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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성탄 제 3 강 `왕이요 목자로 나신 예수님`(마태복음 2:1-12) 2019-12-2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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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성탄 3 메시지 

 

 

왕이요 목자로 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1-12

요절 마태복음 2:6  유대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성탄 콰일러! 聖誕快樂! 세계 여러 나라에 성탄인사가 있지만  인사만큼 강력한 성탄인사가 있을까 싶습니다. 성탄이 되면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기쁨이 넘쳐 “메리 크리스마스성탄인사를 건넵니다.  그렇게 기뻐하지요? 선물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좋은  가서 맛있는 식사라도 하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이 태어나서 이지요!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태어나시기에 이렇게 기쁜 것입니까? 이시간 왕이요 목자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들의 마음에 진정한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헤롯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때는 헤롯왕이 유대를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헤롯 왕가의 창시자인 대헤롯으로서, 이방 에돔출신인데 로마황제의 환심을 사서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왕권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안을 해소하고자 대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했고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헤롯대성전, 원형경기장, 극장, 목욕탕 등을 지었습니다. 그는 언뜻 보면 백성을 사랑한  보였으나 실제는 자기왕권을 위해 선심정책을  ,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하면 심지어 아내나 자녀마저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정권을 위해 정적들을 잔인하게 제거하는 김정일, 김정은 같은 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유대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이때 머나먼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가까운 베들레헴 동네의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  마태복음에서는 무려 1500km 떨어진 동방   페르시아지역에서 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누가복음과는 거리 면에서, 찾아온 사람들의 신분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곳에서 이방인 박사들이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모든 민족, 모든 신분, 모든 계층의 그리스도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민수기 24:17절을 보면 원수들을 물리치는  ,  왕이 태어납니다. 사무엘하 7:12,13절을 보면 다윗의 후손가운데  왕이 태어나 나라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합니다. 이는 탄생하실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심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히 다스려 주기 위해 왕으로 태어나십니다. 동방박사들은 바로  유대인의 왕을 찾고 유대인의 왕은 그리스도의 별칭입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행복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 스승, 친구(아내)입니다. 그런데 근래는 부모를  만나야 한다는 논리인, 수저론이 대세였습니다. 혹은 할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다가 어려움을 겪은 분들은 뭐니해도 자녀를  만나야 행복할 것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행복하려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인생문제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며 영원히 우리를 다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잘못 만났더라도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는 정말 인생 성공한 사람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동방에서 천문학과 점성술을 공부하여 왕의 자문관 역할을 하던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요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박사학위를 여러  받고 예쁜 아내와 결혼했으며 신의 직장에 취업하여 모든 것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머나먼 길을 걸어 그리스도를 찾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은 아무리 인간조건이 좋아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행복할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기원을 모르고 행복할  있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며, 영원한 심판문제를 가지고 있고 사망의 그림자를 가지고 사는  어떻게 행복할  있습니까? 박사들은 인생의 근본문제로 고뇌하던  구약성경을 접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들의 염려와 만류를 뒤로하고 뜻을 같이한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짐을 꾸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그리스도를 찾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쾰른대 심벌마크는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를 찾아 무릎 꿇고 경배하며 보배합을 드리는 모습입니다. 저는  심벌마크를 보면서 진정한 지성인은 누구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진정한 지성인은 누구입니까? 석박사 학위를 여러  가진 사람입니까? 명문대의 좋은 과에 합격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진정한 지성인은 인생문제의 해결자인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쏟는 사람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소동이란 당황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입니다. 헤롯왕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리스도란 자를 중심으로 소요가 일어날까 걱정했습니다. 믿음 없는 백성들은 헤롯왕과 그리스도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정변이 일어날까 불안해했습니다. 혹은 만에 하나 정말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면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기에 소동했습니다.

 

헤롯왕은 그리스도를 초기에 찾아내어 제거하려 종교지도자들을 모아 그리스도의 탄생지가 어딘 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대답했습니다. 다같이 5,6절을 읽겠습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유대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말씀은 구약성경 미가서 5;2-4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BC 7세기에 활동하던 선지자로 가장 작은 동네격인 베들레헴에서 그의 근본이 영원에 있는 분이 태어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의 근본이 영원에 있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언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네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 탄생지를 알려주기위해 미가서 말씀을 인용했으나 우리는  말씀을 통해 탄생하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베들레헴에 탄생하시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그분은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왕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왕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외적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합니다. 치안을 유지하고 정책을 펴며 백성들이 평안히 먹고 살도록 합니다. 고대 역사를 보면 왕이 누구냐에 따라서 백성의 행복과 안녕이 결정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가장 강력한 왕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노력으로 장수왕 때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나라를 이루었고 가장 넓은 땅에, 가장  갖추어진 제도,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백성들은 편안히 거하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광개토대왕보다  가장 강력한 왕으로 오십니다. 세상 왕은 아무리 강력해도 죄와 사망권세는 꺽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장 강력한 왕으로서 누구도 꺾을  없었던 죄와 사망권세라는 사탄의 뿔을 꺾으시고 인생들이 참된 자유와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로 그분은 목자이십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상적인 지도자를 목자 같은 지도자, 목자 같은 왕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왕이  백성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 돌볼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어떻게 돌봅니까?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알고     인격적으로 돌봅니다. 왕은 아무리 위대한 왕일지라도 그가 다스리는 모든 백성들의 이름을   없습니다. 오히려 위대한 왕일수록  개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백성들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주의 왕이시나  사람의 이름을 알고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섬기십니다.

