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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민수기 13강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하나님 ⁠`(민수기 22-24장)2022-02-07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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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민수기 13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하나님

 

말씀/ 민수기 22-24

요절/ 민수기 23:19,20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오늘 본문은 민수기 아니 성경 전체에서 참으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신앙의 정수(精髓),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바른 신앙생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올바른 신앙생활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2:1-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방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그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오늘 본문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는 모압 왕 발락의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모압 왕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은 과거 모압을 치고 모압 땅을 빼았았던 전력이 있는 아모리 왕 시혼을 이스라엘이 가볍게 제압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아모리를 친 것은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길의 통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길을 좀 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으나, 그것을 아모리 왕이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절할 뿐만 아니라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가볍게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쏜 스커드 미사일 몇 발에 아모리 왕 시온이 KO 되었다는 소식은 모압 왕 발락의 마음에 큰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굳이 남쪽으로 내려와 모압을 칠 의도가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발락은 이스라엘이 곧 침공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4절을 보면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는 것처럼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의 소중한 것을 다 뜯어먹을 것이라고 미디안 장로들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된 내용은 발락이 느꼈던 바로 이두려움에서 출발합니다. 발락이 만약 한 나라의 최고 리더로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고 이스라엘의 목적이 모압 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오늘 본문은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락이 느낀 두려움이 오늘 민수기 전체에서 참으로 중요한 본문의 말씀을 낳게 하였습니다.

 

매일 출근하면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 안에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젊은이들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기나긴 세월이 두렵습니다. 늙은이들은 어느날 갑작스럽게 삶의 종말이 올까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마음에서 몰아내기 위해 이런 저런 활동, 혹은 행동을 합니다. 하루종일 게임을 하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기타 여러가지 투기성 혹은 중독성 활동에 몰입합니다. 그것에 몰입하고 있을 때에는 잠시 두려움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려움 때문에 한 행동들이 그의 인생을 망하게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게임만 하다가 소중한 젊음을 낭비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투기성 혹은 중독성 활동에 몰입하다가 인생을 허비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사실 발락은 가만히 있으면 좋았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이스라엘 군대는 서쪽인 요단강 건너 여리고로 진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뭔가 하려고 했습니다. 무엇을 하려 했습니까? 그것은 저 멀리 유프라테스 강가에 살고 있는 용하다고 알려진 선지자 발람을 불러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발락은 복채를 두둑히 준비해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을 발람에게 보냈습니다.

 

