪽 언덕에 초막을 짓고 앉아서 뭔가를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실까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의 대적이며 라이벌인 니느웨가 잘되는 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지 니느웨가 잘못되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런 요나를 돕기위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박넝쿨, 동풍, 벌레의 교보재를 동원하셨습니다. 요나는 태양볕이 내리쬐는 곳에서 니느웨를 뚫어지라 지켜보고 있는 데 태양볕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의 머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박넝쿨을 예비하사 그늘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이 박넝쿨을 심히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하나님은 벌레를 예비하사 그 박넝쿨을 다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박넝쿨이 사라지자 태양이 요나의 머리에 직접 내리 쬐는데, 때마침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사 요나에게 보내시니 요나는 기절하여 쓰러질 정도가 되었고 정말 그 박넝쿨의 존재가 더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박넝쿨이 없어진 것으로 인해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벌레를 미워했고 다음으로는 이 모든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것을 꼬투리로 요나를 카운슬링하셨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 밤에 났다가 하룻 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11) 하나님은 요나의 박넝쿨 사랑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박넝쿨의 탄생과 재배에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룻동안의 정든 사이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그 박넝쿨은 영혼을 가진 존재도 아니고 그저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 정도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이 박넝쿨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이에 비해 니느웨 백성은 하나님께 박넝쿨보다 얼마나 더 소중합니까? 그들은 들풀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영장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강포하고 잔인한 자들이지만 회개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니느웨에는 전체 인구는 60만명 정도 살고 있었고 그중에 청소년이 12만명, 무고한 가축들도 몇십만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다 이번 심판에서 죽는다면 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까? 요나는 하나님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편협하고 자기 것만 사랑하는 이요 하나님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대상에 대해 너무나 무정하고 무심하고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청소년으로만 본다면 세월호 300개가 그냥 침몰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이요, 수십만 마리의 동물들이 잔인하게 도살되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상에서 요나의 마음은 이해는 되지만 자기민족중심이었고 율법적이었고 무정하고 무자비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율법적인 삶을 사는 이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자칭 의인들만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인간같지 않은 자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50보 도망친 죄인들의 하나님뿐 아니라 100보 도망친 죄인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같은 이들의 하나님뿐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고 유산을 요구하여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탕진해 버린 둘째 아들같은 이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뿐 아니라 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 19:24,25절에서 앗수르도 자신의 백성이고, 애굽도 자신의 백성이고, 이스라엘도 자신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영혼과 생명을 아끼시는 분입니다.

 

요나서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태평양처럼 넓고 깊습니다. 반면 요나의 마음, 우리들의 마음은 간장종지나 실개천처럼 좁습니다. 우리가 크신 하나님의 마음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11:6,7절을 보면 서로 으르렁대고 잡아먹어야 하는 동물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평화와 공존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다양한 죄인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천국은 모든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의인된 심정, 좁은 자기중심성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깊이 영접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이 서로 얼마나 공존하기 힘든 지 1인 가구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함께 하기 싫어서 비혼주의자들이 많이 생겼고 이혼, 황혼이혼, 졸혼 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함께 하자니 괴롭고 혼자 살자니 외롭다고 합니다.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좁은 마음, 판단하는 마음, 의인된 심정, 이기적 사랑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도 그러하였습니다. 율법주의적 크리스천들과 은혜중심적인 크리스천들이 하나되지 못하고 판단했습니다. 서로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성장중심적인 크리스천들과 성숙중심적인 크리스천들이 서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명중심적인 크리스천들과 자기행복중심적인 크리스천들이 서로 미성숙하고 서로 균형잡힌 신앙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서로 끼리끼리 편당을 만듭니다.

 

그러나 함께공존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도 복음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자기 의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죄인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다름아닌 이 시대의 요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을 찢어 넓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존중하고 내 눈에는 어떻게 보여도 하나님이 아끼고 쓰시는 소중한 사람임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추가적으로 요나의 박넝쿨 사랑에 대해 언급해야 할 부분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대상만 사랑하는 이기적 사랑입니다. 요나가 박넝쿨을 사랑한 것은 자기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니느웨 백성은 자신과 민족에게 해만 될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도움이 될 때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세리의 사랑으로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에 속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우리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이기심이요 확장된 자기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심지어 심지어 해가 되는 자들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박넝쿨 사랑의 편협함을 깨우쳐 주시고 사랑의 폭을 넓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요나서의 끝은 하나님의 질문과 요나의 무응답으로 끝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반응할 때, 죽어도 자기 옳다는 반응과 침묵반응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나 성격에 침묵은 그래도 좋은 반응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침묵은 요나가 끝까지 하나님의 카운슬링을 거부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질문이 그의 좁은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영원한 울림으로 남았다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요나서를 요나가 썼다면 요나는 솔직하게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이는 요나가 편협한 자신을 도우시고 자기발견하게 하시고 인내로 섬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에 감격하면서 요나서를 쓴 것을 뜻합니다. 특히 요나는 마지막 하나님의 질문앞에서 평생 좁고 편협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보고자 했던 초막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금방 변화되지는 않지만 요나와 같이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질문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가운데 조금씩 자기발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들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도 담을 수 없는 간장종지같은 내면이 아니라 누구라도 담을 수 있는 태평양같은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니느웨 백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고 어떤 사람도 품고 축복할 수 있는 내면, 누구랑도 함께 할 수 있는 진정한 천국백성의 내면과 사랑을 가진 자들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