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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민수기 4강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민수기 7:1-8:26)2021-10-11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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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민수기 제 4 강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 / 민수기 7:1-8:26
요절 / 민수기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수기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10장 광야 진군 준비, 11-25장 광야 실패와 소망, 26-36장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1-10장을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도표참조). 1-6장 ‘인구조사와 정결의식’, 7-9장 ‘백성과 레위인의 봉헌과 유월절, 성막위의 구름’, 10장은 드디어 행군을 시작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7,8장입니다. 도표를 보면, 1-6장 내용보다 한달 전에 있었던 일인데 6장 뒤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오경(토라)의 특징 중 하나가 더 중요한 것을 뒤쪽에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계보를 기술할 때 불신자의 계보인 가인의 계보를 먼저 기술하고, 중요한 믿음의 계보인 셋의 계보는 그 뒤에 기술합니다. 노아의 계보도 세 자녀중 가장 중요한 샘의 계보가 맨 나중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광야 진군 준비’에서 인구조사, 군대 편성, 정결의식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생 광야를 걷는 우리에게 있어서 준비되어야 하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은 성막을 완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거주할 집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세는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였습니다. ‘기름을 발랐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였다는 뜻입니다.

‘Only of God, by God, for God’‘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어디에 임재해 계셨습니까? 시내산에 계셨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기 위해 시내산에 강림하셨습니다. 그 산은 불붙는 산이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접근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거할 집이 이스라엘의 진영 한가운데 만들어졌습니다. 하늘에서 시내산으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진영 한복판으로, 점점 더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친밀히 다가오심은 이스라엘에게 크나큰 복입니다. 자비요 은혜입니다. 반면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진영 한복판에 마련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민족의 자긍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감사가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니~ 그것도 진영 중앙에 모시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개무량하였겠습니까? 성막 봉헌이 있던 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우두머리가 나아와 하나님께 헌물을 드렸습니다. 드려진 헌물은 수레 6대와 소 12마리입니다. 이것을 레위인들에게 분배하였습니다. 게르손 자손들에게 수레 2대와 소 4마리를 주었고, 므라리 자손들에게 게르손 자손보다 2배인 수레 4대와 소 8마리를 주었습니다. 반면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직임대로 주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천과 같이 덜 무거운 것을 운반하는 게르손 자손보다 기둥과 같이 무거운 것을 운반하는 므라리 자손에게 수레와 소를 두 배로 주었습니다. 고핫 자손은 성소의 직임이 어깨로 메는 일이었기에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 사람이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에 따라 각 자의 직분에 합당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각각 은사와 능력이 다르고 심지어 경제적 능력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는 것은 각자에게 맡기신 사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많은 재산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게 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국가에서 재난지원금을 하위 85%를 대상으로 지급하였습니다. 지원대상에서 빠져 볼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뉴스를 많이 접하였는데, 어떤 목자님은 재난 지원금을 받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상위 15%에 해당되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이 목자님의 감사 충만이 느껴졌습니다. 재난 지원금을 받으셨나요? 우리는 받아도 감사, 안 받아도 감사합니다. 특히 우리가 영적인 일을 할 때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벧전5:2).

10절을 보십시오. 12지파의 지휘관들이 이번에는 제단 봉헌물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헌물을 어떻게 드리라고 하십니까? 1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한 날에 한꺼번에 드리지 말고 하루에 한 사람씩 드리라고 하십니다. 매일 한 지파씩 12일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유다지파부터 12지파가 12일동안 예물을 드립니다. 첫째날은 동쪽에 있는 유다지파, 둘째 날은 동쪽에 있는 잇사갈 지파, 셋째 날은 동쪽에 있는 스블론 지파, 그리고 남쪽, 서쪽, 북쪽, 시계 방향으로 각 지파가 순서대로 12일동안 봉헌물을 드렸습니다. 앞서서 나온 행군 순서와도 일치합니다. 첫째 날 드린 유다지파의 헌물을 보겠습니다. 13-17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헌물은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그것에는 향을 채웠고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의 헌물이었더라” 여기에 나오는 내용을 제사 종류로 나누어 열거해 보면 1)소제물- 은쟁반 하나, 은바리(접시) 하나에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가득 채움, 금그릇 하나에 향을 채움 2)번제물- 수송아지 1마리, 숫양 1마리, 일 년 된 어린 숫양 1마리 3)속죄제물- 숫염소 1마리, 4)화목제물- 수소 2마리, 숫양 5마리, 숫염소 5마리, 1년된 어린 숫양 5마리를 드렸습니다. 제물중에 화목제물이 가장 많습니다. 그 이유는 번제단 봉헌식이 죄사함을 받기 위한 제사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친교와 화목을 위한 감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화목제사가 메인 제사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일단 속죄함을 받아야 하기에 먼저 속죄제를 드리고 그 뒤에 번제, 소제, 화목제를 드립니다.

