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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11강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요한복음 7:53-8:20)2021-05-24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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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1 강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7:53-8:20


요절 /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7장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말씀하셨습니다. 8장에는 예수님에게 나아오기보다 간음의 현장으로 달려간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욕의 종이 되어 인생의 길을 잃은 한 여인을 도우십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초막절의 완성자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의 세력과 그 파워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또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3절을 보십시오. 때는 초막절 행사 직후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지만 예수님과 여자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고 여자는 간음하기 위해 불륜 장소로 갔습니다. 산은 기도의 장소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면 항상 어떤 큰 일을 행하신 다음 기도를 하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으로 인기가 올라가 방향을 잘못 잡기 쉬웠던 때에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러 올라가신 예수님을 우리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를 하면 우쭐하고 붕 뜬 마음이 안정됩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나아오셨습니다. 초막절 행사가 끝났으니 푹쉬고 영적인 것 하지 말자 할 수도 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성전에 나오셨습니다. 다음날 나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여기 나온 백성들도 말씀을 듣는 것을 보면 영적인 소원이 있는 백성들입니다. 이때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간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첫째는 음행 중에 잡힌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초막절이 아주 영적인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나자마자 정욕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불륜을 저지르다가 현장에서 잡힌 것입니다. 남자는 도망갔습니다. 아마도 창문으로 도망쳤을 것 같습니다. 재빠르게 날아간 것을 볼 때 그는 제비족 출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만 잡혀왔습니다.


그런데 붙잡힌 이 여자는 평생에 한번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일까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간음현장을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반복해서 간음하는 여자이며 꼬리가 길어서 잡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정욕 죄에 중독된 여자였습니다. 그 파워가 세서 제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륜를 저지르다 잡히면 죽을 수 있는 것이 당시의 사회입니다. 그런데도 간음죄를 짓는다는 것은 욕망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욕망이 죽음보다 강한 케이스가 북한에도 있습니다. 북한은 한드,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적발되면 총살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죽기를 각오하고 이것을 보려고 합니다. 불나방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정욕의 욕망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정욕이라는 욕망의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불륜의 현장을 즐기는 것은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잡힌 후 얼마나 후회스러웠겠습니까? 유튜브에서 중국의 사형수들의 마지막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짓고서 나중에 후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욕망의 종이 된 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과연 참된 목자이며 이것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대하는 태도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여자를 양으로서 조금이라도 배려한다면 성전에 끌고 오지 않고 만약 용서할 것이면 면담을 하고 말씀을 준다거나 만약 율법대로 하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데서 최소 인원으로 처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가장 거룩한 장소에 간음한 여자를 끌고 옴으로 수치를 주고 또 잔인하게 신상을 공개하도록 만들고 그녀를 미끼로 해서 예수님까지 잡고자 했습니다. 영화에서 악당들이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인질로 잡아 동료들까지 같이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 내면세계를 보면 매우 잔인합니다. 적어도 목자의 마인드는 아니고 오히려 사탄에 가까운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자를 미끼로 예수님을 공격해서 율법대로 하라고 하면 사랑과 자비는 말뿐이라고 비난하며 로마 총독에게 가서 백성을 선동하여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다고발할 것이고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 파괴자로 고소해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돌에 맞어 죽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만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가장 영적이고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악랄하고 비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자를 돌로 칠 것인가 하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흥분하고 감정적인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에게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대답을 못하자 궁지에 몰린 것으로 알고 하이애나처럼 덤비며 다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것은 율법을 수호하는 의미로 돌로치라는 율법대로 시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율법파괴자가 아니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제로는 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새로운 말씀은 아닙니다. 신명기 13장9절을 보면 ‘너는 용서없이 죽이되 죽일 때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고 되어 있고 ‘네가 먼저’라는 말이 나옵니다. 