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회

제목2018년 봄맞이 수양회 주제 1강 (삼상18~20장)_다윗과 요나단의 사랑2018-02-26 16:47
작성자

봄맞이 수양회 주제 1강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

말씀: 삼상18~20장

요절: 삼상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1989년에 돌아가신 기독교 시민운동가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란 시가 있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진실한 친구를 얻기를 원합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특히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의 세계에서 친밀한 친구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사랑으로 으뜸가는 사랑은 본문의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입니다. 이들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진실되고 아름다운 형제 사랑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요나단은 어떻게 자기 생명같이 다윗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까? 이 시간 다윗과 요나단이 나눈 그 숭고한 사랑을 배워 우리도 형제간에 깊고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1.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 된 요나단(18장)

17장에서 다윗은 골리앗에게 믿음으로 도전했습니다. 사십일 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원수 골리앗은 다윗의 물매돌 한 방에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승전하여 돌아오는 다윗을 볼 때 요나단의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전기가 통하듯 마음이 통했습니다. 18:1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어떻게 이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까요? 요나단은 두려움을 모르는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믿음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격려하고 기도하고 함께 도전할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장에서도 혼자 적진에 쳐들어갔습니다. 그는 참으로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나를 가지고 골리앗에게 도전해서 용감하게 쓰러뜨렸습니다. 이를 보는 요나단은 전율했습니다. 자기도 골리앗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고 있는 상황 가운데 보게된 이런 다윗의 믿음과 용기, 도전이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다윗을 보자 기뻤습니다. 그는 다윗을 깊이 인정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서로 통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때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세상에 자기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에게는 다윗이 자기의 생명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요나단은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사람을 대하듯 온 마음과 진심으로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면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무엇을 했습니까? 

첫째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친구 삼기로 서로 결심하고 약속한 것입니다. 이들의 우정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약속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가족조차 잘 알아주지 않는 어린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사람과 친구의 언약을 맺다니 자존심 상합니다. 요나단은 왕자이니 나를 따르라고만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겉모습이나 인간조건보다 다윗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보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언약했습니다. 


둘째로,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선물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입고 있던 겉옷과 군복, 칼과 활, 띠까지 모두 주었습니다. 요나단의 겉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는 명품 중의 명품, 왕자의 옷입니다. 이것을 다윗에게 준다는 것은 그가 왕자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 정도로 다윗을 인정했습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요나단의 선물공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이 가지고 있던 칼은 이스라엘에서 왕과 왕자 두 명만 가지고 있던 가장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칼과 나머지 무기까지 송두리째 주었습니다. 전쟁에서 자기의 무기를 다 내어주다니 마치 자기의 생명을 내어준 것과도 같습니다. 왜 요나단은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왜냐하면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와 같이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이것이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요나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보다 훌륭한 다윗을 친구 삼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상대하지 못하던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의 공이 너무 커서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았습니다. 왕자인 요나단은 마땅히 이를 경계하고 시기하고 그가 더 이상 뜨지 못하도록 미연에 싹을 잘라야 했습니다. 실제로 역사상 많은 왕들이 떠오르는 정적 제거를 위해 가족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다윗을 얻기 위해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친구 삼는 것이 쉽지않습니다. 자매님들은 미팅 때 꼭 자기보다 못한 친구를 데리고 나갑니다. 그래야 자기가 더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훌륭한 친구는 나를 깍아내리기 보다 더 돋보이게 합니다. 오히려 친구를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어떤 것을 주더라도 친구 삼아야겠습니다. 


