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신년 2강 말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말씀/ 출17:1-16
요절/ 11절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여정에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광야 길을 거쳐야 합니다. 결핍과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하는 문제들이 생깁니다. 성도의 인생길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여러 문제와 도전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후 마라와 엘림과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마라에서는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음으로 모세가 한 나무를 던져 달게 한 사건이 나옵니다. 엘림을 떠나 신광야를
건널 때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제
신 광야를 지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기나요? 1절을 보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르비딤은 ‘쉬는 곳, 휴식처’의 의미를 담고 있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물이 풍성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기대하고 왔는데 샘과 개울이 다 말라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가가 3절에 나옵니다. 원망하는 투로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곳은 온
회중이 의논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왔어요.
모세가 시킨대로 했어요. ‘떠나라’하니 떠났고, ‘이리 가라’ 하니 이리 갔고,
‘저리 가라’ 하니 저리 갔고, ‘여기에 장막을
치라’ 하니 장막을 쳤어요. 르비딤은 시내산 근처로 모세가
잘 아는 지역이니, ‘거기 가면 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힘들었을 백성들) 백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 같습니다. 전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모세를 원망한 정도로 그쳤는데,
이제는 그것을 넘어 다투고, 돌을 들어 모세를 칠 기세였습니다. “모세~ 너 우릴 이곳으로 인도했지. 우린 말이야~ 니 말만 듣고 여기까지 참고 따라왔잖아. 그러니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했으니 당연히 물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2절).” 이 말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왔으면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과
씨름해야지 왜 나와 싸우느냐’는 것입니다. ‘나와 다투는
것은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히11;6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을 찾을 때 그 분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상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막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서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서야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서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 또는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리로 인도하신데에는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당장
물을 주지 않는 이유가 있겠죠. 그게 무엇일까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몸은 출애굽하였지만 마음은 아직 출애굽하지 못했습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마음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습니다. 진정한 출애굽은 마음이 출애굽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걸맞게 각 단계마다 적절한 시험과 평가, 필요한 교육을 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언약을 맺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인도한 것이지 그들을 죽이기 위하여 인도해 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우리를 당황케 할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요.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았는데 병에 걸려 병마로 고통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양을 섬겼는데 남은 제자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는데 부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자녀 문제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험 앞에서 때때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느낌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고통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8-10)
욥도 우리처럼 신뢰와 의심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뵙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오는 위로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단호하게 신뢰의 의지를 표출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이 고난을 통해 순금과 같이 연단하실 것이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난받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렘애3:32,3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당황케 하고 낙심케 하는 현실적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주십니다.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5절)고 하십니다. 모세가
쥐고 있는 지팡이는 어떤 지팡이 입니까? 나일강을 쳤던 지팡이입니다.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옛날 애굽의 풍부했던 나일강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든 지팡이로 그 강을 쳤을 때 어떻게 되었나요? 그 나일강이 핏빛이 되어 아무도 마시지 못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일강처럼 풍부한 물도 못 마시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마실 물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풍성하게 마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알게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물을 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생수의 강이 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200만명과 그들의 가축까지 풍족히 마시고 해갈이 되게
물을 내십니다.
여기서 물을 내시는 방법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세의 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서십니다. 그것도 죄인처럼 피고의 자리에 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을 심판했던 그 지팡이로 그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반석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조상과
세우신 언약을 하나님이 깨고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할려고 한다며 하나님을 고소하였고 하나님을 정죄하는 장면을 현재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범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범죄한 것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담당하시고 그 분을 거역한 자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그 지팡이로 침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쳐라. 너희 문제를 내가 담당하겠다’, ‘내가 대신 죄 값을 담당하고 너희를
위해 물을 내어 주겠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우리 조상들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고 해석합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침을 당함으로
하늘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그들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땅에서 나오는 음료는 나일강이나 르비딤 오아시스에서
나오는 음료인데 그것은 마르든지 오염되어서 마시지 못하게 될 수 있는데, 하늘로부터 오는 음료는 언제든지
마실수 있고, 풍성하며, 생명을 주며, 하나님께서 친히 주는 음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고
했습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수를 예표합니다.
사도 요한은 한 군인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렸는데 거기서 물과 피가 나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9:34) 물은 세례 또는 성령을, 피는 속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심으로 그 분으로부터 흘러나온 물과 피가 온 세상에 흘러 적시어 온 세상에 생명을 주고 죄사함의 은혜를 부어 주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7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백성은 불신 가운데 하나님을 고소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 중에 계셨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그들 중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 대신 정죄받고 침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할 때 ‘이놈들~ 손좀 봐 줘야겠다’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연약한 그들을 이해하시고 돌보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은혜에서 은혜로 나아갑니다.
