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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창세기 2강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2019-03-17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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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2 강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


말씀/ 창세기 1:26-2:3
요절/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지난 주 우리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저는 메시지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딱따구리의 신체구조가 얼마나 과학적이고 오묘하고 경이로운가를 알고서 하나님의 창조 솜씨에 감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보다도 더 감탄스러운 인간 창조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고민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 해답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에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일에 드리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사람의 자존감을 세워줍니다. 사람은 자존감이 높아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경적 인간관을 정립하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는 일방적인 명령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면 빛이 있게 되었고, 하나님이 ‘하늘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면 하늘에 새들이 창조되어 날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 논의를 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들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여기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인간창조가 너무나 중요하였기에 삼위 하나님께서 진지하게 의논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는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종류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형상은 히브리 원어로 ‘체롬’인데 영어로는 ‘image’로 ‘무엇을 새기다’란 뜻입니다. ‘동상이나 우상을 새기다’ 할 때도 쓰여지는 단어라고 합니다. 형상은 인간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닮은 꼴을 말합니다. 모양은 원어로 ‘데무트’, 영어로는 ‘likeness’로 ‘추상적인 면에서 유사하다’는 뜻입니다. 형상과 모양, 두 단어는 유사한 단어인데요. 히브리 말의 수사법에서는 어떤 내용을 강조하고 싶을 때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받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죠?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유추해 낼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군의관 훈련을 받을 때 삼사관학교 내에는 교회, 성당, 절 이렇게 종교시설이 있습니다. 그곳 절에 있던 스님이 하루는 우리에게 정신교육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강의입니다. 그때 스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젊은 목사가 삼사관학교 군목으로 부임했는데 자기에게 인사차 왔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님이 스님을 보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스님을 보니 부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너무 기분이 좋아 ‘목사님을 보니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젊은 목사님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겠죠.


그러면, 인간에게 어떤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의 마음에도 이 사랑이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동정심이 생기고 댓가없이 봉사하고자 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추구합니다. 의인 고이수현씨는 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다가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기 위해 용감히 선로에 뛰어들었습니다. 일본인은 구해냈으나 정작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졌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과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가 한국과 일본 사이가 지금처럼 안 좋은 때였거든요. 국적을 떠난 인류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저는 우리 JBF학생들과 독거노인 봉사를 하고 있는데요. JBF학생들이 교회에서 섬김만 받으려고 하는 철없는 애들로 보았는데 그들이 어르신을 도와 폐지를 정리해주고 안마를 해주는 것을 보면서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사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때문에 사람들도 거룩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닮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합니다. 이화학당 학생으로 재학중이던 유관순열사는 고향 충청도 아우내 장터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고문을 받고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였습니다. 그녀는 모진 고문에도 “내 나라에 쳐들어온 너희에게 나는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내 나라에서 당당한 일을 했을 뿐이다” 하며 불의에 항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사람도 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전도서 3:11절에 “하나님이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했습니다. 동물은 육신이 충족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적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위엣 것,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을 추구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행복을 느끼고 영이 깨끗하고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로마서 1장 후반부 말씀처럼 부끄러운 욕심을 따라 음욕이 불일 듯 합니다.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릴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성적인 타락입니다. 또 온갖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 자랑, 부모 거역, 무정, 무자비 등등 여러 가지 병든 모습들이 나타납니다(롬1:29-31). 이전에는 밤길을 갈 때 사람이 나타나면 그렇게 반갑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제일 무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믿고 아이들을 맡길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골로새서 1: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가 거듭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인간적인 노력이나 수양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4절 말씀처럼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우리 자신에 대해 자존감을 갖게 해 줍니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의 자존감이 어떻습니까? 아이가 혼자나 둘인 가정이 많아 부모의 집중적인 관심과 사랑, 그리고 공주, 왕자처럼 대접받기 때문에 보통 자존감이 높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자존감이 추락합니다. 어렸을 때 별 문제 없게 보이던 아이가 부모에게 ‘아빠, 엄마가 나에게 해 준게 뭐가 있는데~’하면서 대들 때 부모는 맨붕에 빠집니다. 어렸을 때 자존감이 높던 아이들이 커 가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외모, 성적, 성격, 다니는 대학, 집안 형편 등이 남과 비교되면서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현재 우리 청년들의 자존감은 어떻습니까? 어떤 목자님은 우리 청년들이 자존감이 낮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객관성이 없고 공정하지 못한 사회의 구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인이 그것을 직접 체험하였을 때 자괴감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헬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이 우리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면 우리 선교사님중에 어떤 분은 한국에서는 자존감이 낮았는데 아프리카 선교사로 살면서 자존감이 확 올라갔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환경과 사람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다’ 이것을 인식하고 나의 정체성으로 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황태자, 황공주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이 자존감은 상대적 자존감이 아니라 절대적 자존감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쓸 당시의 청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광야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선진국 애굽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존감이 낮은 상태였습니다. 애굽사람들은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안락하게 사는 반면 자신들은 광야를 떠돌며 하나님이 때마다 먹을 거리를 주셔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미래가 불안하였습니다. 노예가 되어도 좋으니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야” 이것을 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창세기를 출애굽하고서 시내산에 머물 때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유명한 시내산 언약을 맺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이 언약에는 무슨 뜻이 들어 있죠?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로 삼아 존귀하게 여기고 특별 관리해 주시겠다고 약속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세상가운데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여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와! 놀랍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존심을 확 올려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현 시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살고 금 수저를 가졌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써 그 사람들보다 더 복된 사람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때론 내가 미운 오리 새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나의 정체성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백조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며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세도 달라집니다.


