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신년 1강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세우심을 입었노라 말씀 / 디모데후서 1:1-18 요절 / 디모데후서 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1절은 바울의 확신이자 고백입니다.
이는 디모데후서에만 나오는 특별한 고백은 아닙니다. 그의 서신을 받는 성도들 중에 그가
선포자요 사도요 교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디모데는 더 잘 압니다. 그런데 그는 왜 이 고백을 특별한 고백처럼 하고 있을까요? 일이
잘 풀릴 때는 내가 누구인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려움이 생기면
내가 누구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공부가 잘 되면 내가 누구인지 잘 생각하지 않다가, 공부가 안 되고 시험에 계속 떨어지면 내가 수험생이 맞는가, 내가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가, 내가 누구란 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의 정체성에 도전을 받습니다.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라는 말을 한마디로 목자라고 해봅시다. 바울이 자신이 목자라고 얘기하는 것은 사실 디모데 너도 목자임을
잊지 말도록, 그의 정체성을 정립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목자라면
양을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양도 안 쳐지고 업신여김을 받는 분위기만 지속된다면 내가 목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정체성에 관해 의심이 듭니다. 현재
디모데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결국 그것이 큰 일을 해내기 때문입니다. 이십여년 전 IMF 시절에 온 국민이 금모으기에 너도나도 동참하였습니다. 금반지만
아니라 금이빨까지 들고나왔습니다. 전세계는 1년만에 IMF 빚에서 탈출한 한국을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아낌없이 기부하도록 하는 그 힘은 바로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그 정신이 우리를 현재 세계 경제대국이요 일류문화국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신앙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체성은 가볍게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것을
신앙적으로 우리는 '부르심' 혹은 '소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러 행위나 의식에 대해서는 주제로 많이 다룹니다. 그러나 정체성에 대해서는 주제로 다룬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시간 본문을 통해 나에게 정체성이 있는지,
어떤 정체성이 있는지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정립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인사할 때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기 뜻을 가지고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의 '사'자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순식간에 고꾸라졌고 눈이 멀었고 인생의 바닥을 쳤습니다.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고 눈에 비늘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전에 그는 바리새인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베냐민의 지파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었고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고는 그 정체성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였습니다. 그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새사람이 되는 데에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9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정체성을 풀어쓴 구절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목자가 된 것은 오직 자기의 뜻, 곧 하나님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목자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잘 안 해보셨겠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고 목자라는 의식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거기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뜻과 예수님이 주신 은혜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사치레의 말이 아닙니다. 은혜,
긍휼, 평강이라는 단어를 다 사용해서 문안 인사를 하는 경우는 디모데 전후서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에 대한 간절함, 애정, 안타까움이
들어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서 뭣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감옥에서 뭘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뒤에 가면 겨울이 오기
전에 옷과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식이 정말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도와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못할 때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에게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 주위에는 연말이 되어도 상황이 녹록치 않은 분들, 사랑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향해
거룩한 손을 들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도합시다. 3절을 보면, 바울은 밤낮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를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겠죠. 디모데만 생각하면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는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여린 점이
있지만 마음과 정서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교회 생활하는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순수한 척하면서 뒤에서는 다른 짓을 한다면 거짓된 믿음입니다. 믿음을 무슨 부적이나 백지수표처럼 이용해서
욕망을 채우고자 한다면 거짓된 믿음입니다. 거짓된 믿음은 우상숭배입니다. 눈물이 있고 순수한 사람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만 생각하면
감사가 절로 나오고 기뻤습니다. 속히 보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현재 2차 투옥이 되었고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보고 싶은 사람이 진짜 동역자고 친구고 가족일 것입니다. 우리에겐 그런 동역자가 있습니까? 우리는 어려움에 부닥친 자에게 디모데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누군가가 보고 싶어하는 디모데로 빚어지길 소망합시다. 이렇게 소중한 디모데인데 지금 움츠러들어 있습니다. 그의 은사는 식어
있었고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추측해본다면, 그는
