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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신년 1강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이사야 43:1-21)2023-01-02 04:26
작성자

2023 신년 1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말씀/ 이사야 43:1-21

요절/ 이사야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Happy New Year! 2023년 새 해가 밝았습니다. 새 해를 맞이하여 3주에 걸쳐 신년말씀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말씀으로 이사야 43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본문 말씀의 시대적 배경은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 포로로 끌려갔을 때입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한 것은 이 일이 일어나기 100여년 전이었습니다. 시편 137편을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마음의 슬픔과 아픔이 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1978 4인조 디스코그룹 보니엠(Bonny M)은 이 시편 137편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By the rivers of Baby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X2)

 

When the wicked carried us away in captivity

Required from us a song (X2)

 

Now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In a strange land (X2)

 

Yeah, yeah, yeah, yeah

 

Let the words of our mouth and the meditation of our heart

Be acceptable in thy sight here tonight  (X2)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스라엘은 오랜 역사 가운데 자연스럽게 생긴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 한 순간에 창조하신 나라입니다.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여 낳듯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 이스라엘을 낳으셨습니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가 낳은 자녀를 포기하겠습니까?

 

또한 1절에서구속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구속이란 redeem으로 값을 지불하고 어떤 것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제도를 통한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의 죄값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물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불 가운데 지나가는 것은 삶의 여러 어려움과 고난, 역경을 의미합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물 속에 잠겨 죽지 않을까, 불에 타서 죽지 않을까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거룩한 이요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대신할 속량물로 애굽을, 더 필요하다면 구스와 스바를 그들을 대신해 내어주십니다.

 

속량물이란 어떤 것을 사기 위해 그 값으로 지불하는 물건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나라도 크고 인구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을 속량물로 내 주십니다. 구스와 스바는 오늘날 이디오피아 지역입니다. 이 두 지역도 매우 광활하고 비옥한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약 애굽이 부족하다면 구스와 스바까지도 아낌없이 세트로 내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에 두려움이 있을 때 그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에 확실한 보장이 있을 때입니다. 사람이 강을 건널 때 넘실거리는 물에 빠져 죽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불을 지날 때 불에 타죽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처럼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어려움은 우리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와 구스와 스바까지 아낌없이 속량물로 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작은 나를 위해 그 크고 광활한 이집트와 구스와 스바를 아낌없이 내주시겠다니!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샬롬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고난, 불같은 시련에 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8:31-34)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속량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실 때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다면 이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지켜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8:35-39)

 

4-7절을 보십시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동서남북에 포로되어 흩어진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십니다.

 

8-13절을 보십시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 말씀은 하나님이 법정 재판을 소환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신이 진짜 하나님인지 법정 재판을 열어보자고 하십니다. 당시 이방 나라들은 바알, 아세라, 말둑 신 등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신으로 물질적 번영과 쾌락의 신이었습니다. 바알은 남자 신이고 아세라 여신인데 둘이 교합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들의 곡식이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둑은 바벨론의 신이었는데 여러 신들 중 최고의 권능과 지위를 가진 신이었습니다.

 