멀리서 온 손님을 맞이한 발람은 그날 밤 여호와께 이 문제를 말씀드려보겠다고 하고 우선 여기서 하루 자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발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이에 발람이 여차여차 아뢰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발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명확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이다.” 이보다 더 선명하고 명확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발람이 발락의 귀족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발람이 전한 말이 내용이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이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씀이 빠지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가기를허락하지않으셨다고 표현이 바뀌었습니다.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면 그때는 마음이 바뀌어서 허락하실 수도 있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발람이 귀족에게 한 이 말은 그가 밤새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발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참으로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프로야구 선수가 스카우트되는 것을 연상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어떤 유명한 프로야구 선수가 있는데 메이저리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 스카우트가 성립되면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는 경력이 붙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나중에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와 고국에서 활동할 때 프리미엄이 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은퇴하고 난 후에도 메이저리그 출신이라는 경력으로 방송활동을 할 수도 있고 해설자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거하고 비슷합니다. 발람이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찾아가 그들을 저주할 수 있다면 그의 주가는 하늘높이 치솟을 것입니다. 그는 고향 메소포타미아에서 거의 하나님에 준하는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는 선지자로 하나님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발람은 너무 아쉬운 마음에 밤새 고민을 한 끝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말로 여지를 남긴 채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과연 발람의 기대대로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높은 복채와 함께 보내왔습니다. 심지어 더 높은 복채는백지수표였습니다. 발람이 그 백지수표에 무슨 액수를 적어넣든지 그 액수 그대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18절을 보고어 발람이 굉장히 경건하다. 금과 은을 온 집에 다 채워준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는 이 말은 얼마나 훌륭한 말인가! 발람은 돈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훌륭한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이런 분들은 살면서 사기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서울역에서 집에 가는 차비가 없다고 빌려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액면그대로 믿고 그냥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서울역에 갈 때마다 그런 분들이 나타났습니다. 예전에 저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택시 바퀴가 어머니 무릎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택시기사가 가정형편의 어려움과 불우함을 하소연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합의금을 조금만 주려는 의도였습니다. 요즘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나라에 내야 할 세금을 체납하면서 돈이 없다고 세금을 내지 않는데 나중에 집에 가보니 큰 집에 살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람의 이 말도 사실은 자기 몸값을 올리기 위한 말이지 전혀 그의 경건함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아니나 다를까 발람은 하루 더 머물라고 하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말씀드려보겠다고 했습니다. 20절을 보면 그날 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말을 섞지 말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말만 그대로 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이제 고액의 연봉을 받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되어 신이 난 발람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발락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조금 이상한 것은 분명히 어제 밤 하나님이 허락하셨는데 다음 날 아침 진노하셔서 그를 막으려고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교육학을 전공한 분들에 의하면 보통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가장 교육학적으로 좋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한 번 허락했으면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애들한테 게임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허락해놓고 험상궂은 인상을 하면서 노려보거나 괜히 등 뒤로 가서 툭툭 치거나 실수를 가장하고 컴퓨터 전원을 끄거나 하면 애들이 얼마가 화가 나겠습니까?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비록 발람이 발락에게 가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것이 본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더 나아가 그가 마음껏 발락 앞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해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발람이 길을 가던 중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칼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나귀가 보았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두려워하여 자꾸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화가 난 발람은 이놈의 나귀가 미쳤나 하면서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한편 그들이 진행하는 길은 좁은 길이었고 좌우에 담벽이 있었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쪽에 기댔습니다. 그결과 발람의 발이 담벼락에 짓눌렸습니다. 맹렬한 분노를 느낀 발람은 다시 나귀를 채찍으로 팼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있는 곳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 결과 나귀는 꼼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나귀는 발람 밑에 그대로 엎드렸습니다. 분노한 발람은 지팡이로 나귀를 팼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나귀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때리세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때립니까?” 이때 보통이라면 발람은 나귀가 말을 하는 것에 크게 놀라야 했습니다. 또 어쨌든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하나님이 주시는 사인이 있는지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귀가 말하는 것에 놀라지도 않고 마치 늘 평소 나귀와 대화를 했던 사람인 것처럼네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손에 칼이 있었더라면 너를 바로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서 발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가 돈과 명예에 대한 탐심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탐심 혹은 욕심은 마치 우리 눈을 가리우는 안대같은 역할을 합니다. 짙은 안개가 끼었을 때 한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전에 공항으로 가는 인천대교에 짙은 안개가 끼었을 때 수십대의 차량이 앞이 보이지 않아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탐심에 사로잡히면 이와같이 한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발람이 왜 이렇게 돈과 명예에 대한 탐심에 사로잡혔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의 주제인두려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발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실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은 돈과 명예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인이 그가 믿는 신을 믿고 의지하는 대신 돈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대놓고 돈을 사랑하고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낫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신을 믿고 의지하고 섬긴다고 말하면서 사실 속 마음으로는 돈을 사랑하고 돈을 의지하는 그런 것이 가장 추악한 것입니다.

 

본문의 발람은 오늘날 많은 종교인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돈을 의지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자기 욕심을 위해 일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 두려움이 찾아오고 뭔가 하나님 대신 믿고 의지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돈입니다.