나이가 어려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딤전 4:12절에 나옵니다. 네가 어리다고 무시 받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바울의 말이 나옵니다. 현대는 30대의 나이에
당 대표가 되기도 하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엔 나이가 어리면 인정받기가 힘들었습니다. 명색이 에베소 교회 책임자인데 어린애 취급을 받으니 마음이 많이 다운된 것 같습니다. 딤전 5:23절을 보면 위장이 안 좋고 병에 자주 시달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면역력이 약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위장이 안 좋아지는지 경험적으로 다들 아실 겁니다. 8절부터 뒤를 보면 목자의 삶이 너무 고난이 많은
것을 디모데는 보았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바울 스승님도 여전히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아시아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바울을 버린 것도 보았습니다. 이런 아픔들을 보면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책임감,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자신, 그리고 앞에 놓인 사역에 대한 고난을 생각하니 위가 빵구가 안 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디모데의 상황이 비단 디모데만의 상황이겠느냐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디모데가 교회에 대한 책임감에 눌렸던 것처럼 우리는 가정과 직장과 사역에 대한 책임감에 눌립니다. 디모데가 비난받았던 것처럼 나도 미성숙하여 본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20대는 20대로서 공부와 취업 때문에, 30대는 30대로서 직장과 결혼 때문에, 4,50대는 4,50대로서 자녀교육과 은퇴 후 준비로 뚫고 나가야 할 고난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러면 위는 쓰리고 소화는 안 되고 고개와 함께 면역력은 떨어지고 속으로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려고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너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내가 너의 생각을 소환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하지 못하니 내가 끄집어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문제 앞에서 얼어붙으면 생각이 마비됩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무엇을 했었는지 다 잊어버립니다.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슬럼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이 들어가면 평소에 자연스럽게 되던 것이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배트에 딱딱 맞던 공이 하나도 안 맞습니다. 차면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던 공이 계속
골대에 맞고 포스트에 맞고 안 들어갑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원래 어떤 촉망받던 선수였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 기간을 지속하는 것이 슬럼프입니다. 그땐 누군가가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넌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넌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내가 알지"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디모데, 네 속에는 하나님의 은사가
있어. 안수받을 때 받은 은사를 생각해봐. 그거 다시 불같이
활활 타오를 수 있어!" 디모데에게 은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다만 발휘되지 않고 영적 슬럼프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있습니다. 고전 12장을 보면 누구는 가르치는 은사, 누구는 섬기고 봉사하는 은사, 누구는 병 고치는 은사, 누구는 능력 행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은사는 이것
말고도 다양합니다. 우리나라에 8천개가 넘는 직업이 있다는
것은 은사의 다양함을 나타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내 은사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은사가 없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디모데는 자기에게 주신
은사에 집중하며 그 은사를 적극 개발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은사를 망각하게 하고 잘 피어날 수 있는 불씨를 꺼트립니다. 창세기 3장을 볼 때 두려움은 죄에서 생겨난 것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에서 불안이
나오고요 원망과 피해의식도 나옵니다. 망상과 현실의 왜곡, 고집, 회피, 억압, 그리고
과장까지 다 나옵니다. 우리가 배웠지만 민14장에서 정탐꾼들이
가나안 족속을 아낙자손이라고 하고 자기들을 메뚜기라고 하고 울고 원망하다보니 모든 은사가 다 꺼져버렸습니다. 싸울
수 없는 오합지졸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능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담고 있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것을 부어주셨습니다. 은사를 발휘하려면 능력이 있어야죠. 저는 황제이콥 목자님을 보고 대화를 할 때마다 이 분이 참 능력이 많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인생소감에 항상 두 자릿수 아이큐 때문에 운명주의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너무나 말이 안되는 소리죠. 아이큐 테스트는 원래 재능을 알아보기 위해 만들어진 시험지가 아니라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시험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폐기처분해야겠습니다. 저는
황제이콥 목자님이 가진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은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니죠. 은사가 있으면 능력도 있는 것이고, 능력이 있다면 은사도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도 능력이 있었고 그것이 책임목자로 안수를 받을 때 모든 사람들 앞에서 드러났습니다. 그에게는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능력이 있었기에 에베소 교회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을 이루시고자 각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능력있는
부모를 만나야 능력이 생긴다고만 생각하면 너무 슬픈 일입니다. 어떤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갖춰야만 능력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운명적입니까? 조건과
환경을 초월해서 나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기를 기도합니다. 사랑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사랑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고 내 마음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바울은 고전 12:31절에서
더욱 크고 가장 좋은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맺게 해주시는 첫번째 성령의