우리의 곁에 요나단과 다윗처럼 진실하고 마음이 통하는 믿음의 친구가 있습니까? 진실한 친구를 얻기를 원합니까? 내가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믿음의 친구를 얻기를 원합니까? 내가 먼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도 누군가를 친구 삼고자 한다면 자신의 귀한 것을 먼저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을 배워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귀하고 진실한 친구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둘 간의 인간적인 장벽을 넘어 진실한 친구의 우정을 맺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벽은 사울의 존재였습니다. 사울은 언제부터 다윗을 주목하여 보기 시작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다윗이 또 다시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온 백성들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 군대를 맞아 환영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탄 마차가 선두에 서고 다윗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여인들이 나와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춤추며 노래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다윗 만세!! 사울은 그 말에 심히 노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사울은 시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윗을 노려보았습니다. 다윗 이 놈! 어디 두고보자! 그 날 이후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한 다윗은 어디를 가든 지혜롭게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더욱 다윗을 미워하며 두려워 하고 평생에 대적이 되었습니다. 사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시기심이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르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기심을 회개하지 않을 때 그 시기심은 미움을 낳고 미움은 장성하여 살인죄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그 시기심이 자기를 향한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 때 사울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나단의 하나님 중심적인 사랑을 배워 우리 주위의 훌륭한 믿음의 동역자들을 친구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자기 생명 같이 동역자들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시련 속에서 꽃피는 요나단의 사랑 (19, 20장)

19: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사울은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비록 왕자라 하더라도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목숨마저 위태로운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다윗과 요나단의 아름다운 우정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렵고 힘든 위기의 순간,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더욱 빛을 발하였습니다. 


그러면 요나단은 위기에 처한 다윗을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요나단은 왕의 명령을 어기고 다윗을 은밀한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나아가 다윗의 무죄함을 변호했습니다. 이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동입니까? 사울은 여러 번 다윗을 창으로 던져 죽이려 할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윗을 공개적으로 죽이라고 모든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이런 사울의 의도를 거스르는 행동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20장에서 요나단이 두 번째로 다윗을 옹호하는 말을 하다가 그 자신이 사울이 던진 창에 목숨을 빼앗길 뻔하기도 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생명을 걸고 사울에게 나가 다윗을 변호했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버려 외로울 때, 목숨을 걸고 내 편에 서줄 수 있는 한 사람의 친구,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다윗은 사울을 피해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도망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로 중의 원로인 사무엘이라면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기까지도 쫓아와서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답답하고 무서웠습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죽을 것만 같은 공포와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다윗은 왜 이렇게까지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울이 정말 자기를 죽이고자 결심했는지, 정말로 탈출할 방법이 없을지 알고 싶었습니다. 


