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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17강 `한 알의 밀⁠`(요한복음 12:20-50 )2021-07-0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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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요한복음 17강

한 알의 밀


말씀/ 요한복음 12:20-50
요절/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 말씀은 참 유명한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의 진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심겨져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많은 생명의 열매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오늘 말씀의 배경은 유대인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명절이 되면 생계를 위한 일을 한동안 중단하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렸을 때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 시청 앞과 광화문 광장에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이처럼 유월절이 되면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유월절이 되어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에 70년간 포로로 잡혀간 때였습니다. 시편 42편은 그때의 그 슬픔과 아픔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유월절 명절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이 명절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그 크신 힘과 권능과 능력으로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된 삶에서 자유민이 되게 하신 것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헬라인 몇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왔습니다. 헬라인은 유대인 편에서 보면 외국인입니다. 외국인이 유월절 예배에 참여하기 원할 경우 이방인의 뜰이라고 지정된 제한된 장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외국의 10대 청소년들이 BTS 공연을 보러 비행기를 타고 한국까지 왔는데 가지고 있는 티켓에 제한이 있어 현장 공연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신 따로 마련한 홀에서 비데오로 공연을 봐야 하는 상황과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헬라인들은 유월절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생계를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기 원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민족이 위대한 인물을 배출해냈을 때 막상 늘 함께 있던 동포들을 그가 그렇게까지 위대한 분인지 잘 몰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뭔가 대단한 것 같기는 한데 같은 한국말 쓰고 같은 김치찌개 먹고 하니까 그렇게까지 위대한가 잘 몰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정한 위대함을 다른 민족이 먼저 알아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본문에서 헬라인들은 유월절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생계를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이들이었습니다. 머나 먼 외국에 사는 한 청년이 비행기를 타고 BTS 공연을 보기 위해 한국으로 날아왔다면 이는 그가 BTS 음악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의 헬라인들도 유월절 예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울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과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들었을 때 이 예수님이 뭔가 정말로 위대한 분이며, 그들이 예배하기 위해 찾아온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이에 제자들 중 자기들과 같은 헬라식 이름을 가진 빌립에게 예수님을 좀 만나뵙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립은 이 문제를 최근에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안드레에게 의논하고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수치가 아니라 영광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이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 됩니까? 궁금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요한복음 후반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죽음이 가져올 열매에 대해 말씀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창고에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5년, 10년이 지나도 한 알 그대로 있고 수백년 수천년이 지나도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지면 흙속에서 싹을 내고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본래 있던 밀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으므로 죽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싹이 성장하여 약 4개월 뒤 100개의 밀알이 됩니다. 이 밀알을 다시 땅에 뿌리고 거두는 과정을 5년 동안 되풀이하면 100억 개의 밀알이 됩니다. 이것은 17,000 가마니로 100명이 6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과 같이 이 땅에 떨어지셨습니다. 33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이제 때가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죽음과 함께 예수님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알의 밀에서 싹이 나고 뿌리가 나고 마침내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 열매는 다름 아닌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을 제외한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은 오직 유대인들만 누리던 특권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노예 백성으로 영원히 살 운명이었습니다. 숫자가 너무 많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남자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라는 잔악한 왕의 명령에도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구원자 모세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10가지 크고 강한 재앙으로 이집트 왕을 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이집트 왕의 장자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를 죽음으로 멸하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재앙 가운데 자기 백성을 어린 양의 피로 구별하고 보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이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한편 유대인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은 목자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은 본래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양을 치는 생활을 하면서 자기는 양과 같고 하나님은 목자와 같음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주옥같은 시편 23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또한 유대인 선지자 호세아가 체험한 하나님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과 같은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 바람난 부인을 다시 데려오라고 말씀합니다. 그녀가 비록 바람이 나서 남편을 버렸지만 그녀를 용서하고 다시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쓰라린 경험을 한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내가 신앙적으로 바람난 이스라엘을 바로 이처럼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수원에서 사역하는 김승원 목자님은 목자 생활을 하면서 이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던 중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불타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특히 모세가 광야에서 불로 활활 타오르는 떨기 나무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노예 생활로 고통하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체험한 승원 목자님은 그 이후 삶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너무 연약하여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캠퍼스 영혼들을 이 불타오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고 섬기고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연약했던 영혼들이 강건해지고 승원 목자님의 좋은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삶 가운데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 내 영혼이 목이 마르고 피곤하여 지쳐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주님께서 저를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셨습니다. 말씀의 풍성한 꼴로 먹여주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수의 기쁨과 만족을 주셨습니다. 지금 현재도 제가 맡은 사역지인 종로 7부 가운데 여러 어려움과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나바울 목자님은 코로나로 인해 두 달 가까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투병하고 계십니다. 섬망 증상으로 인해 의식도 혼미합니다. 그러나 종로7부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이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하고 주님께 영광돌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격적으로 배우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은 온 세상 만민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이요 그가 받은 형벌은 세상 만민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였습니다. 이 부활을 통해 그를 믿는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과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한 알의 밀이 되셨기에 그 열매로 우리가 유대인들만 누리던 특권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의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혹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제 심판은 받지 않겠지, 죽어서 천국만 가면 되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맺어주신 열매를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본문을 대할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이 되어 어딘가 떨어져 그곳에서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죽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식으로 많이 적용합니다. 그 적용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적용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 적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열매를 잘 누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때문에 만나게 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그를 예배하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만이 그도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윗도 양치는 생활을 하면서 그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목자와 같은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광야나무 떨기에서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생명을 내어던지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는 타고난 본성상 이기적입니다. 큰 애가 사탕을 두개 쥐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빼앗아 동생에게 주면 사탕을 빼앗긴 큰 애는 헐크처럼 변합니다. 이런 어린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한 가난한 어머니에게 딸과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비록 가난하지만 자녀들을 위해 늘 생선을 반찬으로 준비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생선의 몸통을 먹을 수 있도록 늘 생선의 머리를 드셨습니다. 그러면서 ‘왜 엄마는 맨날 생선의 머리만 먹어?’ 하는 자녀들의 질문에 ‘응 엄마는 생선 머리 부분을 제일 좋아해.’ 라고 답했습니다. 딸이 성장하여 주부가 되었습니다. 딸은 생선의 머리부분만 전부 모아 냉장고에 따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친정 엄마를 불러 ‘엄마,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 머리야. 내가 모아놓았으니까 다 가져다가 드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속없는 딸은 엄마가 정말로 생선 머리를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엄마도 생선 머리보다 생선 속살을 훨씬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이것을 깨달은 딸은 어머니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헌신적인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딸은 점차 어린 아이의 본성을 벗어버리고 그녀 또한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고 꼭 필요할 때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건강한 부모가 됩니다.

