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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9강 `생명의 떡 예수님 ⁠`(요한복음 6:22-71)2021-05-1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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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요한복음 9강

생명의 떡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6:22-71

요절/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지난 말씀에서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6:14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모세는 민족의 구원자였습니다. 본래 모세는 이집트 왕 바로의 명령에 따라 나일강에 던져질 운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강포한 명령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집트 왕을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모든 첫째 아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는 장자재앙은 결정적으로 바로의 기세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글거리는 복수심으로 광야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추격했습니다. 앞에는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 뒤에는 추격해오는 이집트 군대로 인해 이스라엘의 민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홍해 바다가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이집트 군대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추격하다가 다 홍해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바로의 위협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거친 광야의 위험이 나타났습니다. 다른 어려움도 있었지만 2백만명이 넘는 백성들을 먹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식량 문제를 위해 하늘에서 무려 40년간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한편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경제 구조를 살펴보면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부와 자원, 식량이 전부 로마로 흘러들어가는 구조였습니다. 로마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은 로마의 부와 자원, 권력의 혜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로마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난과 빈곤, 경제적 착취로 인한 고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적 배경 가운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는,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가파르게 치솟는 아파트값을 하루 아침에 낮추고 청년 실업 문제를 한 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의 능력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옛날 모세와 같은 구원자로 인정하고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습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떠나 산으로 가셨습니다. 22-25절을 보면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아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며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워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는 무리들에게 분명한 삶의 방향을 주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경제 문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는 “문제는 경제라고 이 바보야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선거 구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코로나로 인해 무너진 세계 경제를 다시 살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코로나로 죽든, 경제가 무너져 죽든 죽는 것은 매 한가지이기 때문에 각국 정상들은 백신이 다소 위험 요소가 있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국민들에게 백신을 맞히려고 합니다.


경제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한 것인가를 인류는 1929년 뉴욕 증시의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경제 대공황을 통해 체험했습니다. 1928년 대통령 선거에서 허버트 후버 공화당 후보는 “미국인들이 매 끼니마다 닭고기를 먹고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할수 있게 하겠다”고 공약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공약대로 1920년대 미국은 대 경제 호황을 누렸습니다. 포드자동차는 대량생산을 통해 가구당 1대의 차량을 소유하는 자동차 대중화시대가 열리게 하였습니다. 주식시장은 마치 뉴욕의 뾰족한 첨탐을 가진 마천루 빌딩처럼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습니다. 이 시기 미국인들은 재즈에 열광했고 축음기가 보급되어 영화관이 생기고 헐리웃 스타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페니실린이 개발되어 인류는 바이러스의 공포에서 헤어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찰스 린드버그는 뉴욕에서 대서양을 건너 파리까지 횡단하며 만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스포츠 대회가 열리고 미인대회는 미니스커트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언론은 센세이셔널한 이슈를 자극시키고 마음껏 마시고 즐기는 대량풍조가 만연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시대를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던 1929년 10월 28일 월요일 미국의 다우존스 지수가 무려 12.8% 하락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날을 검은 월요일이라 불렀습니다. 그 다음날은 11.7% 하락했고 총 두 달에 걸쳐 주가는 반토막이 났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공황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미국의 실업률은 26%까지 치솟았고 4명 중 한 사람은 일 자리를 잃었습니다. 경제학자들 간의 이견 차이가 있지만 이 세계 대 경제 공황이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처럼 경제는 다른 그 어떤 문제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로 보입니다. 세계 경제도 그러하지만 가정 경제도 그러합니다. 가정 경제가 무너지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부부가 날마다 세계 대전과 같은 전쟁을 불사하고 싸울 수 있습니다. 가정이 깨어지게 될 위험이 큽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경제 문제를 정말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가정 경제의 안정을 위해 수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경제 문제의 해결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삶의 목적을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들을 때 이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너무 현실을 모르시는 말씀 같습니다. 한 번 개인 경제가 파탄이 나면 더 이상 사람 취급도 못받고 사회의 낙오자가 됩니다. 이 냉엄한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에게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니 예수님은 뜬 구름 위를 살아가는 이상주의자 같습니다.

