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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신년 3강 `열둘을 택하신 예수님⁠`(누가복음 6:9-19)2022-01-10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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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신년 3강 말씀

 

열둘을 택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6:9-19

요절 / 누가복음 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대망의 2022년 새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해 '대망'이라는 말을 쓰기가 어렵게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큰 꿈을 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맞이하는 새해는 언제나 대망의 새해입니다. 새해에 우리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의 심령과 가정에 우리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 누가복음 6장 말씀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라 신선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늘 신선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 주셔서 이 말씀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한 영적 방향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말씀은 서로 상관이 없는 두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건이 뒤의 사건의 배경이 되는 점에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6 1절부터 5절을 보면, 이 부분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머리 둘 곳 없으신 불안정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의 삶도 불안정하였습니다. 때로는 몇 끼를 건너뛰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밭에 있는 생밀알도 진수성찬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제자들의 이러한 행동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농부들이 추수할 때 밭 가장 자리의 곡식은 추수하지 말고, 또 추수하다가 땅에 떨어뜨린 이삭이 있으면 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3:22, 19:9, 24:19-21) 이는 가난한 자들,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남의 밭을 지나가면서 이삭을 잘라먹은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 문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밀알을 따는 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탈곡을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너무나 사랑이 없고 율법적인 모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조목조목 지키는 것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그들의 율법적인 자세가 오늘 본문에도 나타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어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 예배드리는 것과 비슷한 순서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회당에 한 특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손 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손이 말랐다는 것은 신경과 근육이 마비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그는 양손이 있었지만 가장 활동적이며 유용한 오른손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악기를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신발 끈을 혼자 맬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악수를 하려고 오른손을 내밀면 얼른 왼손을 내밀어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한 친구의 집에 갔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계셔서 제가 악수를 하려고 오른손을 내 밀었는데 그 분은 제게 왼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시 왼손을 내 밀어 악수를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6.25 전쟁 때 부상을 입어 오른팔에 의수를 착용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여하튼 본문에 나오는 그 사람은 말라버린 오른손으로 그의 마음도 오그라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통념상 그는 죄 때문에 그런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죄책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참 안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어찌하든지 낫게 해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어떠한 생각을 가졌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그들은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를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숫자로 목표를 잡습니다. 12명 제자 양성, 100명 주일 예배, 1만 명 선교사 파송 등. 물론 이러한 목표는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숫자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부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숫자로 보고, 한 사람을 N분의 1로 보기 쉽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아무리 부족하게 보이는 사람도 N분의 N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적인 사랑으로 섬길 때 하나님이 친히 100명도 보내주십니다. 여하튼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은 연약한 그 사람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손 마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내일 다시 오세요", "오늘 모임이 끝난 후에 잠깐 봅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에게일어나 한가운데 서라하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회당 한 가운데 서도록 하시고 이를 통해 종교지도자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만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9절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하십니다.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거나 죽이는 이 모든 것은 어떤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쉬는 날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함으로써 쉬는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릴 때 그 사람도 안식을 얻고 선한 일을 한 사람도 그 마음에 안식을 누립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손 마른 사람이 지난 수십 년간 신경과 근육이 다 말라버린 손을 내민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손을 앞으로 죽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말랐던 손이 펴졌습니다. ! 실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한 번만 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손을 폈다 당겼다, 올렸다 내렸다, 뒤로 돌렸다 앞으로 돌렸다,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죽은 신경들이 살아난 것이요 없던 근육들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신경을 만드시고 없던 근육을 만드신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골로새서 1 16,17절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님은 만물을 만드신 분입니다. 