20:1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다윗은 이런 고민을 요나단에게 풀어 놓습니다. 이제 요나단은 다윗이 가장 힘들 때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진실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자신의 속생각을 다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할 수 있습니다. 또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그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요나단을 믿기 힘듭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에게 자신의 모든 괴로움을 토로하고 겸손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신뢰의 근본에는 먼저 요나단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힘든 다윗을 감동시키고 그 마음을 열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으면서 둘 사이에는 비밀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을 열고 얘기하고 이를 듣고 도와주면서 둘의 우정은 더욱 견고해져 갔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형제가 어려울 때 진심으로 그의 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현재 어려움을 당한 형제들이 있습니까? 진심으로 그들의 편이 되어 귀기울여 주고 그들의 어려움을 보살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4절을 보십시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요나단은 다윗의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잘 이해하고 돕고자 했습니다. 마침 다음날은 초하루였기 때문에 다윗도 반드시 참석해서 왕과 함께 식사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때 의도적으로 자리를 비우고 사울이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요나단에게 살펴달라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의 심중을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부탁하면서도 한편으로 과연 이 힘든 일을 요나단이 해 줄 것인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요나단은 다윗을 들로 데리고 가서 이를 반드시 알게 해주겠다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격려하고 축복하며 오히려 다윗이 자신을 돌봐주도록 요청합니다. 현재 다윗은 왕에게 쫓기는 현상수배자이고, 요나단은 권세를 가진 한 나라의 왕자입니다. 또한 다윗은 언제 죽을지도 알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은 왜 다윗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지금은 쫓기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왕으로 세움 받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책임자가 되고 내가 최고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세움을 받고 그를 통해 역사가 일어나면 겉으로는 기뻐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기분이 매우 안 좋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조금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23:17절에 보면 그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자기는 그 다음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사실 때문에 슬퍼하거나 불의에 빠지지 않고 잘 영접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좇아가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환난에 처한 다윗을 위로하고 힘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맹세케 하고 그 우정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의 마음 가운데 있는 일말의 불안감마저 없애고자 도왔습니다. 요나단은 진실로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왕 자리를 희생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스파이 노릇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다윗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다윗이 위기 가운데 있을 때 요나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끝까지 돌보고 사랑했을 때 다윗은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나단의 사랑을 받고 성장한 다윗을 통해서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그 공동체는 사랑을 통해 완성되고 이루어져 갑니다. 우리 모임이 주님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로 온전히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요나단은 마침내 다윗을 정말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이를 알고 너무 화가 나서 왕의 식사 자리도 박차고 떠났습니다.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도 요나단은 자기가 욕을 듣고 자존심이 상해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보다도 친구 다윗을 욕되게 한 사실 때문에 슬퍼했습니다(34). 이제 요나단은 들로 나가 사울의 의중을 알려주고 다윗이 도망가도록 하였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 때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었습니다. 이는 그가 요나단의 사랑에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순수하고 진실 되고 희생적인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후에 요나단이 전사했을 때 다윗은 그의 사랑을 삼하 1장 26절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기이하다는 말은 기적 같다는 말입니다. 정말 요나단의 사랑은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이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요나단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가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이 사랑의 샘이 되어서 흘러 넘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되어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나단이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불의한 아버지보다 의로운 다윗 편에 섰습니다. 왕의 보좌보다 다윗과의 우정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자기생명처럼 다윗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두 친구의 우정이 어떻게 그토록 아름답고 영원한 사귐이 되었는지 깨닫습니다. 그들의 사귐은 하나님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이에 둔 사귐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매개체로 사귀는가 하는 것은 그 사귐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술이나 사업, 공부나 취미를 위해 사귈 수 있습니다. 이런 사귐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하고 오래가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귀게 되면 순수하고 진실하고 변함없는 영원한 사귐이 됩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사귐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우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의 자손 가운데서도 영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진실한 친구의 우정을 나누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형제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사랑하고 싶지만 어느새 원치 않게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넓은 마음을 품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하려고 결단을 해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면 어느새 마음이 딱딱해집니다.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거룩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 어떤 사람도 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다. 로마서 5: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요나단과 같이 거룩하고 진실 된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요15:13).