28절을 보면 무리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2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으니까 자기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계획하여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다른 한 가지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의 포인트는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고 후자의 포인트는 하나님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범하여 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자기가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이에 비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별로 큰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의 반석 위에서 모든 인생의 염려와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함 가운데 거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다 하는 하나의 본을 세우셨습니다. 그의 내면과 그의 인격을 믿음의 반석 위에서 성숙하게 하셨습니다. 외적으로는 이삭이라는 훌륭한 믿음의 후계자를 세워주셨습니다.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창기에 이런 선교단체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계획하고 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계에 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니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 사정상 세계 선교를 할 형편이 못되었지만 우선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또 서독의 간호사들을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로 훈련하여 파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91개국에 1,600명이 넘는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가 파송되었습니다. 또한 330여명의 가정 교회를 이룬 현지인 리더들이 세워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경제 문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경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불철주야 연구하는 세계의 경제학자들, 또 경제 문제의 해결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 또 가정 경제의 안정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각 가정의 가장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경제 문제의 해결이 우리 인생의 참된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경제 문제의 해결만을 위해 살면 문제는 그 삶에 하나님이 끼어드실 공간,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주식상황판을 쳐다보고 여러 도표와 수치를 쳐다보며 결정을 내리고 정책을 정하는 삶에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은 없습니다. 경제문제가 잘 해결되어 우리가 생존하고 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나의 삶에 하나님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이 곧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생존이 달린 경제문제보다 더 중요합니다. 경제문제는 육신의 생명을 좌지우지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는 육신과 더 나아가 내 영혼의 생명까지 모든 것이 다 걸려 있습니다.

도전적인 예수님의 말씀에 무리들은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모세가 하늘에서 40년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여주었는데 예수께서는 어떤 표적을 보여주실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모세가 하늘에서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신다고 그들의 생각을 정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께 존칭을 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떡을 달라는 무리에게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십니까?

첫째, 예수님을 믿는 방식을 통해 예수님을 참 내 것으로 소유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우리가 현금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은행을 믿지 못해서 장롱 안이나 구들장 밑에 현금을 숨겨놓는 방식으로 현금을 소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오히려 더 안전하지 못합니다. 구들장 밑에 현금을 숨겨놓으면 습기나 벌레에 상하여 현금 가치가 크게 훼손될 수 있습니다. 또 장롱 안에 숨겨 놓으면 도박에 빠진 자식 놈이 몰래 훔쳐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행에 맡겨놓는 편이 안전합니다. 요즘 인터넷 뱅킹을 많이 하는데 인터넷 뱅킹 상에서 내 이름으로 된 계좌에 입금이라는 표시가 되는 순간 그것은 안전한 나의 현금 자신이 됩니다. 설령 실수로 잘못 입금된 돈이라 할지라도 내가 자발적으로 계좌이체를 하지 않는 이상 은행도 그 돈을 함부로 빼내갈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음식을 한 번 먹으면 그 음식은 내 것이 됩니다. 음식을 먹었는데 이미 먹은 음식이 중간에 남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번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간 음식을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은 내 몸에서 에너지로 바뀝니다. 에너지로 바뀐 음식은 나에게 힘과 활력을 줍니다. 음식은 먹는 순간에는 먹는 즐거움과 기쁨을 줍니다. 또 다 먹은 후에는 내 삶에 에너지와 힘과 활력을 줍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나의 소유가 되고 나에게 기쁨과 힘과 활력을 주는 양식이 됩니다.