열매입니다. 모든 상황은 사람과 일로 구성됩니다. 사람과
일이 관계를 맺어 생활이란 것이 만들어지고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일을 감당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사람을
감당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많은 분들이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사랑으로만 풀릴 수 있는 대인관계의 문제를 위해 하나님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절제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중독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게임 중독, 약물 중독, 성 중독, 일 중독, 재물
중독, 심지어는 종교 중독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중독이란
절제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게임이 놀이가 되는 사람과 중독이 되는 사람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게임을 하다가 학교 갈 시간이면 학교를 가야 합니다. 업무를 감당해야
할 시간이면 바로 업무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고 게임 때문에 학교를 지각하고 업무를
망치면 중독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즐기든지 빨리 빠져나오고, 또
빨리 몰입해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잘 적응하는 삶, 그것은 절제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갖춘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야
너는 내가 주를 증언하고 또 증언하다가 갇혔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셨다면, 그 능력은 감옥에서도
나타날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을 주셨다면 그 사랑은 나를 가둔 자들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날텐데 뭐가
문제가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저런 처지에서도 다 나를 신속하게 적응시킬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자신에게 주신 능력을 더 크게 체험하고 자신에게 부으신 사랑을 더 크게 드러내는 기회이지 망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복음을 븥들고 산다는 것이 고난은 맞지만,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며 주신 은사를 더 불일 듯하게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바울에겐 이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고난 앞에서 이런 확신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이러하니, 고난은 바울의 정체성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주변에서 흔들면 흔들수록 바울의 정체성은 더 단단하고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확신이자 고백이 11절입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선포자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복음 사역을 위해 예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교사는
설명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때로는 복음을 선포하고 때로는 가르쳤습니다. 특히 자신은 이방인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도구임을 확신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정체성이 고난을 통해 갈수록 확실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신학자는 말씀과 기도가 있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필요한 요소는 고난이다. 신학자는 고난으로 완성된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12절에서 고난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자기가 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너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내가 전해준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 곧 복음을 사수하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버리면 고난을
받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을 버리는 것이 되고,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복음을 붙들면 고난은 받는데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구원과 은혜를
받습니다. 그 삶을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그러면 정체성은
더 날카롭고 견고해집니다. 15-18절은 바울을 버린 사람과 바울과 함께 한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가장 큰 고난은 아마도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외부
적들의 공격을 받는 것도 힘들지만 믿었고 함께 했던 사람에게 버림을 받으면 그 충격은 가장 클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율리어스 시이저는 전장에서 많은 칼을 맞고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양아들인 브루터스의 칼빵 한 번에
죽었다고 합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믿었던 양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충격에 더 일찍 죽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배신을 당하는 것은 심적 타격이 큰 겁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울의 마음이 크게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오네시보로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자주 격려해주고
감옥에도 부지런히 찾아와서 섬겨준 것을 아주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상처가 그래도 씻겨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잘해줘도 버리는 사람이 있고, 혹
서운하게 대했어도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떠나간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 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소수라도 함께 해주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과 함께 하면 됩니다. 결국 인생은 몇 명하고만 가는 것이지 많은 사람과 갈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과 소아시아를 떠나 로마에까지 와서 2차에 걸쳐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때문에 디모데와 오네시보로 같은 귀한 동역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때문에 선포자요 사도요 교사로서 더 분명한 자세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 나를
