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출애굽기 8강
내가 시험하리라
말씀/ 출애굽기 15:22-16:36 요절/ 출애굽기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지난주 말씀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그러나 애굽 군사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으로 바다로 들어갔다가 물 벽이 무너져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애굽 군대의 파멸을 눈으로 보며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전능하신 하나님, 자기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충만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첫 여정지를 향하여 갑니다. 22,23절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홍해를 건넌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함을 받아 수르 광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백성들을 인도하셨는데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결핍이 있고 위험한 땅입니다. 한편으로 광야는 하나님을 깊히 만날 수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사랑하는 주님과 동행하는 하니문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의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성장하는 좋은 장소일 수도 있고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망할 수도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광야로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었습니다. 태양은 뜨겁고 가져온 가죽 부대의 물은 다 떨어졌습니다.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한 지점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야! 우물이다!" 사람들은 달려가 물을 길었습니다. 그런데 마셔보니 너무나 썼습니다. 퇘퇘! 뱉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쑥이나 씀바귀를 삶으면 그 물이 매우 씁니다. 약재로 그 물을 마실 때 꿀을 넣어 마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낙심이 되었습니다. "물을 찾았는데 마실 수 없는 쓴 물이라니!" 모세는 그곳의 이름을 마라('쓰다','괴롭다'라는 뜻)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24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여기서 '원망'한다는 말은 원어로 '룬'인데 '중얼거리다','밤새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백성들이 밤을 새워가며 불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일 전만 해도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구나, 우리 하나님 최고야!" 하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의 감격이 사라지는 데는 3일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물이 없는 문제에 부딪치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되었습니다. 물이 없는 이 문제를 가지고 지도자 모세와 상의하고 같이 해법을 찾아보고자 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쉽게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백성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25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에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모세는 이 문제를 들고 나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는데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곧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마실 수 있는 물이 된 것입니다. 이는 나무에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설사 나무 자체가 약간의 그런 효능이 있다하더라도, 그 나무 하나가 200만 백성을 마실 있는 양의 물을 달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나무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물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무엇을 하십니까?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25b) 하나님은 규칙부터 정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경험하게 하시고 법도를 주십니다. 억지나 강요가 아니라 은혜에 기초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를 도와주시고 나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는 것은 아직 성문화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법도로 주신 것입니다. 이는 26절에도 잘 나타납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그들은 애굽에서 법도와 율례 없이 살았습니다. 노예 백성으로 하루하루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공사장에서는 한 대라도 매를 덜 맞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예 백성을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빚어 가십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지기 위한 법도,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훈련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제한되거나 괴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유롭고 복된 삶을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의 물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그들에 대해 선한 마음이 있으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그들에게 애굽 사람에게 있었던 질병 중 하나도 내리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질병과 아픔이 내리지 않게 하시고 병이 들어도 치료하사 건강한 삶을 살게 하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담스런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병이 내리지 않게 하시는 분, 또한 질병을 치료하시는 분, 영육간의 우리의 주치의와 같은 분이십니다. 가족 중에 의사가 한 명 있으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건강이나 질병 문제를 미리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의사 중에 가장 뛰어난 의사이십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최고의 의사를 두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아무 병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엘림은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였습니다. 피곤한 여정을 마치고 오아시스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누워서 쉬는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백성들을 사랑하사 풍성한 물가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1-3)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선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 대해 선한 동기, 선한 목적을 갖고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때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16: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백성들은 첫 목적지로 시내 산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왜 시내 산으로 인도하시나요? 지난 출애굽기 3장을 기억해보시면, 하나님은 모세가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이 산(곧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신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출3:12)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백성들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자 하십니다.
엘림을 떠나 시내 산으로 가는 노중에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의 '신'(Sin) 광야는 나중에 나오는 가데스바네아 부근의 '신'(Zin) 광야(민333:36)와 다른 곳입니다. 본문의 '신'광야에 도착한 때는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 곧 2월 15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나온 날이 1/15 일이었으므로(민33:3) 꼭 한 달이 되는 때였습니다. 이제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광야 어디서도 양식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흘 굶으면 담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속담처럼 배가 고프니 감정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말합니다.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지난번 마라에서는 모세만을 원망했었는데 이번에는 아론까지도 원망하고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 과거 애굽에서 비참하게 종노릇하던 때를 미화시켜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었고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합니다. 지금 광야에서 이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자기들도 배부른 상태에서 죽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은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말입니다. 자기들이 애굽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모세가 그들을 억지로 나오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출2:23-25절을 보면 그들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이 출애굽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에서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물과 음식이 없어 죽게 하지 않으실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그러한 기초적인 믿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물을 주시고 양식도 주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도우십니다. 특히 일용할 양식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날마다 의지하도록 도우십니다. 4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한 것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다만 감당하여 주십니다. 시내산에서 정식으로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맺기까지 이들을 베이비씨팅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일용할 것을 거두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매일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 그들을 시험(Test) 하십니다. 하나님이 test 하시는 시험 문제는 이것입니다. "자, 새 아침이 되었다. 해 뜨기 전 지금 들에 나가면 양식이 있을까 없을까? 1번: 있다, 2번: 없다"입니다. 