각 지파가 드린 헌물과 제사 내용을 보면 어떻습니까? 마치 프린트하듯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같습니다. 수가 많은 지파도 있고 적은 지파도 있을 것이며, 부자 지파도 있고 가난한 지파도 있었을 터인데, 동일한 예물을 드립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각 지파사이에 서로 많이 냈다고 자랑하지 않고, 적게 냈다고 위축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막을 세우고 받드는 일에 있어서는 열 두 지파가 동일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쓸데없이 성막(교회)을 가지고 경쟁하고 질투하고 힘겨루기 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헌물을 12지파가 한날 한시에 한꺼번에 드리면 하나님도 편하실텐데 각 지파별로 12일동안 각각 드리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예물과 제물을 독립적으로 하나 하나 받으시고 일일이 복주시고 기억하기 원하십니다. 각각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일일이 교제를 나누며 일일이 소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드린 헌신도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받으십니다. 각 사람과 인격적으로 만나시고 각자를 축복해 주십니다.


84-88절은 이들이 바친 제단 봉헌물의 총계가 나옵니다. 소제물(고운가루와 향)을 담은 쟁반 12개, 은 바리(접시) 12개, 금 그릇 12개를 드렸습니다.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12마리, 숫양 12마리, 일년된 어린 숫양 12마리, 속죄제물로는 숫염소 12마리, 화목제물로 황소 12마리, 숫양 60마리, 숫염소 60마리, 일년된 숫양 60마리를 드렸습니다. 정말 어마 어마 합니다. 시내광야에 있음에도 그들은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풍성히 예물을 드렸습니다. 올 한해 코로나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할 곳을 주셨습니다.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데 쓰임받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죄인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함께 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이 곧 다가옵니다. 올 한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풍성히 예물을 봉헌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이 봉헌물을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일동안 이렇게 봉헌식을 마치고 모세가 회막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백성들이 하나님이 명한대로 다 행했습니다.” 보고하고자 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89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고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출애굽기 40장에 보면 성막을 봉헌하였을 때(출40:2-17)와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했을 때(출40:34-35)에도 모세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용기를 내어 성막에 들어가 하나님께 아뢰고자 할 때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시내산으로 강림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성막(회막)에 임하셨습니다. 모세는 얼마나 감격스러워했을까요? 하나님은 증거궤 위 속죄소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위치한 성막에 하나님이 좌정하셨습니다. 진영 중앙은 고대에 왕이 있던 자리입니다. 왕이 좌정하여 싸움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군 최고통수권자로써 좌정하십니다. 말씀으로 그의 백성들을 이끄십니다.

성막 봉헌과 온 지파들이 참여한 12일간의 봉헌식은 모세가 성막에 들어가 언약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음으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이스라엘 진군준비는 이제 말씀의 임재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세상 광야에는 수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특히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때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하늘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으로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감당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감당할 때 많은 고난과 환란이 있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도울 보혜사 성령을 보낼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할 때 초대 신약 교회가 태동하였고 주의 말씀이 세력을 얻어 흥왕하여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광야와 같은 세상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는 구약 성도가 경험한 그 것과 다르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나아가는 곳은 보이는 시내산이나 보이는 성막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에 있는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모인 곳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며,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용서의 보증입니다.(히12:22-24)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는 모세 시대 때 눈으로 보여진 그 하나님의 임재보다 훨씬 더 초월적인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그림자와 모형을 경험하였지만 우리는 실체에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음으로 보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모세 때보다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12:25)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할 때 그 용모가 변화되고 광채가 났는데 바로 그때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들이 보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와 성막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훗날 엘리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그 산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서가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덮었던 그 영광의 구름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덮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구름속에서 들려 왔습니다. 그 말씀은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눅9:35) 였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 선지자들,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곧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화목하길 원하십니다. 소통하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제단에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에스더는 왕후였지만 왕 앞에 아무 때나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자녀는 아무 때나 왕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속죄소 위에 뿌려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아무 때나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이요 은혜입니까? 신약성도들은 성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나 그 존전 앞에 나아가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28:20).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내 양을 먹이라”,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 “서로 사랑하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광야 인생길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가 잘 듣고 붙들고 순종하면 형통케 됩니다. 이번에 사라베리 선교사님의 자서전이 출간됩니다. 그녀의 자서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선교 요절로 영접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저는 이 말씀에 기초해서 온 마음을 다해 언어를 공부하고, 한국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씨앗을 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미시시피 대농장주의 딸로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요12:24 말씀을 붙들고 한국선교사로 와서 한국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제자양성을 위해 온 인생을 한 알의 썩는 밀알로 헌신하셨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본을 우리에게 보이셨고 제자양성의 열매를 풍성히 맺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어떤 말씀을 붙들고 현재 광야 길을 가고 계십니까?

