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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성탄 3강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누가복음 2:1-20)2021-12-20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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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3강 메시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말씀 누가복음 2:1-20

요절 누가복음 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Merry Christmas! 이 말은 즐거운 성탄예배란 뜻입니다. 성탄절은 왜 즐겁습니까? 어린 시절에는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좀 커서는 친구들과 만나 먹고 마시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탄절은 왜 즐거운 명절입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그분이 하신 일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의 탄생을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왜 예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지 배우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정말 우리 마음이 기쁨이 충만해져 진심으로 Merry Christmas! 를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 기사는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때는 로마의 초대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제국을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그 이름이 옥타비아누스로서 유명한 영웅 줄리어스 시이저의 양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군인이 아니었지만 뛰어난 정치력으로 경쟁자였던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뛰어난 통치력을 인정받아 아구스도 곧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의 초대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는 로마제국 식민지에 한 명도 예외없이 다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호적이란 인구조사로서 제국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위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납세나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데 자료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호적명령에 대해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재임 시에 1차 진행된 것이라고 밝힘으로 역사적 사실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황제의 호적명령은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호적을 하기위해 자기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것은 왜 호적을 고향에서 하느냐는 것입니다. 보통 인구조사는 현거주지에서 합니다. 이것이 조사하는 측이나 받는 측 모두에게 좋습니다. 로마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호적을 고향에서 합니다. 이것은 유대민족만 그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족보와 가문을 중시하기 때문에 로마 황제에게 요청하여 이렇게 바꾼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마는 많은 나라들을 통치해야 했기에 각 나라의 상황에 맞게 그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들의 요청을 수용했습니다. 따라서 유대백성들은 로마황제의 호적명령과 더불어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요구 때문에 이중으로 고생하게 된 셈입니다. 이에 호적명령을 받고 이동하는 유대인들의 입에서는 로마황제보다 유대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원망과 불평의 말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호적명령에 따라 이동하는 행렬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요셉과 마리아가 그 행렬 속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처럼 로마황제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이 호적명령에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동하지 않았지 싶습니다. 그와 정혼한 마리아는 당시 만삭된 상태였습니다. 만삭된 가운데 호적여행을 떠나는 마리아는 몹시 불편했을 것이고 요셉은 그런 마리아가 염려되어 위하여 많이 기도하고 배려했을 것입니다. “마리아, 조금만 더 힘을 내요. 이제 베들레헴에 거의 다 왔어요~”

 

결국, 아기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아기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미가서 5:2절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말씀을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북쪽 갈릴리 나사렛에 살았는데 남쪽 유대지방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의 강력한 명령을 사용하여 약속의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당장 고통과 불편이 주어진다고 반드시 불평하고 원망할 일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불편하고 힘든 상황마저도 그런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 힘들지만 우리가 미소 지으며 상황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역사가인 누가는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님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세상역사가들은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중요하고 그와 경쟁했던 안토니우스와 코가 높았다는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수리아 총독이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볼 때 그들은 역사의 조연이요 들러리에 불과했습니다. 대신 힘도, 권력도, 어떤 영웅적인 카리스마는 1도 없는 요셉과 마리아가 더 중요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하이라이트 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중심의 역사관입니다. 우리가운데 요셉과 마리아 부부처럼 그리스도를 품고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뜻을 섬기고자 애쓰는 분들이 있는데, 이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이며 하나님의 시선은 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분명한 그리스도중심의 역사관을 가짐으로 자부심과 확신가운데 우리 가는 길에 힘을 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이렇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요셉의 무능과 베들레헴 사람들의 사랑없음이 문제였던 것같습니다. 어디나 많은 돈을 얹어주면 방하나 쯤은 얻을 수 있고 이제임스 목자님처럼 수완이 있으면 돈이 적어도 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롭기는 했으나 가난하고 뻣뻣했던 것같습니다. 또한 베들레헴 여관들에 투숙한 사람들이나 여관주인의 이기주의 물질주의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자신들도 피곤하고 어렵게 방을 잡았기에, 방을 양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모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양보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다 친족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사랑이 식고 비인간화됩니다. 그러나 이기적으로 살면 행복할 것같지만 나중에는 후회합니다. 특히 인생을 마치게 될 때 사랑을 실천하지 못 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든 이기심을 극복하고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하여간, 이런 측면에서만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슬픈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또 깊은 이면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버림받은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아무도 아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이 때 주님의 탄생 소식이 누구에게 전해졌습니까? 베들레헴 지역의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는 성탄소식이 머나먼 동방의 지체 높은 박사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번에는 양똥 치우는 천한 신분의 목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이를 보면 주님의 탄생소식은 모두에게 전해져야 할 소식입니다. 왜 목자들에게 성탄소식이 전해졌을 까요? 종교지도자들에게 전해주면 그들이 확인도 안하고 뭉개고 있을까봐 그러신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목자들은 많은 성경지식은 없어도 단순하게 믿고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추운 날에도 밖에서 깨어 자기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고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으면 반드시 현장으로 달려가 확인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어떻게 전했습니까? 주의 사자가 그들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자 그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천사는보라하며 감격적으로 말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주목할 만한 대단하고 엄청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천사는 자신이 전하는 소식을 두 가지 말로 수식했는데, 바로 온 백성에게 미치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온 백성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이지만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씁쓸하다 못해 슬픈 소식일 것입니다. 재난 지원금을 받을 때 온 국민이 다 받지 못하고 80% 국민에게만 해당된다고 하니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중에는 분노하고 씁쓸해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전하는 이 좋은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소식입니다. 어느 민족,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확실하게 해당되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오직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입니다.

