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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성탄 2강 `구원의 뿔 예수님⁠`(누가복음 1:57-80)2022-12-19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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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성탄2강말씀

                   구원의 뿔 예수님


말씀/누가복음1:57-80

요절/누가복음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메리크리스마스~!! 우리를 위해 구원의뿔 예수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아멘

 

오늘말씀은 사가랴의 찬송시입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사가랴의 찬송시는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과 힘이 넘쳐납니다. 무엇보다 사가랴는 막 태어난 아들 요한과 곧 탄생하실 메시야 예수님을 통해 일어날 일들을, 마치 눈에 보듯 하나님의 계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시간 사가랴의 찬송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의 마음과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가 저희 심령에도 강력하게 임할수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장 세례 요한의 탄생(57~66)

 

57,58절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할수없는 할머니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가운데 기적적으로 잉태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건강한 아이를 순산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서 그녀를 긍휼히 여기신 결과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웃과 모인 친족들은 자기일처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59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따라 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그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할례란 양피를 베어냄으로써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인데요, 보통 그때 아이의 이름도 지었습니다. 친족들은 참으로 어렵게 낳은 아이의 이름을 부친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2세로 짓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60절에보면 엘리사벳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해야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으로 당시에는 매우 흔했던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이에 친족들은 가문의 전통을 무시하고 족보에도 없는 이름을 지을수없다고 극구 반대했습니다. 이날은 경사스럽고 기쁜날이어야 했는데, 난데없이 이름짓는 일로 실랑이가 벌어지게되었습니다.

 

우리중에도 태어난 아이 이름을 아브라함이나 바울, 사라 등으로 이름을 지으면 집안에 믿지않은 어른들이 몹시 화를 냅니다. ‘뭐시라~ 이름이 바-울이라고? 쥐방울도 아니고, 사라는 또 뭐여 접시여~? 아브라함, 여호수아,느헤미야,어거스틴 뭔 이름들이 이렇게 길다냐~’하며 마땅치않게 생각합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가문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실랑이끝에, 결국 최후 결정권을 벙어리훈련 받고있는 부친 사가랴에게 맡겼습니다. 이에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하여 그 이름을요한(His name is John)’이라 썼습니다. 그러자 친족들이 다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처럼 가문의 전통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이는 사실 쉬운일은 아닙니다. 보통 자식이 없을때 자식 하나만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기도를 했다가 막상 그 기도대로 자녀를 얻게되면 생각이 싹~ 바뀝니다. 

사가랴부부 또한 어렵게 얻은 아들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누리고픈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정과 욕심을 부인하고 모든것을 하나님께 내어맡겼습니다. 이때 사가랴에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같이 64절말씀을 읽겠습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가랴의 믿음의 결단과 순종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사가랴는 잠깐 불신의 말한마디 잘못했다가 약10개월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훈련으로 요즘말로 완전 개~고생을 해야했습니다. 그래서 혀가 풀리자마자 가브리엘천사를향해 (‘아니 가브리엘 천사양반~ 말한마디 잘못했다고 사람을 이렇게 개고생시킬수 있소~’하며) 볼멘소리를 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입이 풀리자마자 벅찬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훈련기간동안 내면에 불신을 깊이 회개하였고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귀기울이고, 말하거나 논쟁하기 보다도 본문의 사가랴처럼 조용히 말씀을 보고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자 될수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장 사가랴의 찬송시(67~80)

 

67절로 79절까지는 사가랴의 찬송시입니다. 사가랴는 성령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67,6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사가랴는 먼저 그의 백성을 돌아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돌아보셨다는 것은찾아오셨다’ ‘심방오셨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심방오는 것처럼 큰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 있을까요?

