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민수기 14강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비느하스
말씀/ 민수기 25-27장
요절/ 민수기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수기는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가 걷는 이 인생길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걸었던 그 광야처럼 거칠고 험합니다. 매일매일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고 오늘 하루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민수기는 이런 거칠고 험한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마치 삶의 지침이요 안내서와 같은 책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으며 광야길을 걸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하루하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광야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민수기는 광야가 깊은 가르침과 배움의 장임을 보여줍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학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회초리를 맞으며, 눈물을 흘리며
배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한 경각심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사실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교훈을 받고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이스라엘은 싯딤에 이르렀습니다. ‘싯딤’은 아카시아 나무라는 뜻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 가나안의 입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광야에서 볼 수 없는 나무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풍요의 상징입니다. 아카시아 나무를 보면서, 또 멀리 요단강 너머 보이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드디어 광야 생활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이제는 더 이상 광야를 배회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부푼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제 모든 광야 훈련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무서운 시험과 유혹이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아리따운 모압 여자들이 모압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신의 제사에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청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 유혹에 넘어가 모압 여자들과
음행했고 바알 신의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이로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 전말은 뒤에 나오는
민수기 31:16절 말씀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31:16절을 보면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의 꾀’가 무엇입니까? 발람은 어마어마한 액수의 복채를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이로인해 발람은 복채를 도로 반납해야 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발람이
누구입니까?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의 계좌로 한 번 입금된 복채를 도로 반납할 리가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복채를 돌려주지 않을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은 복채만 받고 이스라엘을 축복한 발람으로 인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진 발락에게 말했습니다. “쭉쭉빵빵한 모압 여자와 미디안 여자를 선발해서 이스라엘 남자들, 특히
지도자급에 있는 남자들을 유혹하도록 하십시오. 미인계를 써서 그들을 바알신의 축제와 제사에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12지파의 지도자 12명만 초청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을
거의 전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발람의 꾀를 들은 발락은 얼굴이 환하게 펴졌습니다. 복채를 반환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즉시 발람의 꾀를 실행했습니다. 모압과 또 모압의 동맹 미디안 여자들 중 최고로
쭉쭉빵빵한 여자들을 선발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들에게 선발된 여인 중 하나인 미디안 여자 고스비는
미디안의 지도자급 고위인사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을뿐
아니라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 출신 여자였습니다. 지적이고 똑똑하고 그러면서도 얼굴도
영화배우처럼 예쁜 여자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남자들에게 접근해 바알 신의 축제와 제사에 같이 참여하자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남자들이 바알 신의 축제와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이 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무서운 죄가 될까요?
먼저 우리가 가나안 지역의 농사환경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안
지역은 우리나라와 달리 건기와 우기가 뚜렷합니다. 5월부터 10월경까지는
건기로 정말 그야말로 비가 한방울도 오지 않습니다. 6개월간 단 하루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10월이 되면 씨를 뿌려야 하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한 해 농사를 망치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게 됩니다. 6개월간
비가 오지 않다가 11, 12월이 되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라도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비를 주관하는 하늘의 신이 바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땅을 주관하는 신이 아스다롯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은 남자의
모습으로 형상화했고 아스다롯은 여자의 모습으로 형상화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자녀를 잉태하고 낳는
것처럼 바알과 아스다롯이 합방할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에서 곡식이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바알이 아스다롯과 합방을 피하는 것이고, 아스다롯과 합방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영상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의 제사와 축제의 순서에는 바알 남사제들과
여사제들이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이 꼭 포함되었습니다.
