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여름수양회 2강 / 조전심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 / 마가복음 5:1-20 요절 / 마가복음 5: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우리는 어제 태초의 시간으로 산책을 다녀왓습니다. 어떠셨나요? 우리가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신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받아드릴 때 마치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처럼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힘있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방향이 없습니다. 상처로 고통합니다. 지치고 피곤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런 고통스러운 삶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여러분과 제가 그 답을 찾기 위해서 두 번째 산책 코스인 거라사 지방으로 떠나보겠습니다.
1,2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님도 방금 거라사 해변에 도착하셨습니다. 배에서 나오고 계실 때 한 사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풀어헤친 머리,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 상처로 뒤덮힌 벗은 몸! 그는 거라사 지방에서 유명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영어로 ‘with an evil spirit’입니다. 악한 영이 그와 함께 했다는 뜻입니다.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그의 삶이 어떠합니까?
첫째, 그는 무덤에서 지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많은 시체들이 안장된 동굴입니다. 보통사람이라면 무덤가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무덤가에서 지냈을까요? 악한 영이 그를 사로잡았을 때 그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와 관계성를 맺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는 사람있는 곳을 피해 자기만의 세계로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따듯한 가정과 사회를 등지고 아무도 없는 무덤가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는 자신을 제어 할 수 없었습니다. 3,4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쇠사슬로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미쳐 날뛰는 그를 미친개 취급했습니다. 짐승 다루듯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었습니다. 쇠사슬에 묶이자 그의 속에서 반발심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마치 그는 영화속 마블 히어로처럼 엄청난 괴력으로 쇠사슬과 고랑을 끊어버렸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산과 들을 마음껏 뛰어 다녔습니다. 괴서을 고래고래 질러도 시끄럽다고 야단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쇠사슬까지 괴력으로 깨버렸으니, 얼핏보면 그는 참 자유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한 영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쇠고랑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악한 영이 그를 사로잡을 때, 그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채 분노, 원망, 미움, 욕구불만에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그는 자학했습니다. 5절을 형제님들이 읽겠습니다. 시작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는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며 세상을 저주하는 온갖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못이겨 그는 결국 날카로운 돌을 집어들었습니다. 자기의 몸을 향해 미친 듯이 내리찍었습니다. 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된 무서운 괴물 같았습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 대신 악한 영이 함께 하였을 때 끊임없는 자기학대로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인격이 짓눌리고 파괴되었습니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악한 영에 사로잡히게 된 것일까요? ‘이 구역 미친놈은 나야나 나야나’(produce 101 패러디)이렇게 그가 처음부터 광인이 된 것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지옥 같은 고3 수험생 신분에서 이제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모든 정열을 불태어 열심히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별생각없이 들어와 맞이하게된 대학생활은 고등학생 시절의 연장선에 불과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보다 뛰어난 상대들과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왜 이 대학에 들어와 왜 이 공부를 하고 있는것인가? 턱밑까지 압박하는 사회 분위기와 유래 없는 취업난 속에서 ‘에잇, 공무원 준비나 할까?’ 머리가 아팠습니다. 모든 동기가 사라지고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나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일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수업만 끝나면 롤과 오버워치 경쟁전에 돌입하였습니다. 비록 내 인생은 언랭(unranked)이지만 게임에서 만큼은 마스터티어를 찍었습니다. 3테라가 넘는 외장하드에는 온갖 예능,영화,19금영상까지 새벽잠을 설치며 보아도 끝이 없었습니다. 홍대 클럽에 나가 필름이 끓길 때까지 마시고 클럽 T.O.P가 되어 대마에 원나잇까지 거침없이 즐겼습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 둘 본성에 이끌려 향락과 음란에 자신을 내어줄 때 이제는 이런 삶을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 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안에 내꺼인 듯 내꺼아닌 내것 같은 나들이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부조리하고 이기적인 사회가 싫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사회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을 때 그로서는 분노와 답답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루 하루 미칠것 같은 분노로 고래고래 소리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면도칼로 자신의 팔목을 긋고자 시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함께 6절과 7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멀리서 달려온 그는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도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원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관계 맺기 싫으면 멀리 떠나면 될 것을 굳이 해변까지 달려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사실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발견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사람을 먼저 발견하신 것이었습니다. 6절을 볼 때 예수님 도착하 해변과 무덤 사이의 거리는 꽤나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리시자마자 먼곳에서 들려오는 그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동네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귀신과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를 미워하고, 피해받지 않고자 멀리하였습니다. 