율법에 나온 것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돌로 먼저 쳐야 하냐면 그 죄와 관련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최소한 간음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죄 없는 자가 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칠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고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안하시고 다른 사람이 했다면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돌을 못 던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온 우주의 재판장으로 하신 말씀이었기에 그 앞에서 모두가 죄인으로서 자신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장차 최후의 심판의 현장이 잠시 이 땅에 구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가 성령의 검이 되어 내면 깊은 곳을 찌르고 드러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 죄가 다 드러나고 ‘죄없는 자’라는 말이 각자의 영혼과 마음에 울리는데 너무나도 자신의 죄가 많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책을 받고 더 이상 돌을 들고 거기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부다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정말 거룩하신 재판장이시고 그 말씀권세는 모든 숨겨진 것을 다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결국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에 집중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참 판단이 되고 그에게 돌은 아니더라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보다는 나 자신의 죄를 주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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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발견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나 마틴루터 같은 사람들도 자기들을 죄인 중의 최고의 괴수로 여겼고 워스트 오브 워스트, 최악의 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자는 많은 죄를 짓고도 죄의식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바람이 이는 잎새에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는 발견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창문에 밝은 빛이 비추이면 보이지 않던 먼지가 수없이 많은 것이 보입니다. 거룩하신 주님과 그 말씀 앞에 서면 정죄할 것이 나에게만 있고 다른 사람에게 없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정죄하기보다는 내가 회개를 해야 하고 내 죄문제를 빨리 해결하여 주님 앞에 서야 할 때에 부끄럼없이 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인으로서 자기발견을 잘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에서도 남의 죄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와 교회생활이 힘듭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기면 그곳에서 또 정죄하는 대상이 생깁니다. 자신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잘 못보고 남의 허물은 아주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인간관계가 힘들어지면 나중에는 무교회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 죄에 집중하는 사람은 나는 얼마나 돌에 맞아 마땅한 죄인인가? 깨닫고 다른 사람은 나에 비하면 양반이고 다 천사들이다라는 마음을 갖고 대하기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편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이 여자에게 직접 확인하고 그 마음에 평강을 얻도록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에게도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면 아버지가 딸을 대하듯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잔인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정죄의 돌팔매를 말씀의 권세로 막아주신 것입니다. 여자여라는 말은 귀나이로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호칭하는데 썼던 말로 귀부인을 말하는 정중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창녀같은 여인을 정중하게 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나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자를 정죄했던 바리새인 무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하신 말씀입니까? ‘나도’는 이 우주의 재판장으로서의 자격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정죄를 받지 않고 완전범죄를 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의 정죄를 피한다 하더라도 최후의 심판장의 정죄를 피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죄를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죄를 예수님이 대신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죄하면 이 여인은 정죄를 받는 것이고 예수님이 정죄를 안하시면 이 여인이 정죄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마디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시면 이것이 진짜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사람들이 정죄하더라도 주님이 정죄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정말 정죄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거꾸로 사람들이 정죄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정죄하면 그 사람은 진짜 정죄로부터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정죄로부터의 자유는 예수님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17절에서 자신이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사람들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죄로 고통하는 것입니다. 라이프테스티모니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은혜 받은 말씀 TOP3 중 1위는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입니다. 2위는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3위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이는 그만큼 죄로 고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밝아도 어렸을 때부터 죄를 짓고 마음에 양심에 가책으로 괴로워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소심해지며 죄책감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선포하며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내면의 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말씀이 정죄치 않으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안지으면 좋은데 죄를 짓고 죄에게 지게 됩니다. 율법의 기능이 죄를 않 짓게까지는 못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있지만 오히려 반감을 갖고 더 죄를 지으려고 하는, 금지하는 것을 욕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율법은 죄를 가르쳐줄 뿐 죄로부터 그 사람을 구원하거나 자유케 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인식하고 정죄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약 율법만 있으면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정죄로는 답이 안 나옵니다. 용서가 답입니다. 정죄하지 않아야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용서를 해주십니다.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장발장이야기에서 장발장은 빵을 훔친 것 때문에 감옥에서 5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미움, 원망, 억울함이 있었고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촛대를 훔쳐서 간 그가 잡혀왔을 때 “은잔도 주었는데 왜 촛대만 가져갔습니까?” 라고 하는 신부의 말에 사람을 미워했던 장발장이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용서의 사랑에 기초해서 억울한 것들이 풀리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겨야 하겠다는 방향을 잡았습니다. 결국 용서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용서가 정죄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답에 가까운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자대배치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흙에 더러워진 군화를 씻어야 해서 화장실에 가서 흙을 털어내고 물로 씻었는데 중대에서 선임 부사관이 저를 보시더니 소속을 물으셨습니다.