둘째, 모든 사람이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존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굉장히 존귀한 자로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거라사 광인을  왕따 시키고 쓸모없는 존재로 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한 존재로 봤기 때문에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하시고 그 사람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반면 사람들은 이천 마리 돼지가 희생된 것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볼 때도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였지만 그들을 귀히 여기고 함께 하시고 친구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구원하는데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남편을 여러 명 두었던 사마리아여인 조차 귀하게 대우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쓸모없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정말 귀한 존재다’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천하보다 한 영혼이 더 소중합니다.


셋째, 우리의 인생 목적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자존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존감이 높을 때 행복합니다. 그런데 남과 비교되어지고 일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존감이 낮아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개발서나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에 관한 책을 많이 사서 보거나 인터넷으로 검색을 많이 해 봅니다.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에 제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이 방법은 먼저 나의 현재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성장할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라든지 성품이라든지 대인관계라든지 이런 것들이 성장할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자존감은 성장’입니다. 이것을 영적 원리에 적용시켜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자존감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배우고 성장하면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에게까지 자라가면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자존감은 점점 높아집니다. 롬8:2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롤 모델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둘째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소유한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해집니다. 


제2장. 인간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


2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복이 무엇이죠? 원래 복은 원어로 ‘바라크’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다. 경배하다. 찬양하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어 순종할 수 있는 관계로 들어와 그 분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이 참된 복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떠나면 그 어떤 것도 복이 될 수 없겠죠. 복 가운데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모세 시대 때 왕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의 왕으로서 아담이 이렇게 살아가라고 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왕권을 부여해 주신거죠. 이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누구다? 왕이다! 그래서 벧전 2:9에서도 이렇게 말했죠.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초대교회 박해가운데서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왕으로써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통치권을 행사하라는 말입니다. 왕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주도적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장인 22장 5절에 보면 천국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우리 성도는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고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출애굽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노예가 아니다. 왕이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왕의 역할을 해라’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적극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왕이나 대통령이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베네수엘라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하게 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로 가득 채우라는 뜻입니다. 전도하고 제자양성하고 세계선교하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로 충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근심하십니다. 그리고 노아의 시대 때 어떻게 하셨죠? 다 물로 심판하시고 쓸어버리셨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미모에 현혹되어 그들과 결혼하고 육체가 됨으로써 사명을 감당하지 않음으로 이런 비극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찌하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자들로 충만해지도록 힘써야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사람을 복되게 하시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29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하나님은 채소와 씨 가진 열매를 식물로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셨다’는 말은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먹는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양식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하겠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사명을 위해 생존하는 자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모든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어떤 소감을 발표하셨습니까?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최고의 예술가인 하나님께서 보시고 ‘Very good’ ‘레알 짱’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도 완전무결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중에서 사람은 걸작 중에 걸작으로 만드셨습니다. 저는 집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 중에 걸작을 돈 들이지 않고 매일 감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두가지 먹거리를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신의 먹거리이고 또 하나는 인정과 칭찬이라고 합니다. ‘知音’이란 말이 있습니다. 종자기란 사람이 거문고 타기를 즐겨하였는데 그 음악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이 딱 한 사람 백아였습니다. 그런데 종자기는 백아가 죽고 자기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지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도 집에서 칭찬과 격려를 받고 일터에 나가면 힘이 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풀이 죽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먹고 삽니다. 그렇지만 머니 머니해도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자존감이 높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향하여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창2:2,3절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재정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마치시고 쉬시면서 안식일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재정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기념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인간에게 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통해 생명을 풍성케 하시고 복되게 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입니다. 이것이 인간 자존감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확신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힘써 배워야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걸작품임을 믿고 분명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하고 안식일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