 

장례식 조문을 갈때 그 어떤 위로의 말이나 위로금보다도 묵묵하게 함께 있어주고, 함께 슬퍼해주는 것이 정말 큰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심방은 우리에게 진정한 참위로와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찾아가실때 두가지 목적이 있는데요, 하나는구원이고 또 하나는심판입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이후로 약 400년동안 침묵하시는 것 같았던 하나님께서 이제 사가랴 제사장의 입을 통해 비로소 그 백성들을 돌보셨다는 것은 심판이 아닌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여기서 속량은몸값을 치루고 놓아주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죄인의 죗값을 대신 지불해주시고 그 사람을 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멀리 떠나간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약400년동안 목자없는 양들같이 유리방황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들일찌라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변함없이 그들을 지켜보시고, 때가 되자 돌보사 속량하여 주십니다.

 

사가랴는 이제 우리의 속량을 이루시는 그 실체가 누구신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다같이 69절을 읽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사가랴는  곧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구원의 뿔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제가 어릴때 뿔은 주로 부정적이고 악한세력의 표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른들이 얘기해준 무서운 도깨비 머리에는 반드시 뿔이 한,두개 달려있었고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때인 70년대는 북한 괴뢰군의 모습을 뿔달린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뿔의 이미지는 매우 사탄적이고, 우리 인간들을 괴롭히는 세력으로 그려집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사탄마귀는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나 되며, 온천하를 꾀는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리가 하나밖에 없고, 뿔은 커녕 쥐뿔조차도 없는 우리 인간은 이러한 사탄을 절대 이길수가 없습니다. 백전백패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힘이 천하장사요, 그시대에 사사였던 삼손도 정욕의 뿔에 찔렸을데 데릴라 치마폭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못하고 두눈이 뽑힌채 포로가 됨으로 사람들의 조롱꺼리로 전락하였습니다.  또 우리가 잘아는 민족의 영웅 다윗조차도 정욕의뿔에 찔리자 부하의 아내를 탐하다가 정욕죄는 물론 살인죄까지 저지름으로 그의 삶가운데 치명적인 허물을 드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탄마귀는 정욕의뿔, 탐욕의뿔, 교만의뿔, 혈기의뿔, 미움의뿔,/쾌락의뿔, 게으름의뿔, 이기심의뿔, 판단과 정죄의뿔, 불신의뿔 등 수없이 많은 뿔을 장착하고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공격합니다. 이처럼 사탄마귀가 들이박는 뿔에 이리저리 찔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도 뿔난 사람이 되어 그 뿔로 또 다른 사람들을 찔러대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찔려 상처난 우리인간들은 급기야 뿔뿔이 흩어져 뿔난 양들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구원의 뿔 예수님은 능히 사탄의 모든 뿔을 박살내시고, 우리를 생명가운데로 구원하여 주십니다.

 

구원의뿔 예수님앞에서는 그 어떤 어둠의 세력이나 죄와 죽음권세까지도 아무런 힘을 발휘할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강력한 구원의뿔이 되셔서 대적자들을 물리치시고 땅끝까지 심판하시며 뿔난양처럼 흩어져있던 우리인생들을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여주십니다.

 (기도의 종 한나는 이렇게 노래하고있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도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2:10)’ 아멘  이시간 우리가운데 구원의뿔 예수님을 허락하사 대적자인 사탄마귀의 모든 뿔을 꺾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사가랴는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찬양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말씀, 즉 선지자의 입을 통해 약속하신 것입니다.

 

70,71절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를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하나님은 구원자 예수님을 다윗에게 말씀하시고 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사무엘서에 보면 다윗이 통일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때,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장에서 피를 많이 흘린 다윗에게 그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대신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때에, 내가 네몸에서 날 씨를 네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11~13)

이 말씀은 바로 메시야 예수님을 통한 성취를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는 탄생하실 메시야 예수님을 아주 구체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6~7)

 

하나님은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23:5)

 

이처럼 하나님은 다윗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의 왕 되시는 예수님을 약속하시고, 그를 통해서 구속역사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시간 사가랴를 통해서 곧 탄생하실 메시아 예수님을 예언하시고 이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신실하심에 감사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초로 이 놀라운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까? 다같이 72,73절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네게 복을 주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것이라는 언약의 말씀 또한 주셨습니다.