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친구 삼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사랑을 가지고 다윗과 요나단과 같이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라도 우리 모임을 통해 그 사랑에 감동 받고 살아나는 사랑의 공동체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요나단이 되어서 내 옆의 한 형제를 다윗과 같이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사람들은 88 꿈나무 학번이라며 저희 학번을 특별히 생각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학에 들어왔지만 별 꿈이 없었습니다. 저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오지 못한 실망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꿈이 없었던 이유는 인생의 깊은 허무로 내면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난한 집안 환경에서 자라 오면서 없이 사는 사람들의 슬픔과 무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커 가면서 심해졌던 주근깨 투성이 얼굴에 여자처럼 하얗고 털 없이 미끈한 피부로 인해 열등감 또한 깊었습니다. 청소년 때부터 은밀히 행하던 정욕 행위는 알 수 없는 죄의식으로 더욱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저는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런 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어두운 내면을 들킬까봐 아무에게도 이런 저의 말못할 내면의 어두운 문제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대학에 들어 왔지만 외롭고 어두웠던 저를 환한 미소로 반겨준 분이 저의 첫 1:1 목자님이셨습니다. 신체검사 날 목자님은 웃으며 설문지 하나를 내미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일대일 성경공부가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목자님과의 창세기 말씀 공부는 제 어둡기만 했던 과거의 인생에 하나님의 밝은 섭리의 빛이 비추게 했습니다. 그동안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심히 기뻐하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 둘 씩 깨닫게 되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으로 인해 어두웠던 제 마음 속에도 빛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잊을 수 없는 천마산 여름수양회에서 저의 연약함과 슬픔 저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다가와 그 손을 내미시며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으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저를 20년간 꽁꽁 묽어두었던 모든 연약함과 운명주의와 허무와 죄에서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소감을 쓰며 저의 내면에 쌓아두었던 모든 아픔과 부끄러운 죄를 예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저의 심령을 새롭게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천마산 수양관 옆에 흐르던 시냇물로 달려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씻었습니다. 뿌옇던 눈이 맑아지고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주변의 푸른 나무 하늘을 떠가는 흰 구름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제 영혼이 거듭나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된 순간입니다. 운명적이고 슬프게 보였던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섭리로 바뀌었습니다. 상처 많고 연약했던 내면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연약했던 저를 많은 목자님들이 사랑으로 감당해 주셨습니다. 관악 5부의 나요한 목자님은 매주 깊이 있는 일대일 말씀공부로 영육간에 어린 저를 양육해 주셨습니다. 학과 공부를 제대로 감당 못해 장래 염려로 늘 두려워 하던 제게 목자님께서 체험하셨던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주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신의 아버지 보다 더 제 장래를 위해 노심초사 하시며 돌보아 주신다고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종로1부 시니어 목자님이셨던 정아브라함 목자님은 부장판사의 높은 신분이셨지만 제가 뭐라고 겸손히 낮아져서 사랑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평신도 목자가 되어 첫 목자 소감팀에 나오던 날 큰 케익을 사오셔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학생 시절 저는 수원 율전동에 있는 성대 자연과학 캠퍼스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목자님들이 많았던 명륜 캠퍼스와 달리 외롭게 캠퍼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제게 장막생활은 믿음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은혜였습니다. 첫 장막생활 때 만난 분들이 뉴욕에 계신 남안드레 선교사님과 종로7부의 이어거스틴 목자님, 관악3부의 김윤수 목자님, 북악1부의 윤마가 목자님, 박길명 목자님이었습니다. 서로 캠퍼스도 다르고 부도 다르고 학년도 다르고 성격도 각양 각색이었습니다. 남안드레 선교사님은 여성스러우면서도 사나이 같은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이어거스틴 목자님은 귀공자 같았습니다. 김윤수 목자님은 샤프했고 윤마가 목자님은 똘똘했습니다. 막내 박길명 목자님은 열 다섯 살 소년처럼 순박했습니다. 3평 남짓 비좁은 방에서 거의 붙어서 잠을 자고 한끼 1500원 밖에 안되는 서빙비였지만 부족한 줄 몰랐습니다. 세상에서는 마음 열고 대화할 한 사람의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지만 우리 모임 안에서는 많은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함께 1학년 때부터 마태팀에서 소감모임을 이루고 성장한 안양센터의 양원훈, 새수원의 김회석, 사우디의 박반석 선교사님들은 지금까지도 깊은 우정을 나누는 믿음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도 종로1부 가운데 많은 영적 친구들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귀한 요나단과 같은 귀한 믿음의 친구들이 없었으면 제가 이렇게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요나단과 같이 저를 아껴주고 사랑해준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와 같던 저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을 생각할 때 감사를 드립니다. 그 사랑과 섬김으로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약하던 저를 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무기력하던 저를 활기있고 생명력 넘치게 해주셨습니다.  제 안에 부워주신 넘치는 주님의 사랑은 자기 하나 감당 못하던 저를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목자로 지금껏 살아오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를 향한 주님의 크신 사랑을 인하여 이 시간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러나 최근의 저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바쁜 직장 일로 인해 동역자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기 일만 감당하며 근근히 살아왔습니다. 무엇보다 나의 주 예수님께 개인적으로 나아가는 생활이 빈약해져감에 따라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이 메말라져갔습니다. 동역자들에 대한 저의 사랑도 메말라져갔습니다. 제가 이를 애통히 회개합니다. 제가 먼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은혜에 힘입어서 동역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희생적 사랑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런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십자가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운바 될 때 우리도 형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에서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모임이 주님의 이 온전한 십자가 사랑 안에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다윗과 요나단 같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로 빚어지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이 주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캠퍼스에서 외롭고 힘든 길 가는 영혼들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