8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봉헌된 성막에서 아론에게 등불을 점화하도록 하였습니다. 성막에 창문이 없습니다. 얼마나 캄캄했겠습니까? 등불을 켜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은 세상을 말합니다. 캄캄함을 물러가게 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빛만 있으면 됩니다. 일곱 등잔대의 빛은 완전한 빛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이십니다.(요1:9) 이 빛이 우리 심령에 들어오면 어두움이 물러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빛을 세상가운데 들고 나아가면 어두운 세상이 밝아집니다.

5-22절은 레위인의 위임에 따른 정결 예식입니다.
레위인의 임직식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속죄의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합니다. 2) 온 몸의 털을 밀고 옷을 빨아 입어야 합니다. 3) 번제제물로 수송아지 1마리, 소제 제물로 기름섞은 고운 밀가루, 속죄제 제물로 수송아지 1마리를 가져옵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레위인들의 머리위에 손을 언어 안수하게 합니다. 5) 대제사장 아론은 레위인들을 흔들어 바치는 요제 제물로 바칩니다.


요제는 제사장이 희생제물의 가슴부분을 양손위에 올려놓고 번제단 앞에서 앞 뒤 수평으로 흔들어 바치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졌다가 다시 돌려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제로 드려진 제물은 제사장 몫이 됩니다. 여기서 레위인을 요제로 드렸다는 것은 제사장이 레위인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은 레위인을 다시 제사장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레위인들이 제사장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23-26절은 레위인의 정년에 관한 규례입니다. 25세부터 50세까지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성막 일은 의외로 고된 일이었습니다. 이동시에 성막을 해체하고 운반하고 설치해야 했고, 제사 시에 불을 피워야 하고, 장작을 옮기고, 물을 채우고, 도축하고, 제사의식이 끝나면 짐승의 똥, 오줌등 배설물을 치우고 청소하고 비품을 관리해야 하는 등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었습니다. 또 성막에 백성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불침번을 서고 지켜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방식대로 섬겨야 했으므로 아주 신경이 많이 쓰이고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가 없도록 50세까지 나이 제한을 두었습니다.


목자 직분을 가진 우리는 신약의 레위인입니다.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요제로 바치셨습니다. 구약의 레위인처럼 고된 육체 노동은 아니지만 쉽지 않은 직무를 맡아 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돕습니다. 함께 죄와 씨름해 주기도 합니다. 새벽기도, 저녁기도 인도하기 위해 퇴근후에 피곤하지만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여 준비합니다. 어떤 분은 주일에 일찍 오셔서 청소하고 환경정리하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해 중보기도의 씨름을 합니다. 질병과 고난 속에 있는 분들을 돌아봅니다. 때론 우리 마음속에 ‘목자’라는 타이틀을 내려 놓고 편히 살고 싶을 때도 있는데 왜 이 일을 계속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로의 멍에에서 구해 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멍에 아래로 인도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명령하시면서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것이 진짜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손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유익이며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요즈음 유력 대선후보들의 참모로 섬기고자 줄을 대는 정치인이나 교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돕는 것이겠죠.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장차 선악간에 심판하실 영원한 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가장 가치있고 보람되며 기쁨이 있고 열매가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나아가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군대를 조직하고 제사 의식를 준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진군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면 우리도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각 자의 소명을 잘 감당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