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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22강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26)2021-08-16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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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2강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 요한복음 17:1-26
요절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고별강화를 마치신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의 소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소원을 배우고 그 소원대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예수님 처럼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렇게 저렇게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신 후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하나님께 맡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도할 때 눈을 감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잘되는 사람은 걸으면서 기도할 수 있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기도가 잘되는 사람은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말을 하는 것보다 글로 써서 기도를 하는 것이 명확하고 기록에 남길 수 있어 좋으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다만, 어떤 모양으로든지 기도생활이 끊어지지 않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기독교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참고 고난을 받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렇게 무조건 고난을 받으며 선하게 사는 삶은 도덕윤리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할 때 상 주실 것을 믿고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히 11:6). 이것이 신앙과 윤리의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주실 영광을 바라보며 감당하셨습니다. 고난은 그냥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바라보며 감당할 때 힘이 납니다. 그것은 마치 올림픽 선수들이 금메달을 바라보며 훈련의 고난을 감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고 현재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고난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영화롭게 되는 것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향을 가질 때 우리의 모든 기도가 응답받을 근거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시고 100% 응답하십니다. 죠지뮬러는 거의 대부분의 기도가 응답받으신 분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기도제목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위해 잡은 기도제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이 말씀의 시제는 과거인데 예언적 과거라고 합니다. 확실하게 이루어질 미래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장차 주실 영화를 이미 받은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사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십니다. 만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공로에 근거해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어떤 대선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본소득보다 우리 인생들에게 반가운 소식은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원어로 ‘조에’로서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을 뜻합니다. 영생은 시간적 의미와 함께 삶의 질이 다루어져야 정확한 개념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히 지루한 삶을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생이란 한순간을 살아도 영원한 생명력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정말 사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런 영생은 어떻게 얻습니까?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인생이 우연히 생겨 우연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깊은 허무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단절되어 꽃병의 꽃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 인생들을 위해 하나님은 구주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죄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구주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영생을 누립니다. 영생은 사후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그 순간부터 누립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께 돌아갈 때가 가까우십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결산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룬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번은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로 더불어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인생목적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목적이 자기만족입니다. 눅 12장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만족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많은 물질을 쌓아두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상상하며 흐뭇해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나”라는 단어가 5번 나옵니다. 그는 정말 나뿐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뿐인 인생은 나쁜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생명을 취하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자기에 대해 부요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거지같은 자가 다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얼마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는 가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온갖 영화를 누렸고, 세상법정의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하나님의 법정에 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은 그런 학살자에게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 없이 만족스러워하며, 삶의 달려갈 길을 마친 자신 앞에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딤후 4:7,8).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 땅에서 오셔서 제자를 양성하시고 복음을 완성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골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예수님이 완성하신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끝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제자를 양성하도록, 양을 먹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이 때니이까 하며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고 나아가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 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평가할 때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 명예, 권세, 안락한 삶으로 지나온 삶을 평가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했는가 그렇지 않는 가로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일을 지키고 헌금을 내는 것으로 자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한없이 초라해지십니다. 그러나 이시간 예수님은 창세전에 누리셨던 그 영화로써 자신이 다시 영화롭게 될 것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고자 하십니다(5).

이상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드린 기도입니다. 우리도 남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는 편인데, 진지하게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자신이 제대로 사는 지를 되돌아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제자들입니다.

6-10절은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인 지를 가르쳐줍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세상 중에서 예수님에게 주신 선물 같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름은 존재를 대변하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들을 받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8).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10).