당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때 하나님보다 바알과 아세라, 말둑 신이 더 멋있어 보이고 권능이 있어 보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면 유흥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밤늦도록 포도주와 술을 마시며 육신의 쾌락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 당대 최강대국 바벨론의 말둑 신을 섬기면 시대를 앞서나가는 멋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은 존재감이 약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현재만 보지 말고 지나 온 역사를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기독교는 관찰과 연구를 통해 배우는 종교, 혹은 정진수도하여 도를 깨닫는 득도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동시에 체험의 종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보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깊은 곳을 내려가보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보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 특히 한 민족이나 개인의 구원에 관계하여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때가 되어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말씀을 통해 그 일이 가진 의미를 깊이 해석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때가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 양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정말 일어났습니다. 다시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해 그 사건이 가진 의미를 깊이 그리고 풍성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종교 가운데 이런 일을 행하는 신이 있는지 물어보십니다. 만약 정말 신이 있다면 그는 미래에 자신이 할 일을 미리 말씀하고 그 일이 이루어진 후 그 의미를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 종교 가운데서는 그 어떤 신도 이런 일을 행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이런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통해 예언하시고 그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14-17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제 하나님은 출애굽 때처럼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건져내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강대한 바벨론 제국이 최소한 몇 백년은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 되지 않아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 제국의 공격을 받고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바벨론 강가에 배를 띄워 날마다 파티를 열고 연회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나라가 망해 그 배를 타고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하게 될 것입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전 일, 옛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은 이집트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하고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태양이 캄캄해져 흑암이 임했습니다. 이집트 집안에 기둥같던 큰 아들이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들을 잃고 분노한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기 위해 뒤쫓아 왔습니다. 이때 시퍼런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바다 사이에 길이 생겼습니다. 이집트 왕의 군대는 전차를 몰고 그 길을 건너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 참으로 스펙타클합니다. 이 출애굽의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시편을 보면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위대한 출애굽의 사건을 결코 잊지 말도록 권면하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하나님은 이 위대한 출애굽의 사건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 일이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한 쪽에서는 과거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념하고 역사화하여 잘 기억하라고 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옛날 이야기, 라떼 이야기 그만하라고 합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출애굽의 사건을 다 잊어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애굽의 그 화려했던 장면들, 그 스펙타클한 모습들에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홍해바다를 가르셨던 하나님은 이제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실 것입니다. 사실 그 웅장함과 스펙터클함의 차원에서만 보면 새 일은에이 이게 뭐야하는 마음이 들고 시시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 때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대략 20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이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돌아오도록 한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의 수는 대략 5만명 정도입니다. 우리가 200명이 모여 함께 예배드리다가 5명으로 줄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굉장히 썰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또 출애굽할 때에는 홍해 바다가 문자 그대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출바벨론 할 때에는 문자 그대로 광야에 길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위험한 광야길을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서 안전하게 오게 된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 포로귀환한 이스라엘이 새롭게 재건한 성전과 성벽과 이전 성전과 성벽과 비교해 볼 때 몹시 초라해 보였습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기억하던 장로들은 새 성전의 초라함을 보고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외적인 화려함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새 시대에 행하시는 새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과거 출애굽의 그 스펙터클한 장면만 자꾸 생각하고 자꾸 그것과 비교하면 현재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을 놓칠 수 있습니다.

 

출애굽 때 20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은 숫자는 많았지만 사실 어떤 점에서 좀 훈련이 안되고 자발성이 떨어지는 점이 있었습니다. 노예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출애굽은 했지만 광야에서 조금 어려움이 있자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이에 비해 출바벨론한 이들은 숫자는 적었으나 자발적으로 바벨론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에게 틈만 나면 대들고 거친 말을 하고 반발심을 표현했습니다. 이에 비해 출바벨론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인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동역을 잘 했습니다.

 

우리 모임도 1961년대에 시작하여 황금기인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의 예자도 모르고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는 대학생이 성경을 공부하고 여름수양회 통해 예수님을 뜨겁게 만나 제자요 목자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불에 절대 타지 않는생나무가 타는 역사라고 했습니다. 뜨거운 열정과 열심으로 전세계 80여개국에 1,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성경을 10년을 공부해도 잘 변화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수양회를 몇 십번을 참석해도 늘 그 모습 그대로인 경우도 허다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 목자님들은 모였다 하면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예전에 그랬었지 하면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그런 역사가 있을거야 라고 서로를 격려하고 소망을 갖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무조건 선배라고 해서 쉽게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전처럼 조그만 방에 5명씩 함께 장막생활하며 훈련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한 사람의 개인적인 삶에 예전처럼 훅 들어가 방향을 주고 도울 수도 없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SNS에 올리거나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대는 변했지만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종로 2부의 정유석 형제가 오세아니아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양회를 참석하며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곳의 선교사님들, 또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며 느낀 점들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발표했습니다. 과거 늘 듣던 다소 정형화된 선교보고와는 달랐지만 자유분방하면서도 진솔한 보고에 신선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7부의 서민성 형제는 주일예배에 항상 1시간 전에 나와 말씀을 보고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합니다. 제가 목자생활하면서 1시간 늦게 예배 나오는 경우는 보았으나 1시간 일찍 예배 나오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지난 주 중학생 JBFer인 김아브라함 목자님의 딸 김은혜 2세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한 목자님이 요즘 2세들이 중고등학교 때에는 예배 잘 나오다가 대학생만 되면 잘 나오지 않는데 은혜는 나올거지 물었습니다. 그러자당연히 나오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감동이 가득했습니다. 아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2세들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는구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2세들의 마음에 이렇게 역사하시는구나 생각하고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은 겉으로 볼 때 작고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이것을 민감하게 캐취하지 못하고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을 민감하게 캐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에서는 과거 우리 모임 가운데 일어났던 뜨거운 역사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래 성경을 공부해도 잘 변화되지 않는 것 같지만 빙산이 조금씩 녹는 것처럼 그 마음에 변화의 역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자나 선교사로 결단하지 않지만 이웃을 위해 작은 봉사를 하겠다는 결단이 사실은 아름다운 성령의 역사인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023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어떤 새 일을 행하실지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