 

헤롯 왕은 겉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기유익과 백성들의 유익이 부딪힐  잔인하게 백성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목자 같은 왕은 어떻게 합니까?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선한 목자는 위기 상황에서 양을 구하고자 자기 목숨을 내려 놓습니다. 목자 같은 왕은 백성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 목자같은 왕은 세종대왕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아무리 신하들이 무례하게 반대해도 백성들을 위한 한글창제를 밀고 나갔습니다. 아무리 신하들이 결사반대해도 노비나 천민출신이라도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등용하여 자신의 재주를 나라와 백성을 위해 펼치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신하들과의 좋은 관계보다 백성들의 행복을  앞세웠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목자 같은 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의 이름을 아십니다.  개인의 고민과 깊은 내면의 아픔을 아십니다. 은사도 아십니다.   마른 자를 살리기위해서 종교지도자들의 비난을 무릅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신뢰하고 의탁할  있는 목자 왕이십니다.

 

여리고에 세리장 삭개오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순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로마의 사냥개, 창기같은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도 순결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자기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세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사냥개로 피도 눈물도 없이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렇게 이기적인 삶을  결과, 세리장이 되고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이방인 취급받는 왕따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았고 그를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깊은 고독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수많은 사람중에 나무위에 올라가 있는 그를 주목하여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알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하룻 밤을 머물면서 그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는 길을 잃었다가 목자의 품에 다시 안긴 어린 양처럼 행복해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짱돌을 들고 그녀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녀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기에 상황을 절대 모면할  없었고 죽을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지혜의 말씀으로 그녀를 보호하시고 살려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치루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정말로 깊이 이해하고 존재자체를 사랑해 주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명이라도 있으면 세상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있고 경우에 따라서 죽을  있는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님이 그런 역할을 해줄  있나요?  자매님은 중국 청화대라는 명문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1 다니고 자퇴했습니다. 그리고 야한 TV쇼에 출연했습니다. 이것이 족쇄가 되어 연예인이 되고자 기획사에 들어 갔을   전력이 알려져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혼당하고 홀로  그녀의 엄마는 외동 딸을 자신의 존재의 옳음을 드러낼 존재로 만들고자 때마마 가혹하고 무참하게 매질하여 그녀를 해외명문대에 진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딸은 더는 공부할  없었고 어머니에게 복수하기위해 자퇴하고 그런 길로 갔습니다.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이해는 부정확하며 사랑도 불완전합니다. 부모님말고 여친, 남친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도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의 만족을 위해 나를 이용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나를 위해 죽어줄  없습니다. 내가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추종하는 아이돌 스타가 나를 그렇게 사랑해줄  있나요? 팬들은 모두 스타들이 무대위에서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타들에게 나는 수백 수천만의 팬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목자가 천길만길 낭떠러지에서 울고 있는 양을 구하기 위해 절벽에 손을 뻗친 것처럼 우리를 향해 구원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목자가 되사   해도 나를 베스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2020년도 나를 베스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목자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립니다. 예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위해, 나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태어나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러니 성탄절이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목자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축하합시다.

 

헤롯은 박사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는  이것은 나중에 아이들을 학살할  자료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헤롯은 그리스도를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주어 자기도 경배하게 해달라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에게 정보원을 붙여 뒤를 밟지는 않았는  이것은 박사들이 워낙 순진해서  다시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가까운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은 것은 영원한 미스테리입니다. 어쨋거나 성경지식은 부족했지만 1500km 여행한 동방박사들과 성경박사인데 8km  움직인 종교지도자들은 두고두고 비교가 됩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동방에서 보던  별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는  있어 왕의 말과 별이 중요한 역할을  것을 봅니다. 왕의 말은 성경말씀에 기초한 정보였습니다. 그들은 합리적 생각과 상식에 기초해 새로 태어난 왕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가다 길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나름대로 찾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에 기초해 찾아야 합니다. 별은 오늘날에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박사들은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사실상 별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별의 주인공을 만나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세상 최고의 기쁨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목자로 만난 ,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요 기쁜 순간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예수님께 합당한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박사들의 경배와  나아가 모든 인생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창조주가 창조하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창조주는 피조물들에게는 절대적인 분으로 마땅히 최고의 사랑과 경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인격적인 면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땅에 낮아져 오시고 마침내 우리 인간들을 위해 자기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위해 태어나신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위해 태어나신 !  예수님은 최고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보면 죽임당한 어린 양이  생물, 24장로, 천군천사,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한 경배와 찬양과 존귀를 받고 계십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이나 인기 있는 연예인이나 여친, 남친, 혹은 자신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절대로 경배의 대상이   없습니다. 허망하고 미천한 사람이나 물질을 경배할  반드시 허무와 무의미가운데 빠지고 실망하게 됩니다. 창조주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죽고자 태어나신 예수님을 경배할  참으로 내면이 충만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박사들의 경배는 단순히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들이 준비한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박사들은 예수님에게 가장 합당한 예물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열어 예물들을 주님께 드렸는데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귀한 것을 드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뿐이었습니다.

 

챨스 스터드는 말하기를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맞다면  어떤 헌신도 헌신이라고 말할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헌신을 하셨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기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도록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된 경배는 실제적 헌신으로 완성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귀한 것을 주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친구를 사랑한다면 어려울  그를 도와 주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설거지라도 하고 집안청소도 하고 육아에 동참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이번 성탄절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웃사랑과 구제 사업에 우리의 소중한 물질을 드릴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호하기위해 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왕이요 인격적인 목자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목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으니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미래가 희망차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시간 나의 , 나의 목자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