 

사가랴는 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고 그것을 성취하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다만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격은 안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우리를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다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구원하신것입니다.

이시간 언약의 말씀을 지키시고자 우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감사찬송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코자하시는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같이 74,75절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목적은 바로 성결과 의로 두려움없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았을때, 인류는 불행의 연속이었고, 방황속에 헤매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약400년동안 영적암흑기가운데 있었을때 그들은 대적자들의 손에 넘겨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없는 삶은 부모없는 고아처럼 참으로 외롭고 두려움에 가득찬 그야말로 내팽개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을때, 두려움없이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된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사탄마귀입니까? 아니면 반복된 실패로인한 깊은 실패의식입니까? 아니면 코로나대유행이나 암과 같은 무서운 질병입니까? 아니면 살면서 겪게되는 고난이나 박해나 죽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안에 있을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절대 두려움의 대상이 될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할 것은 죽음이후에 있을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수있는 하나님을 알고 영접하게될때, 진정으로 두려움없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이시간 심판장되시는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함으로 진정으로 두려움없는 인생, 생명력이 충만한 삶 살아갈수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사가랴 찬송시처럼 종신토록 일생 주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없이 하나님을 섬길수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사가랴는 구체적으로 아들 요한이 장차 어떤일을 하게 될것인가를 예언합니다. 다같이 76,77절말씀을 읽겠습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우리는 한번 이세상에 태어났으면 조역이나 엑스트라가 아닌 주연으로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일것입니다. 그를 예비하는 삶이 아닌 바로 그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삶은 그가 아닌 그를 예비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내가 나의 삶에 주인공이 될때, 겉으로는 그것이 멋지고 괜찮아 보일수있지만 그 끝은 멸망으로 갈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공되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살때 가장 값지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례요한처럼 주의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의 삶, 깨어있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벌써 지난주에는 눈도 내리고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롤음악도 들려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한껏 연말분위기와 맞물려서 성탄절을 즐기려고만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세상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엉뚱하게도 빨간모자쓴 산타할아버지가 더 많이 등장하고 장식된 대형 크리스마스 츄리와 장사치들에 의해 각종 크리스마스 선물들이 백화점과 대형몰에 화려하게 진열됩니다. 우리가 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아서 이런 것들에 현혹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시간 저희가 조용히 말씀앞에 다가섬으로 곧 다가올 성탄절의 주인공되시는 예수님께 겸손히 나아갈수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요한의 삶은 구체적으로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하는 삶이었습니다.

 

요한은 빈들에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선포를 하며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메시야관은 정치적 구원과 사회적,군사적 구원을 이루게하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영적구원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일생동안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선구자의 삶을 순교직전까지 감당하였습니다.

 

백성들과 하나님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죄문제인데,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않았기에 죄사함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종교지도자들이든 군인이든 공무원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에게 죄사함의 필요성을 선포하였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삶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를위해서 먼저 자신을 깨끗케하는 생활을 일생 감당하였습니다. 그때 그 삶자체가 메시지가 되었고 회개를 촉구했을때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감당할때, 먼저 말씀을 통해 자신을 정결케함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삶을 담대히 감당할수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사가랴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구원의뿔로 예수님을 표현한 사가랴는 이제 예수님을 돋는해로 소개하며 장엄한 예언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78,79절말씀을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돋는해가 임하기전 우리 인간의 상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칠흙같이 어둔밤에 시골길을 걸어간적이 있었는데 정말 한치앞을 볼수없어서 장님처럼 벽을 더듬고 걸은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둠은 한치앞을 볼수없는 캄캄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둠속을 돋는해가 촤~악 하고 비추면 모든 어두움이 순식간에 물러가고 갈길이 훤히 드러나게됩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돋는해가 되셔서 우리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 영혼을 밝히셔서 생명의 빛으로 충만케하여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돋는해 예수님은 내마음의 깊은 상처와 슬픔과 운명주의, 절망과 낙심하는 맘가운데 빛으로 임하셔서 이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고 더이상 어둠에 다니지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하여 주십니다.