 

31-3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주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먼저 그것은 발람이 가는 길이 사악하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닌 돈을 벌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돈을 위해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발람의 생각과 길은 사악한 길입니다. 다음으로 발람은 나귀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귀는 동물 중에서도 어리석고 고집이 아주 센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귀를 뜻하는 영어의 ass가 들어간 표현은 엄청난 욕설입니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다른 표현은 잘 못알아들도 ass- 어쩌고 하는 표현은 욕이라는 느낌이 옵니다. 그런데 그 나귀가 발람이 가는 이 길이 사악한 길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인 것을 알았습니다. 나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주인이 하는 온갖 핍박을 끝까지 견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주인을 일깨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자는 선지자 발람이 선지자는커녕 나귀만도 못한 미련한 자라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주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이 말씀을 읽고아 발람이 드디어 회개했구나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네 여전히 보이스피싱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발람의 이 말은 회개가 아닙니다. 잠시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말을 이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그 유효기간은 길지 않습니다. 뒤에 나오지만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다 마치고 난 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또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다시 한 번 가도 좋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말만 그대로 하도록 준엄한 경고를 했습니다. 마침내 발람을 맞이한 발락은 기뻐하며 그를 존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귀 사건을 경험한 발람은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발람을 맞이한 발락은 신이 났습니다. 이제야 발람을 이용해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발락은 발람은 이른바 영험하다고 알려진 장소로 데려갔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큰 바위 밑에 제사상을 차려놓은 것과 유사합니다. 사람들은 큰 바위 밑 약간 움푹 패인 곳에서 제사드리고 굿하고 기도하면 바위의 영험한 기운으로 인해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발락은 그런 곳으로 발람을 인도했고 발람은 거기에 제단 일곱을 쌓고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23:7-10절을 보십시오.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발람의 입술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내가 어떻게 저주할 수 있으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인해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 수를 셀 수가 없습니다. 발람은 자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발람의 입에서 나온 이 메시지는 민수기의 핵심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지면의 먼지와 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온 세상 천하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넘쳐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발람의 입에서 나온 이 메시지는 하나님이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키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은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 수를 능히 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민수기는 숫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냥 많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으니까 때마다 숫자를 정확하게 기록하여 얼마나 큰 민족이 되었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얼마나 넘치는지 기록합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땅에서 장차 드릴 제사에서 양 몇마리, 소 몇마리, 곡식 얼말, 기름 얼마를 정확하게 그 수치를 기록하고 드려야 하는 날짜와 절기를 기록하여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를 충분히 드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얼마나 복을 넘치게 부어주실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발람의 입에서 나온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은 때로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상황이 변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기억력의 한계가 있어서 자기가 한 약속을 까많게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경솔하게 약속한 후 곧바로 그런 약속을 한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고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담보물을 잡기도 합니다. 예전 일본의 성주들은 다른 성주와 한 약속을 보증받기 위해 성주들의 자녀들을 인질로 붙들어 두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국가도 신용평가를 합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에서는 때마다 각 기업이나 국가의 신용등급을 발표합니다. 신용이 가장 높은 국가는 AAA 등급인데 독일, 스위스, 미국, 호주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한국은 AA2 등급으로 A1 등급의 일본보다 더 높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도 가만히 살펴보면 한국 은행에서 보증하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보증한다는 여러가지 사인이나 도장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신용 등급이 높은 국가나 기업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믿고 안심하고 내가 가진 귀한 재산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신용 등급이 높다 하더라도 그것을 100% 절대적으로 믿고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거나 큰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신용 1등급인 미국에서 발행한 달러, 국채가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금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재산으로 인정받습니다. 비트코인도 매년 채굴할 수 있는 양을 조금씩 줄임으로 희소성을 갖게 하고 그 희소성으로 인해 화폐 가치를 갖습니다. 그러나 온 세계의 금을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온 세계의 비트코인을 다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는 순간 그것은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하나님은 우리가 100%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을 하나도 빼뜨리지 않고 그대로 다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정부의 보증을 믿고 원화를 은행에 쌓아둘 경우 부자가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보증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에만 몰아낼 수 있습니다. 2022년 올 한 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 위에 내 인생을 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벽에 단단히 박힌 못에 안심하고 옷을 걸어두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내 인생을 안심하고 걸어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