만물은 그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만물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그 분이 만물을 손으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인간을 죄와 연약함에서 구원하여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분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진정한 안식, 곧 영혼의 구원을 주는 분이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한 손 마른 사람이 낫게 된 것을 기뻐해야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영접하고 그 앞에 엎드려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였습니다. 분노하였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이 세속적인 헬라문화 가운데서 유대공동체를 지키고자 만들었던 전통에 함몰되어 영적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당시의 백성들의 목자라고 행세하였습니다. 영적 지도자라는 자부심에만 빠져 도움이 필요한 백성들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다. (2:17-23) 그 시대의 백성들은 목자를 잃고 방황하는 양들이 되었습니다. 그 시대는 참으로 암울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실상 예수님은 늘 기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그 시점에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는 기도하셨습니다. 세례 받으신 후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시는 가운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언제나 큰 역사를 섬기신 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시며 영적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산으로 가서 기도하신 것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기도에서 더 나아가, 그 시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을 구하는 절박한 기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스한 방에서 깊은 잠을 자고 아침에 가뿐하게 일어나는 현대인들은 밤이 얼마가 긴지를 잘 모릅니다. 산에서의 밤이 얼마나 춥고 또 시간은 왜 그렇게 더디 가는지 잘 모릅니다. 저는 오래전 군대에서 밤새 외곽 보초근무를 설 때 겨울 밤이 얼마나 춥고, 시간은 정말 얼마나 늦게 가는지 절감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어 산 위에서 해가 솟아오를 때, 그 따스한 빛을 눈으로 보며 또 그 온기를 누리는 감격과 환희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밤이슬과 추위를 무릅쓰며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종교지도자들로 인해, 또한 방황하는 백성들로 인해 심히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문제들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 시대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깊이 기도하시는 가운데 그 시대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 제도를 개혁하며 종교지도자들을 척결하는 것이 그 시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싸우며 그들을 회개시키는 일에 주력하는 것도 아님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문제는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종교지도자들의 교만을 부추기고 그들의 영적인 눈을 가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며 도리어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고후4:4)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능력을 덧입으셨습니다. 마침내 새벽이 밝았고 아침 해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도 빛이 임했고,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영적 방향도 잡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같이 산에 올랐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제자의 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70인 정도이었을 것입니다. (10:1) 예수님은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열둘을 택하셨을까요?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3:13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이라는 것은 그냥 기분에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같이 지내며 눈여겨보시고, 사도로 삼고자 하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여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인데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파견된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복음을 완성하시고 하나님께 돌아가셔야 합니다.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그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할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복음전파의 사명자들로 열둘을 부르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아직 사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점들이 많았습니다. 처음 부른 4명의 제자들은 어부들이었다고 알려져 있고, 그 나머지는 마태가 세리였다는 것 외에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나이가 얼마인지도 모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충동적인 기질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른다고 했다가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유다는 나중에 예수님을 은 30에 팝니다. 또한 요한 외에는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도망을 가 버립니다. 한 마디로 열둘은 모두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볼 때 미련하고, 약하고, 허물이 많은 자들을 택하여 사용하십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6-29) 예수님은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칭찬하신 백부장을 사도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학식, 재력이 있던 당대의 엘리트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를 부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 다소 부족한 사람, 그러나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사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는 사도로 쓰임 받는 것이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에 달려있지 않고 그들을 부르신 예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족한 그들이 한 손 마른 자 같은 사람을 잘 이해하고 섬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택하신 열둘은 누구입니까? 14-16절을 보십시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저자 누가는 열둘의 이름을 나열하되 시몬에게만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이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택하셨고, 그들 중에서도 시몬을 수제자로 택하셨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열둘 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열두 제자의 특징을 보면 그들은 첫째, 자기 일에 성실하던 평범한 사람들이며 둘째,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결단을 한 자들이며 셋째, 배우기 원하는 자들이며 넷째, 각계각층의 사람들이되 그중에 종교지도자 출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지만 복음을 가르칠만한 새 가죽부대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열두 명만을 택하셨을까요? 