우리도 본성상 어린아이와 같이 이기적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자기를 놓고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삶의 모든 것이 자기의 유익과 만족과 기쁨과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는 정말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 그 넓은 사랑,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내어주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접할 때 우리는 조금씩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내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앞절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반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소중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드릴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숙한 어른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이런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참으로 고통스럽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것을 위한 것임을 동시에 고백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예수님이 이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응답이 들려왔습니다.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방금 천둥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말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1-33절을 보십시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진 중요한 의미는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권세자는 이 세상의 임금 곧 사탄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인해 사탄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끌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무리들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고 하였는데 왜 인자는 들려야 한다고 하는지, 왜 그리스도가 죽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영원히 계시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들려 죽고 이후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계십니다. 이런 무리에게 예수님은 아직 빛이 있을 동안 곧 예수님이 그들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38-41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상에서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나오는 헬라인들과 달리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고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인데 그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저자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해석을 할 필요를 느낍니다. 저자 요한은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내용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주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들릴 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그가 영광의 주님인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죄수로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은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그 십자가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2절을 보면 이런 가운데서도 그를 믿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이 문제로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 드러내놓고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의 믿음은 약하여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 볼 점은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영광의 주님이신 것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그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온 몸을 발가벗긴 채 손과 발목에 굵은 대목을 박아 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삼일 정도 고통하다가 죽는 것이 십자가의 모진 형벌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길가다가 벼락을 맞으면 뭔가 하늘에 남모르는 죄를 짓고 벌을 받은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달린 자는 그 연유야 어떻든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생각은 맞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버림받음과 그 저주받음은 실상은 내가 받아야 할 수치와 저주를 대신해서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3:4-6절은 그 수치와 저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누가 십자가를 보고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이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미리 예언하여 적어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을 때에만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읽는 것으로만 부족합니다. 그 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눈을 열어주실 때에만 그것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저자 요한이 이 의미를 깊이 풀어 기록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미 나의 마음에 오셔서 일하신 것이라는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그들의 그 마음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겸손하게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시는 주님은 그 마음을 완악하게 먹고 그 마음의 문을 빗장을 걸어 닫은 사람에게는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이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보신 분이 계십니까? 나의 삶을 통해서도 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이 밀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의 열매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매일 더 깊이 체험하고 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예수님처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내어주는 삶을 삶으로 풍성한 열매맺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