저의 장인 어른이 현재 폐암 말기입니다. 장인 어른은 유력한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주변 일가 친척 중에 잘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도로공사 사장을 한 분도 계셨고 인천에서 큰 병원을 운영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런 집안에서 장인 어른은 뭔가 위축된 삶을 사셨습니다. 늘 남과 비교되고 난 뭐를 해도 결국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결혼 후에도 이런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친척들이 대학 교직원 자리 등 좋은 직장을 구해 주었지만 잘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안되어 스스로 그만두기를 반복했습니다. 삶이 힘들고 괴로워 담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나이가 80이 넘게 되었습니다. 80이 넘어 폐암 진단을 받았고 그것도 말기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딸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장인 어른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장인 어른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 귀하게 여기시고 영접해 주셨습니다. 삶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그 무섭고 외롭고 두려운 죽음의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의 목자가 되어 너를 죽음의 골짜기에서 지켜주겠다, 너를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장인 어른은 이 약속의 말씀을 읽어줄 때 너무도 평안한 얼굴이 되셨습니다. 장인 어른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 때 주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나를 지켜주시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로써 장인 어른은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장인 어른의 생명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을 잘 믿을 때 예수님이 진정한 내 소유가 됩니다. 예수님을 잘 믿을 때 예수님이 진정한 나의 양식이 됩니다. 삶의 여러 역경과 환난과 시험 앞에서 예수님이 나의 위로요 기쁨이요 소망이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순간순간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십자가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53-5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곡식 한 알이 나에게 양식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까? 또한 곡식 편에서 볼 때 얼마나 험한 고난의 과정이 필요합니까? 한 알의 곡식이 나오기까지 먼저 씨가 땅에 떨어집니다. 땅에 떨어진 씨는 일년 내 햇볕을 받으며 광합성 작용을 합니다. 또 뿌리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여 잎파리를 내고 성장합니다. 이후 늦가을의 따가운 뙤약볕 아래 알곡을 품어냅니다. 여기에 다시 농부의 수고가 더해집니다. 농부는 그 알곡을 타작하여 껍데기를 벗겨냅니다. 여기에 다시 주부의 수고가 더해집니다. 주부는 그 알곡을 빻아서 가루로 만듭니다. 가루가 된 알곡으로 반죽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누룩을 넣은 후 불에 굽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가 먹을 빵이 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시기 위해 오랜 세월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여러 선지자들이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30년간 목수의 아들로 순종하시면서 자신을 준비하셨습니다. 30이 되었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믿음을 심었습니다. 공생애 3년이 지났을 때, 마침내 예수님은 인간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제물로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채찍에 맞아 찢기고 십자가의 못에 찔리실 때 예수님의 그 몸은 죄로 죽은 우리 영혼을 다시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실 때 그 피는 죄로 죽은 우리 영혼을 다시 소생시키는 생명의 음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믿을 때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 영혼의 생명의 양식과 음료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믿음이 단회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에 가난한 대학시절 함께 자취하던 학생들과 함께 뷔페 식당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평소 험블하게 먹다가, 심지어 여의치 않으면 밥에 간장을 비벼먹다가 뷔페 식당에 초대받으면 한 번 식사로 최소한 1주일은 살 수 있는 힘을 얻으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을 때 그런 식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단회적으로 믿고 그 다음에는 그 사실을 실제 삶에서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으면 예수님이 진정한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한 번 뷔페 식당에 가서 배가 터지게 먹고 그 다음에는 쫄쫄 굶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속적으로 우리 영혼의 살과 피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증거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만약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셨다면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또한 로마서 5:10절은 말씀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만약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의 아들의 살을 찢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게 하시고, 그의 아들의 피를 흘려 우리 영혼의 음료가 되게 하셨다면 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영혼의 구원을 확실하게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때마다 영혼이 배가 고프고 주리고 목마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을 십자가가 아닌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는데 두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선교사 수양회에서 메시지를 전하게 된 한 목자님의 메시지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크게 감동받고 배운 바가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옵니다.


“성공이 목표라면 작은 성취에 안주하고 쉽게 지치지만, 예수님을 배워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일생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If success is a goal, you can settle for a small achievement and get tired easily, but if you aim to learn and grow in the knowledge of Jesus, you can run with a lifelong passion.)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큰 마음의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사역의 성공을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사역의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려 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십자가에서 흘리셨던 그 피가 전혀 내 영혼에 양식과 음료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새롭게 예수님을 배우고 나의 내면이 성장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었을 때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이 사랑의 확신은 저의 영혼에 참된 양식이요, 음료가 되었습니다. 제가 날마다 날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며 영혼에 참된 힘과 위로를 얻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양식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이 예수님을 우리의 양식으로 소유하는 비결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십자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내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과 확신 위에 굳게 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