 

둘째로, 천사가 전하는 좋은 소식은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입니다. 온 백성에게 기쁨을 준다고 한들 그것이 작은 기쁨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소식과 일상이 어느정도 회복될 것이라는 소식은 온 백성에게 해당하는 기쁨의 소식이었지만 큰 기쁨을 주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백신이 완벽하지 않고 효과가 6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아 또 3차를 맞아야 합니다. 코로나와 관련하여 앞으로 인류는 영원히 마스크를 벗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예언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완전한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한들 또 다른 질병들이 계속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현재 25,000가지의 질병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가운데 1/3정도만이 치료약이 개발되었습니다. 또한 아무리 질병을 치료해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니 이런 가운데 어떤 소식도 작은 기쁨을 줄 뿐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이란 우리 인생들에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기쁨을 주는 소식이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오늘 다윗의 동네에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오늘은 정말 감격적인 오늘입니다. 오랫동안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날은 역사가 바뀌는 역사의 기원을 이루는 엄청난 오늘입니다. 다윗의 동네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동네로서 하나님 말씀의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구주는 우리 인생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를 가진 상태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우리 인생들은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구주는 우리 인생들을 이런 상태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빠져있는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의 문제입니다. 죄는 도덕윤리적인 개념보다 근본적인 의미가 중요합니다. 죄는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빗나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를 부정하고 자행자지 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우주 미아가 되어 표류하며, 그 영적 생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또한 죄값으로 육신이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고통하는 둘째 사망에 처해 집니다. 이것이 죄가운데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런 인간은 무엇을 해도 근본적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무엇을 해도 그것이 성공이 되지 못합니다. 그 어떤 사회개혁을 이루고 물질문명을 발전시켜도 헛되고 허무할 뿐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한계적인 인생을 사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구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약속된 구주 곧 그리스도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그리스도가 오늘 태어나셨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죄값이 치루어지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원하면, 과거의 죄문제의 해결, 그리고 미래에 영생을 얻는 것만 생각하여 좀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지금 누릴 수 있는 영생, 곧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런 사람의 입에는 늘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상황이 어려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의 하루하루의 기쁨 충만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런 기쁨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 까지 계속됩니다. 기쁨은 구원받은 사람의 최대의 특징입니다. 그 무엇도 우리의 이러한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의 기쁨이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요?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 기쁨을 언제부터 누리게 된다고요? 오늘부터입니다. 예수님은 온 백성을 위해 태어나셨는데 중요한 것은 그 온 백성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위해 태어나신 예수님을 오늘 받아들이면 오늘 우리에게 영생의 기쁨이 임합니다. 오늘 죽음권세가 사라집니다. 오늘 슬픔이 사라집니다. 외로움, 우울증, 강박증이 사라집니다. 염려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오늘부터 내면에 돋는 해가 떠서 내 삶을 비추입니다. 근본적으로 기쁜 사람이 되어 그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오히려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에게 구주 예수님을 보내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현재 소소한 기쁨이 없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기뻐합시다.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어떤 대학도 감사함과 소망으로 다닐 수 있습니다. 또 정 맘에 안들면 다시 도전하면 됩니다.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실 것이며 우리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16:24). 중요한 것은 지금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Merry Christmas!!!를 외쳐 봅시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천사는 세상을 구원할 구주의 표적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 말했습니다. 망토를 두르고 보좌에 앉아있는 황제나 영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강보는 질 낮은 천으로 주로 가난한 자들이 사용하던 천입니다. 그리고 구유는 외양간 짐승의 좁고 더러운 밥통입니다. 아기는 무력하고 힘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낮고 무력한 존재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한단 말입니까? 이를 보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지위와 부와 권력을 통한 구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겸손과 희생, 섬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실상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것은 그분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의 낮아지심과 그분의 희생과 섬김과 죽음이 우리를 감동시켰고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확신케 했습니다. 그분의 겸손의 성육신은 홍해를 가르는 기적보다 더 크며, 그분의 희생과 죽음은 사실상 그분의 부활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목자의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이 목자의 표적입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끝나고 갑자가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며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 이유는 예수님이 지극히 낮아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인생들, 인생들 상호간에 진정한 평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모든 불안과 염려, 스트레스, 불신과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가 깃듭니다.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목자들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날이 밝으면 가서 확인하러 가보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가서 주님이 알려주신 일이 사실인지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천사가 전한 말을 사람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랍게 여겼고 마리아는 그 말들을 마음에 새기어 깊이 생각했습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신들에게 일러준 말이 모두 사실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습니다. 걷기예찬론자가 된 한 목자님은 제 2의 심장은 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만 많이 한 가분수들이 아니라 하나라도 현장에 가서 확인하고 실천하는 다리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적 심장이 다시 뛰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다른 것을 잘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닙니다. 웃음 끝에도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주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주시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고 미래의 영생을 누릴 뿐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소소한 기쁨의 유무를 넘어서는 큰 기쁨을 소유하며 어떤 난관도 극복할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을 주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말구유에 오신 주님을 감사찬양합니다. 이 기쁜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나만 누리지 않고 나만 알고 있지 않고 이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우리가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