 

이시간 돋는해 되셔서 우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고 생명력이 충만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두가지 말씀에서 큰 은혜를 받게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긍휼의 역사라는 것과 또한가지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신 그 목적이 바로 두려움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엊그젓게 2022년도 달력을 보며 얼마전에 22년도를 시작을 한것같은데, 벌써 22년도가 며칠남지 않은 사실에 경악을 금치못했습니다. 정말 나이가 들면 그 나이수만큼 속도도 빨라진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와닿았습니다. 이렇게 세월은 마치 쏜 화살처럼 지나가는데 매일 일상의 삶을 반복하다보니 일주일전이 오늘같고 한달전이 오늘 같은 반복되는 삶의 연속이라는 생각가운데, 뭔가 새롭고 가치있는 일을 하고픈 생각에 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새벽을 깨워 양식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매주 말씀공부를 통해서 리프레쉬하는 시간을 때마다 갖지만,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즈음이면 늘 아쉬운 맘도 한켠을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수가 없습니다.

 

이러할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올해 또다시 성탄말씀으로 본문말씀을 맡기시고 말씀공부와 메시지를 준비하는 과정속에서 감사하게도 귀한 진리를 깨닫게하여 주셨습니다. 좀 전에도 언급한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뭔가 거창한 역사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즉 긍휼의 역사인 것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것입니다.  또 저를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신 그 목적이 삶에 아무런 꺼리낌이나 두려움없이 주님을 섬기는 삶에 있음을 다시금 발견케됩니다.

 

저는 한때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영적 비전이 충만했을때는 소망요회를 섬기는 목자로서 요회이름이 너무 작아서 대망이나 비전요회가 아니라서 양들이 너무 적게 담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주님께 많은 열매를 남기고 싶을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마다 생겨나는 물질문제와 자녀들의 격동의 사춘기시절동안 여러가지 어려움가운데 고생을 많이 한것에 비해 열매를 제대로 맺지못했다는 자책감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의 커다란 영적 비전과 실제 삶과의 괴리감이 저를 괴롭힐때마다 목자삶을 포기하고 싶을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저를 긍휼히 여기사 붙들어주시고 끝까지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니 하나님은 젊은 시절 안정감없이 좌충우돌의 삶을 살아왔던 죄인을 이제 모든 면에서 안정감을 갖게하시고 스테이블하게 주님역사에 동역케하심을 생각할때, 참으로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저 또한 많이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현재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갈수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게됩니다. 오직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긍휼이 여기사 주안에 참된 자아를 지속적으로 발견해나가게 하여주심으로 더욱 겸비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게하십니다.

 

무엇보다 구원의뿔, 돋는해되신 예수님을 알지못했던 젊은시절 탕자처럼 방황했을 때 저는 속두려움과 내면의 깊은 어두움으로 영육간에 건강치못한 삶가운데 보낼수밖에 없었지만, 지난 25여년간의 인생여정속에서 이러한 속두려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시고, 인생을 두려움없이 담대하게 살아가게하시며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삶가운데 큰의미과 가치를 깨닫게하여 주십니다.

이시간 주님께서 죄인을 날마다 지켜주시고 늘 기쁨과 평강을 허락하시매 감사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때마다 주시는 말씀을 꼭 부여잡고 하나님의 긍휼에 기초하여 매순간 두렴없이 주님을 섬기는 삶 끝까지 잘 감당해 나갈수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회가운데 박갈렙,박마태학사님들을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의때에 가정으로 돌아오게하시며 영적 회복역사를 이루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두자녀인 루시와 바울이가 지금은 하나님없는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부모에게 손벌리지않고 스스로 물질을 벌어서 자기 앞가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깊이 감사하고, 하나님의때에 저보다 더 은혜로운 간증과 메시지를 전하는 목자들로 변화시켜주시고 그길을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사 구원뿔 예수님을 이땅가운데 허락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저희가 이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두려움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일생 감당할수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