몽둥이로 때리고 쇠고랑을 채우며 경멸하였습니다. “쯧쯧 쟤는 틀렸어” 그 사람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보고 소망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과 그 속에 역사하는 귀신을 분리하여 보셨습니다. 그의 영혼을 파괴하고 그의 인생을 짓밟아버린 장본인을 알아 보셨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귀신만 쫓아내면 하나님 앞에서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사람에게서 이름을 물어보십니다.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며 강하게 버티는 귀신에게 더 세게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름을 물어 보셨을까요?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첫째,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귀신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합니다. 그 정체가 드러나면 더 이상 그 사람안에 숨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외부적인 원인 때문에 이 사람이 미쳐버린 것처럼 속이고자 합니다. 우리가 죄에 반복하여 넘어지는 이유는 악한 영이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죄에 사로잡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반복되는 실패와 심해져 가는 죄의 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신은 내 약한 의지를 탓하게 하다가도 어느덧 스스로 합리화 시키고 자신에게 더 이상 그런 죄문제가 없다고 속입니다. ‘이게 뭐가 나뻐?’ 계속 죄안에 머물도록 유혹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심으로 그 사람안에 더 이상 거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잃어버렸던 그의 본래의 자아를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전 인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물으신 것은 자신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으며 지금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거라사인은 귀신들려 자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무덤 사이에서 소리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한 것은 그의 속에 귀신이 들어갔기 때문이지 본래 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내면에 역사하는 귀신의 세력 때문에 원치않게 괴성을 질렀습니다. 사납고 흉측한 맹수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겉으로 볼 때 분노 ,미움으로 반발하며, 누구와도 관계성을 맺지 않고자 하였지만 속으로는 그 누군가가 자기에게 찾아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 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분명히 있는 참된 자아와 거룩한 영적 소원을 보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쳐다보기에도 부담스러운 미치광이, 정신병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거룩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본래 이름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질문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는 이 질문 앞에 내안에 나를 고통의 길로 이끌고 있는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본래 이름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나를 사로잡아 고통하게 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이 그의 이름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남을 주체를 못하는 교만과 자뻑이 그의 이름입니다. 누구는 정욕과 음란, 누구는 출세욕과 명예욕, 누구는 ‘yo, millionaire’ 물질욕이 그의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참된 자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내 소유와 외모, 세상명예 등 인간조건에만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알고 있는 ‘상대적인 나’를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고귀한 나의 이름을 되찾을 때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가치 있고 귀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다함께 9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님의 질문에 귀신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었습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군대'란 레기온(Legion)으로 즉 군인 4000~6000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을 말합니다. 이를 볼 때 이 사람 속에 수천마리의 떼귀신이 들어가 주인행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정체가 드러난 귀신들은 더 이상 그 속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멀리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고는 돼지떼에게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그들은 즉시 돼지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2000마리의 돼지때가 ‘꽥’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바다로 달려가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돼지때를 한순간에 미쳐 날뛰게 하여 몰살시켜버린 때귀신들이 이 한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으니 인격이 짓눌려 버린 그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귀신의 세력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돼지 2000마리를 희생하심으로 한 영혼을 살리는데는 큰 희생이 필요함을 깨우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포기해버린 한 사람을 위해 돼지때의 희생도 아랑곳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비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이에 귀신들렸던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귀신이 떠나자 그는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짐승과 같이 미쳐 날뛰던 그가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얌전히 앉아 있었습니다. 실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7절을 자매님들께서 읽겠습니다. 돼지 2000마리가 떼 죽음 당한 사실에 기겁을 하고 예수님을 서둘러 그 지방 밖으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돼지 한 마리에 60만원 정도라고 볼때 돼지때 2000마리는 12억에 달하는 재산에 해당하였습니다. 이 재산이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그들이 볼 때 쓰레기 같이 무쓸모한 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돼지 2천마리를 희생시키신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에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물질주의 귀신에 깊이 병들어 한 영혼의 가치를 돼지 2천마리보다 못하다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도 한영혼의 가치보다 물질을 더 귀하게 여기는 물질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한사람을 돕는데 귀한 시간과 물질을 쓰느니 차라리 그것으로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보다 좋은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을 SNS에 자랑하는 것을 낙으로 여깁니다. 