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화장실 복도에서 제 부소대장님이 그 선임 부사관에게 귀가 잡혀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크게 화가 난 부소대장님이 저를 무섭게 혼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소대장님은 아주 환한 웃음으로 저를 대하시면서 아무런 잘잘못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용서에 저는 감동을 받고 더욱 열심히 군생활을 하고자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용서가 감동이 있고 용서는 또 다른 용서를 불러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아무런 조건없이 용서하게 합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은 영어로 Leave your life of sin인데 너의 죄의 삶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용서를 해주는 것도 좋지만 그 사람이 죄에서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해악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결코 나에게 도움이 안되고 나의 삶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간음죄는 특히 그렇습니다. 간음죄는 달콤해보이지만 날카로운 바늘을 감춘 미끼입니다. 그것을 물면 입이 찢어지고 인생이 끝나게 됩니다. 불륜은 요셉을 시험했던 가장 강력한 유혹었고, 잠언에는 간음죄의 미끼를 무는 자의 어리석음에 대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에스키모들이 곰을 잡을 때 생선을 날카로운 칼에 꽂아두면 곰이 그것을 먹는데 자기 혓바닥이 칼에 베어져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과다출혈로 죽게 됩니다. 불륜에 넘어가는 자는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습니다. 간음은 달콤하게 보이지만 엄청난 비수를 감추고 있습니다. 간음을 하게 되면 자기 인격이 파괴되고 이중적이 됩니다. 부부관계가 파괴되고 자녀와의 관계들도 파괴됩니다. 인생을 산산조각내는 간음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간음죄는 달콤하게 접근하지만 냉정하게 분별하고 그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막절은 물과 빛의 축제입니다. 물은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것을 기념하며, 빛은 불기둥으로 어둡고 깜깜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성막의 빛으로 임재하셔서 구름기둥과 함께 길을 인도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360도 모두 길이 될 수도 있고 360도가 전부다 멸망으로 갈 수 있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는 정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빛이 필요합니다. 본문의 여인은 길을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이 빛입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인생의 길이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히브리서 1:1,2a을 보면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계시의 완성자임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보이고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예수님을 보면 캄캄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진리의 세계가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면 빛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죄를 짓고 죄에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에 감추어진 미끼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면 바늘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연약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빛이 밝아져서 어리석게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빛이 비추이게 되면 어두움은 힘을 쓰지 못하고 다 사라집니다. 의외로 신자들 중에 자신을 숨기고 죄 가운데 넘어진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말씀이 없고 예수님도 없어서 계속 어리석게 반복해서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신자임에도 이혼하거나 불륜 등의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빛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잘 따르고 배우면 그러한 죄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13절에서 20절을 보면 예수님이 자기 증언을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증언이 참되지 않다고 하며 예수님을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 두 분이 증언하므로 예수님의 자기선언이 옳다고 하십니다. 또 14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혼자 증언하더라도 내 증언이 참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한분의 증언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백명이 증언해도 그 증언을 믿을 수 없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울대 교훈과 같이 진리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빛입니다. 다음주 세계선교보고대회가 열립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둠속에서 방황하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지성인들도 같은 문제입니다. 길되신 예수님, 빛되신 예수님을 모르면 모두 영적으로 캄캄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간음한 여인과 같이 죄와 어둠에 방황하던 저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시고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을 살게 하신 은혜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점에서 책을 훔친 일이 있었습니다. 훔치다가 현장에서 잡히고 여인처럼 두 명의 경비원에 의해서 쇼핑몰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습니다. 그제서야 어린 시절 도벽에 빠져 있던 제가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이키려고 해도 때는 늦었습니다. 경비원 아저씨들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해도 용서해주지 않았고 저를 질나쁜 아이로 몰아세웠습니다. 또 추궁하여 집과 학교에 연락했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가려는데 저는 아이들이 저를 둘러싸고 손가락질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다행히 학교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졸업할 때까지 혹시 이 사실이 알려질까 하여 두려움으로 조마조마하며 학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 되었고 한번 음란물을 접한 후에는 지속적으로 가족의 눈을 피해 그것을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정욕과 음란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갔습니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저는 이 죄를 이겨보고자 노력하며 얼마간 참아볼 수는 있었지만 결국 다시금 죄를 짓고 죄의식을 느끼며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해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죄의식은 무디어졌고 회개기도를 하며 상대적으로 의인된 심정으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름수양회에서 십자가 말씀과 말씀 앞에 죄를 진실되게 회개하시는 선배님들을 보면서 저도 도저히 아닌 척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자 소감을 써내려가며 낱낱이 저의 죄를 고백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상대적 의인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소감에 나타나 있는 추악한 죄인이 바로 나였고 예수님께서 그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감동의 눈물이 흐르고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사람들의 정죄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저를 용서해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최근 마음이 높아져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정죄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때때로 순결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죄인된 자신을 깊이 발견함으로 타인을 정죄하는데에서 벗어나며 죄의 삶을 떠나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간음죄는 나이가 많든 적든 다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의 어둠 속에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정죄치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죄를 분별하고 바른 길을 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