8-16절 까지는 외부의 문제인 전쟁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아말렉은 에돔족속, 즉 에서의 후예로서 호전적인 광야 유목민입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행군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쳐서 약탈을 하였습니다(신25:17-19). 하나님께서 애굽에 어떤 재앙을 내렸는지,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어떻게 몰살시켰는지 그들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 하였습니다. 이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하는 마귀의 행태와 같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면전이 일어났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 누가 이기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변변한 무기도, 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도, 싸워본 경험도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 전장의 전면에 나서서 싸우면 좋을까요? 여느 때처럼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앞장서서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를 지목하여 군대를 조직하여 아말렉과
싸우도록 합니다. 여호수아가 처음 등장합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무엇을 합니까? 11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는 지파이를 하늘을 향해 드는 일을 했습니다. 이때 싸움의 성패가 어떻게 되어가나요?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올리면 ‘와~’ 하고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전세가
역전되어 ‘우~’하고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모세가 ‘아이구! 안되겠다’ 힘을 내서 손을 올리면 다시 이스라엘이 ‘와~’ 하고 이겼습니다. 이걸 옆에서 지켜본 아론과 훌이 생각을 했겠죠. 이기고 지는 것이 무엇에 달렸는가를 눈치챘겠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고 그 위에 앉게 합니다.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게 되었습니다. 승리한 후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짓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시다’는
뜻입니다. 깃발의 역할이 무엇이죠? 깃발은 ‘모은다’는 뜻입니다. 청나라에
팔기군이 있는데, 청색기를 흔들면 해당되는 군대가 그 깃발을 따라 적진으로 돌격합니다. 깃발은 모으는 역할, 나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16절에서 ‘여호와 닛시’의
의미를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기에 또 관주가 붙어 있는데, ‘모세가
여호와의 보좌를 향하여 드니’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넣어서
16절을 읽어보면 ‘이르되 여호와의 보좌를 향해 손을 들었으니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가 됩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보좌를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내어 밀었다는 뜻이죠. 구체적으로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하나님의 보좌에 도전하는 반역의 도당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입니다’ 라는 뜻으로 이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 민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신앙고백적으로 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멘’하고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치겠다’ ‘이들은 내가 대대로 치겠다’ 한거죠. 모세의 신앙고백적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믿음을 보일 때 이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하실
문제가 됩니다. 므리바의 물문제도,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문제를 내어 놓으니 하나님께서 ‘아멘’하고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여호수아로 전쟁에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의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할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어놓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했고, ‘뒤로 물러가면 그가 기뻐하지 않는다’(히10:38)고 했잖습니까? 손을 계속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원이로되 육체가 약합니다. 피곤하여 손이 내려옵니다. 그래서 손을 붙들어 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믿음이 좋을 때가
있고 안 좋을 때가 있습니다. 항상 믿음이 좋다면 좋겠죠~. 그런데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하고 동역을 받아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처녀로 예수를 잉태하였을 때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힘드시니까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잖습니까?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서 혼자서 끙끙
앓고 있지는 않습니까? 동역자들에게 기도제목을 나누고 도움을 청하고 그것을 함께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전도서에서도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두 사람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삼겹줄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동역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이죠. 하나님과 수직적 동역, 성도들간의 수평적 동역을 잘해야 합니다. 구약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이 도와줄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동역이
필요 없어요.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간섭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러면 안되겠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 처럼 ‘저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세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또한 수평적 동역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믿음의 동역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종로 2부는 6부 3팀의 동역이
필요하고, 전체 방향을 잡으면 거기에 잘 동역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3장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었으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동역의 중심은 하나님이 되어야 하고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각 자에게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동역에서
중요합니다. 또한 고난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합심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2022년을 맞이한 우리 인류에게 당면한 문제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코로나, 빈부격차, 지구온난화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
문제, 죽음의 문제 입니다. 그 해결책은 하나님의 임재에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절정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를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문제가 다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에 자리 잡아질 때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수가 흘러나와 나의 목마름이 해결됩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고생하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기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 이루었다’ 말씀하실 때 위로부터 휘장이 찢어져 율법의 정죄, 죄의 고소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할 때 무덤이 열리고 많은 죽은 자가 부활하였기에 십자가를 바라보면
질병과 죽음 문제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전한 승리요 모든 인생문제를 해결하게
한 임마누엘의 절정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함으로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벧전5:7).
결론입니다. 천성을 가는 길에서 우리는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 문제들은 하나님의 임마누엘 하심으로 해결이 됩니다. 임마누엘의
정점인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가 이미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고
자기를 내어 주어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먹고 사는 문제, 대인관계, 질병과 죽음 문제...
모든 것이 이미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의 동역을 요구하십니다. 올 한해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문제에서 자유함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문제들이
실제적으로 해결되는 믿음의 체험을 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