9a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 예수님은 세상 전체보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세상의 소망이며 주역들입니다. 세상은 제자들이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때문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세상전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세상에 더 있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에 남습니다. 그러니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됩니다. 그만큼 세상이 악하고 강하고 유혹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보전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보전’이란 원어로 ‘테레오’로 충성, 믿음, 순결의 가치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세상과 구별되어 본래의 믿음, 영적 순결, 충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믿음의 보전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마귀는 불신자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며 제자는 영향력 없는 제자가 되게 합니다. 맛잃은 소금처럼 되게 합니다. 이솝우화를 보면 늑대에게 속아 삼킨바 된 양새끼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귀에게 삼킨바 되는 제자는 살아있긴 살아있지만 살아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존재감도 없고 힘도 쓰지 못합니다. 이렇게 제자가 영향력을 갖지 못하면 예수님이 그들을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 생명력과 믿음을 보전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통해 세상이 영향을 받고 세상이 변화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영적 생명력과 믿음이 보전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또 제자들이 삼위일체의 하나 됨같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위격을 가지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하나이십니다. 독립적이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제자공동체에서 각각의 제자들은 독립적이고 인격적인 삶을 살지만 그 신앙의 본질은 하나로 유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제자공동체에서 각 사람의 신앙이 변질되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 되는 것은 제자공동체가 분열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부부가 각각 화성과 금성에서 온 것처럼 자라온 배경이 다르고 은혜 받은 포인트가 다르고 신앙의 강조점이 다릅니다. 다양성은 나쁜 것도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자녀가 조금씩 다르게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몸의 지체가 각기 자기 역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자기 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다양성은 갈라져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함께 해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공동체가 신앙의 본질을 보전하고 하나 되어 주님을 섬기기를 바라십니다. 이렇게 하나 될 때 제자공동체는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제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켰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하나님의 힘을 빌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때마다 제자들의 내면을 살피며 적절한 말씀과 기도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들어와 “누가 크냐” 다툴 때는 그들을 불러다가 세상과 다른 하나님나라에서 큰 자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은 제자들의 신앙과 내면을 보전했습니다. 가룟유다문제는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쁨을 그들안에 충만히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13). 어떤 제자들은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 즐거움을 누려야 기쁨이 있는 삶을 사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며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살 때 진정한 기쁨을 충만히 누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결과 제자들의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세상가치관대로 살지 않자 세상이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이를 볼 때 누군가가 영적 가치관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판단이나 미움을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제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이 달라 세상 살기가 힘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을 악에서 건져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속해있으면서 세상과 다른 삶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도전하고 세상에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세상과 다르게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은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거룩’이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이 진리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그때그때 대세에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가 있으면 사람이 대세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삽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들은 죽은 물고기처럼 물결에 따라 흘러가듯 살지 않고, 때로는 흐름을 거슬러 반대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말씀공급자인 목자가 먼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가 공급하는 진리의 말씀이 힘이 있습니다. 도미노 현상과 같습니다. 첫 번째 도미노가 쓰러지면 모든 도미노가 쓰러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맡은 이들은 깨어서 자신을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며 지식뿐 아니라 자신의 삶이 거룩한 삶이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20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제자들은 말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위기의 순간에 모두들 도망치고 제자됨을 부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통해 복음역사가 이어져갈 것을 내다보십니다. 이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영적 재생산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망스럽게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이 사람을 만듭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실제로 제자들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제목은 무엇이었습니까? 20-23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는 말이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의미는 그들도 예수님을 믿어 교회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삶은 초라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들의 삶은 영광스럽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하나되기 원하십니다. 이 기도제목은 요한복음 10:16절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자족하면 안 됩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교제에만 머무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 전도를 열심히 안하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남전도회에서 하는 일이 회비를 거두어서 개를 사서 키우는 일이었고 보고사항이 개의 상태였고 협의사항은 그 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 가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여 새롭게 교회공동체에 하나 되는 사람이 있도록 하는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서로 교제하며 친목을 다지는 것만 하곤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항상 새로운 영혼들을 어떻게 섬길지 연구하고 그것을 위해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세들도 몸만 교회에 있지 않고 신앙적으로 하나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하나 되는 것은 의미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변질되지 않도록 함입니다.

끝으로, 하나 되는 것의 의미는 제자들이 다양성가운데도 하나 됨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천상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24). 계시록적으로 보면 그들이 세상에서 영적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되어 천상교회에서 흰 돌과 면류관을 받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지난 기독교 2000년은 예수님의 기도가 기초가 되어 연약한 제자들이 세상을 이기고 영적 재생산을 이루고 세상에 영향을 끼친 역사입니다. 우리도 세상과 하나 되지 않고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자들이 되며, 예수님을 본받아 중보기도의 수고와 헌신을 잘 감당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