부동산 투자와 재테크를 통해 내 자녀들 교육여건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다 어느날 조금이라도 희생하고나면 의를 내세우고 피해의식을 갖는 병든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한 영혼을 어떠한 자세로 섬겨야 하는가 몸소 보여주십니다. 한 영혼이 많은 물질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시고 십자가 사랑으로 섬기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영혼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고 희생하는 목자가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정신이 말짱해진 거라사 청년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말씀에 반발하며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던 자가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청년의 간절한 부탁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그가 감당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1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세상은 그가 미워하고 저주할 곳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의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가 가족들에게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그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과거 제 이름은 중독이었습니다. 저는 대학 입학 후 자기주도적인 대학생활을 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같았습니다. 수업은 재미가 없고 미래는 깜깜하였습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싶었는데 별볼일 없는 자신의 모습 앞에 절망이 되었습니다. 깊은 허무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매일 어두운 기숙사방에 박혀 음란물을 보고 게임을 하였습니다. 새벽 4시에 졸면서 키포드에 침을 뚝뚝 흘렸습니다. 룸메이트들이 방에 없으면 음란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하였습니다. 정말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참함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기숙사로 돌아와 마우스를 세차게 흔들고 있는 모습은 저로서는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삶이 일상이 되었고, 삶에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죽어가던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은혜로 1:1 말씀공부를 통해 찾아오셨습니다. 거의 1년 동안은,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극심한 반발심으로 몇 시간동안 눈을 부릅뜨고 일대일 목자님께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목자님과 일대일 하는 와중에도 시옷 비읍이 없이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이런 저를 인내해주시고 끝임없이 말씀 중심적인 일대일을 감당해 주신 목자님을 통해 조금씩 말씀이 제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은 저의 삶을 전반적으로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공부 할 때마다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실낫같은 희망이 저에게 비추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동아리방문을 열고 나가면 전과 다를 것 없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을 느끼고 말씀 공부를 그만두고자 하였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 맘데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 때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같았는데 실상은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병든 삶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주의에 더욱 깊이 병들었습니다. 더 큰 정죄감과 자괴감에 괴로워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경말씀을 배우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공부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소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2006년 참석한 여름수양회에서 한 목자님의 진솔한 소감을 통해 제 마음이 찔리게 하셨고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작은 결단을 할 때 목을 옥죄던 비교의식과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들어간 장막에서 혼자 방바닥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새처럼 흔들며 자유를 만끽하던 그 기쁨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현재적으로 저는 영육간의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파견을 간 곳에서 매일 새벽2시까지 일하는 워커홀릭 교수님이 훈련관이 되어 매일 같이 일거수 일투족 체크받고 보고하는 하드라이프를 살게 되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다보니 수많은 회의와 생각 가운데 출세와 성공가도를 달리고 싶어하는 시꺼먼 마음만이 남았습니다. 어떻게든 좋은 실적을 내어야 한다는 집착과 하루하루 미친 듯이 돌아가는 일정 속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모임에 불어닥친 일련의 사건들은 힘이 빠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실까 하는 소망에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실 수 있겠는가 하는 불신으로 변질 되었습니다. 영육간에 치고들어오는 끝없는 회의와 절망감, 무력감 앞에서 저는 거라사 광인과 같이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심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의 정체를 명확히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성을 맺지 못하게 하는 세상명예욕과 소시민적인 이기심을 본연의 나와 분리시키십니다. 그리고 회복 시키십니다. 제가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의 은혜, 구원의 은혜안에 더욱 깊이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주하게 된 위기를 기회로 여기고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은혜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귀신의 세력에서 온전히 자유해진 거라사 청년처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알고 나에게 큰일을 행하신 것을 전파하는 사명인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거라사 산책을 마쳤습니다. 왜 우리가 방향을 잃고 상처로 고통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영적 실체인 악한 영과 죄가 우리의 고귀한 인생을 추하고 더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회복을 원하시며 간절한 목소리로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물음 앞에 우리 각자가 진실된 대답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와 악한 영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며 고귀한 인생으로 회복된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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