이는 열두 명이 예수님이 같이 지내면서 인격적으로 도우실 수 있는 최대의 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며 이는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과 늘 함께 하시며 키우는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양성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우시고 훈련하셨다”, “정병 양성을 하셨다”, “빼어난 제자들로 키우셨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군대 훈련과 같이 사람들을 훈련시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인간적으로 능력 있는 자들을 뽑습니다. 그들을 위한 제자프로그램을 만듭니다. 다양한 코스를 만들고 그 과정을 마치면 수료증을 줍니다. 물론 그러한 훈련이나 교육과정은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일정한 프로그램이나 코스를 마친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지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인격과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3장을 보면 예수님은 열둘을 어떻게 키우실 것인가를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님이 열둘을 세우신 첫째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고 하십니다. 이는 열둘을 항상 자기와 함께 있게 하사 예수님 자신을 본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지 않고 단지 지식만 얻게 되면 자만심 가득한 사람들로 키우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는 빨리 성장하여 큰일을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마음의 교만과 자기 의로 인해 잘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목자로서 먼저 예수님을 잘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일생동안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였기에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3:10) 우리가 제자를 양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먼저 본을 보이고 또한 마음과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서 일대일을 해 주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양들과 따로 살지만 같이 사는 것같이 자주 만나서 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많은 사람을 두루 돕기보다 한 두 사람을 집중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에게 70명의 제자가 있어서 그 중에 우리가 열둘을 택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닙니다. 택하는 것도 주님이 택하시는 것이니 내가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이 이 시대의 사도로 택하여 보내 주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그들은 바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양들입니다. 부족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보내주신 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택하셔서 보내주신 사도 후보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섬기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이 시대의 사도양성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목자 생활을 돌아볼 때, 하나님은 부족한 한 사람을 돕는 마음을 축복해 주신 것을 발견합니다. 저의 첫 양은 '김영수'라는 형제였는데, 제가 예전에 다니던 교회 후배였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업사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센터에 나오면 대학생을 주로 섬기는 우리 모임의 특성상 그 스스로 자의식이 조금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대학생 양을 돕도록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분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양으로 여기고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모임으로 갔지만, 그를 통해 고3이었던 그의 동생이 센터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동생은 현재 관악3부의 시니어 목자가 되었고, 그를 통해 여러 명의 형제들이 모임에 나왔습니다. 또 북악의 윤마가 목자도 그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예전에 영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 영국 학생양이 없었습니다. 인도에서 온 불법 체류자 한 명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영국 대학생양은 없었지만 다니엘이라고 하는 그 인도 형제를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수년간 거의 매일 만나 말씀공부를 하고 교제하였습니다. 그는 신실하게 성장을 하였고 영국 조상인 이안 목자를 피싱하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지난 성탄에 영국 런던 UBF 6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중에는 옥스퍼드학생 6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영국은 현지 목자들이 자립적으로 모임을 섬기며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갈 데 없던 한 인도 양을 섬긴 그 심정을 축복하신 것을 발견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외에도 지난 여러 경우를 생각해볼 때, 아무리 부족하게 보이더라도 제게 있는 양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으로 영접하고 집중하여 섬겼을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을 나에게 사도 후보로 보내셨다는 것을 영접해야 됩니다. 그들을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으로 자주 만나고 대화하고 영적성장을 하도록 섬겨야합니다. 우리가 한손 마른 자를 섬기신 예수님처럼, 지극히 작은 자를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사도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도들을 세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예수님은 열둘을 데리고 어느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가 3년간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평지에 내려오셨습니다. 평지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요 언제나 문제가 많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삶의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치며 어떻게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각지에서 온 많은 백성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복음 진리에 기초한 영적인 지식과 분별력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열둘과 늘 함께 다니시며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진리로 충만하게 해주셨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성령 충만을 받음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진리의 말씀과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이기는 지도자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어려운 시대를 사도양성의 지혜로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소수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사도양성을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손 마른 자 같은 이 시대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지도자들로 성장하게 하시고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진 지도자들을 양성하게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