이 시험 앞에 정답을 못 맞추면 하루 종일 굶어야 되었습니다. "없다"라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양식을 찾아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험의 정답을 알고 들로 나가면 양식을 얻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양식은 땅에서 나는 것으로 다들 알고 있습니다. 씨가 뿌려지면 땅에서 싹이 나오고 곡식이 자랍니다. 채소나 과일도 다 땅에서 올라옵니다. 그것이 세상 상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십니다. 백성들이 땅에서 양식이 나온다는 세상 상식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들에 나갔을때 양식을 얻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3도 말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백성으로 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 훈련의 목적이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이 시험하신다는 것은 훈련하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반복하여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훈련이라고 하면 무슨 일을 잘못하여 책망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훈련은 어떤 일을 반복하여 연습하게 함으로 그 일에 익숙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피겨 스케이팅의 여왕으로 불립니다. 그가 은반 위에서의 춤추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어려운 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합니다. 손흥민 선수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른 발, 왼발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드리블하고 슛을 쏩니다. 이런 선수들이 이와 같은 자유를 누리며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동작대로 자유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청년은 주와 복음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만큼 몸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소감을 은혜롭게 쓰고자 결단은 했지만, 벌써 게임방에 와서 열심히 시간 보내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의욕을 갖고 한두 번은 할 수 있지만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은 훈련에서 나옵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사명인의 삶을 살고 싶어도 되지를 않습니다. 육신의 본성에 굴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훈련받게 하십니다. 그 훈련의 결과는 우리 각자에게 인내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은 그대로 훈련이 있는 편입니다. 양식훈련, 소감훈련, 목자훈련, 장막훈련, 메세지 전하는 훈련 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훈련하는 분위기와 시스템이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이런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악된 본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절제하며 인내하며 해야 될일을 해 내는 능력있는 사람들로 훈련하는 도구들입니다. 훈련되지 않는 병사는 전쟁에서 쓸모가 없듯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근성을 벗어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믿음과 품격을 갖추기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훈련을 해 나가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 훈련을 사모하며 연단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16:13,14절입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메추라기는 당시 아라비아 광야에서 유럽으로 철따라 이동하는 꿩과의 철새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메추라기가 저녁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에 날아와 앉도록 하시고 사람들이 나가서 잡아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 아침에 이슬과 함께 내렸는데, 이슬이 마른 후에는 만나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작고 둥글며 쌀가루같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1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사람들은 굵은 모래알만 한 그 쌀가루 같은 것을 보고 신기해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만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양식이 히브리어로 '무엇이냐'라는 듯의 '만'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70인역에서 헬라어로 '만나'로 번역되었습니다. What? 이것이 무엇이냐? 이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알 수 없는 하늘의 양식인 것입니다.
16절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만나를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한 오멜은 본래 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토기였는데, 점차 물건의 부피를 재는 단위로 바뀌었습니다. 대략 2.23리터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나가 대충 눈짐작으로 한 오멜씩을 거두어 왔는데 가져와서 오멜 도기에 넣어 재보니 아무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 먹을 만큼만 거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능력으로 간섭하신 결과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전혀 부족함 없이 각자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을 체험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사람들에게 그 가져온 만나를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쌓아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하루 하루 열심히 일해야 되었습니다. 일을 하면 바로가 하루 양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양식은 노동의 댓가로 바로가 주는 것으로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양식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아침에 들에 나가기만 하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하루하루의 양식을 위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한 내일 일을 내일이 염려하게 하는 믿음(마6:34) 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그 다음날에 양식이 혹시 내리지 않을까 염려하여 남겨 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남은 음식은 아침에는 벌레가 생기고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를 보존하기 위해 굽거나 튀기기도 하였을 것입니다.(16:23) 그래도 벌레가 생기고 썩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를 위해 남겨두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 백성들은 회개하고 다시는 남겨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두 오멜씩 거두었습니다. 이는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3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데 안식일이 서서히 형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기본적인 정신이 23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휴일, 즉 쉬는 날이요 여호와께 거룩한 날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처음 나오지만 “안식”이라는 말은 창세기 2:2,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고 7일째 되는 날을 성별하시고 그날에 창조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쁨으로 안식하신 날입니다. 이날에 인간도 기쁨으로 휴식하며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이 안식일의 제정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기쁨에 동참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안식하는 날입니다. 나중에 이 안식일이 유대 사회에서 율법화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여려 규례들을 만들어 안식일이 휴일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시며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막2:27) 이러한 안식일은 신약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 '주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위하여 두 오멜씩 거두어 하루치를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었지만 그 남은 것이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곧 욕심을 위해 남겨 놓았던 만나는 부패하였지만 안식일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은 부패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가 그것을 안식일에 먹도록 합니다. 안식일에는 나가도 만나를 거둘 수 없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습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사 만나를 오멜 항아리에 채워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도록 하십니다. 이는 대대 후손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친히 먹인 그 양식을 보고 믿도록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이 놀라운 기적은 후대의 우리들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만나 사건을 통하여 택한 백성을 살피시고 필요한 것을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는 단지 1개월만 백성들에게 내렸지만(민11:21),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약 사십 년 동안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만나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1-35) 메마른 광야 길을 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그 생명을 유지하였듯이 오늘날 인생들은 오직 하늘로서 오신 생명의 떡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참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그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 영적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반복하여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연약함을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쉽게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리고 현실의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심지어 떠나온 애굽을 사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힘써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훈련을 잘 받아 연단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참된 만나 되신 예수님을 날마다 먹으며 참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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