봐! 고난에 움츠러 들지 마! 하나님이 지켜주시잖아!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은사를 다시 살려봐!" 이 시간 저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목자가 되게 하시고 복음을 맡기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목자로서 삶을 시작한지 3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를 지켜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학년 때 저를 UBF로 인도한 선배가 오히려 UBF를 나가라고,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목자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던 시절에 전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한 고등학교 동창이 모임에 나왔는데
저를 발견하고는 대뜸 하는 말이, "야 너랑 여기는 안 어울려" 였습니다. 바로 밑 제 동생은 '오빠는 4학년이 되기 전에 UBF를
반드시 나갈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스쳐지나가는 농담같은
말들이 마음을 누르고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목자가 되었기에, 그리고 저의 행위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제게 주신 은혜가 있었기에 저는 남았고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16년 전에 종로 7부에서 2부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양식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였는데
그 말씀을 보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동안 저는 복받은, 참으로 행복한 목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겸손한 2부의 동역자님들이 마치 디모데와 오네시보로처럼 시간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 섬기고 동역해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2부 공동체가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제게도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내가
목자가 맞나?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이 맞나? 리더십과 철학과
소통에 있어서 부족한 내가 계속 이 길을 가야 하나?" 끊임없이 정체성을 묻는 물음이 제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알고 싶었습니다. 지난 5년은 저를 다시 발견하고 세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구약을 연구하고
상담목회를 공부하면서 저에 대한 성찰을 계속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여러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이제 목자는 그만두고 이 일을 하라고 이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하는 솔깃한 말들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생각하고 기도하고 고민하였습니다. 상명대
동역자님들과 공부하고 몇몇 선교사님들하고 공부하는 시간은 저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고 저의 길을 다시 곧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였습니다. 열 번을 다시
생각하고 백 번을 다시 고민해도 이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초한 고난이니 하나님의 때까지 참고
견디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저는 개척을 약속한 2023년을
바라보며 기도했지만 마음에 확신이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주일 메시지를 매우 전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이 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내고 보니
그것이 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나님은 연단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주님은 인도하십니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이 일로 지금도 꿈인가 생시인가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기쁘기도 하다가 울적해지기도 합니다. 50대 중반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사명의 땅에 신입목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생면부지의 동역자들을 알아나가야 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고 전체를 섬겨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중압감을
선사합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여유있게 등산도 하며 건강을 챙겼는데 다시 혈관이 나빠지고 당뇨 수치가
높아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듭니다. 무엇보다 5년
동안 주일 메시지를 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막상 하려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평일 5시30분에 새벽기도를 하는데 매일 스탭이 다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서 막상 하려고 하니 주저하게 됩니다. 이런
제게 하나님은 딤후 1장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
감당할 능력과 품을 사랑을 주신다고 했으니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비록 5년 동안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은사를 주시고 스탭목자로 부르시지 않았던가? 이제라도
다시 불일 듯 하도록 격려하고 계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난 스탭 연말 수양회에서도 이 말씀의 대표 소감강사였습니다. 몇
몇 목자님들이 이 말씀은 스펄젼 목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말씀 같다며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이제
제가 3기 목자생활을 앞두고 2부, 7부 목자님들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정체성을 굳건히 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는 목자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앞으로도
고난이 있겠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복음과 말씀을 더욱 힘써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목자님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죄인을 오랫동안 참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요 목자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고난은
이 정체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을 삶속에서 체험하도록 도와줍니다. 무엇보다 고난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더욱 발휘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게 해줍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 각자를 인격적으로 키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새해 우리를 통해 복음의 능력이 크게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