사실 바알이라는 말 자체는 전혀 나쁜 말이 아닙니다. ‘주인(Lord)’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주님(아도나이)’에 해당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곧
하늘의 주인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을 섬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가진 신인 것처럼, 더 나아가 욕망과
본성의 지배를 받아 신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나태하고 무책함한 신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모독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고대 가나안 사람들처럼 바알을 신으로 숭배하고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고대 가나안 사람들처럼
바알신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 신 안에 있는 성적인
욕구와 자기 욕망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 하고 우주만물의 운행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오늘날 현대인들은 각자 자기 안에 있는
성적인 욕망과 기타 여러가지 탐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TV 드라마를 보십시오. 온갖
불륜과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내용이 없으면 누가 드라마를 보겠습니까. 그런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내용이
사람들로 하여금 드라마를 보게 하고 그것이 광고수입을 가져다주고 그 광고수입을 고용을 창출하고 그래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륜을 저지르고 배우자 몰래 다른 이성을 은밀한 곳에서 만나고 해야 모텔 산업도 발전하고 여러가지
사업 모델이 발생하고 고용이 창출되고 사회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남의 자식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자식만 좋은 대학에 보내고 전문직 종사자가 되게 하면 된다는 그 탐욕이 있기 때문에 고액과외하는 사람도 먹고 살고, 브로커들도 먹고 살고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정치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무고한 사람을 비방해서라도 남을 짓밟고 승진하려는 탐욕이 있기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하고 뒷배경이 없는 사람도 직장에서 고위직에 오를
수 있고 사회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탐욕을 극대화하여 만족시키는 것은 삶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요, 또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욕망과 탐욕을 활활 불태우는 것을 신성시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욕망과 탐욕을 신으로 모시고 예배하고 섬깁니다. 내
안에 있는 이 불타오르는 욕망과 탐욕을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고리타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 말고 네 안에 있는 그 탐욕과 욕망을
경배하며 살라는 강력한 유혹과 시험을 받았습니다. 교양미가 있고 지적이며 쭉쭉빵빵한 모압과 미디안 여자들이
그들 안에 숨겨진 이 욕망에 불을 붙였습니다. 올 봄학기가 되면 공부하게 될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광야로
가셔서 마귀가 주는 이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 앞에서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탐욕과 욕망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안타깝게도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대신 자기 안에 있는 탐욕과 욕망을 섬기는 편을 택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진노하신 하나님은 범죄에 가담한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해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떠나리라 하셨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모세는 급히 이스라엘 재판관들을 불러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회막 문에 모여 대성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이 장면에서 “보라”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온 백성이 대성통곡하며 울고 있을
때, 바로 그 때 한 이스라엘 남자가 미디안 여자 하나를 데리고 막사 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지난 밤 바알 축제 때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상태로 그는 비틀거리며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자기 막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이 기막힌 장면을 보고 최고 지도자인 모세는 순간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하고 분이 치밀어올랐을 것입니다. 사실 정석대로라면 그는 당장 재판관들에게 명해서 이 사람을 긴급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화가 난 모세는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그 그 장면을 보고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가 함께 들어간 막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예상했던대로 두 사람은 침상 위에 포개져 있었습니다. 비느하스는 창을 들어 남자의 등과 여자를 배를
한 번에 꿰뚫었습니다. 이른바 인간 닭꼬치를 만들었습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발생한 염병이 그쳤습니다. 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24,000명이었습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본문에서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질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질투는 매우 강렬한 감정입니다. 독한 술을 섞으며 더욱 강력한 술이 되듯, 질투는 배신감과 분노를 한 번에 섞은 폭탄주처럼 강렬한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표현을 쓰신 것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학교에서 여러가지를 배워야 하지만 그중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사기꾼은 거짓말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죄의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기꾼은 사기를 치면서 자기가 얼마나 사람을 잘 속이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우월감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동시에
사기당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는 그가 사기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인은 죄를 짓는 것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얼굴이 태연합니다. 마음이 평안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이는 그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짓는 여러 죄 중에서 특히 음행의 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혼식을 올릴 때 식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혼인 서약식을 할 때와 그
서약을 굳게 하기 위해 결혼 반지를 서로 교환할 때입니다. 혼인 서약식을 할 때 주례자는 신랑과 신부에게
묻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삶이 평탄할 때나 역경의 때나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하겠습니까?” 신랑과 신부가 힘차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하면 결혼 반지를 교환함으로 그 서약의 증표로 삼습니다. 이어
주례자는 그 서약이 이루어지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그 서약을 한 후 그 서약을 깨는 행위를 스스럼없이 합니다. 특히 요즘에는 정신적인 바람을
피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인은 집에서 자기를 여러모로 섬겨주는 사람이고 외롭고 대화가 필요할 때 찾는
이성은 따로 있습니다. 골프칠 때 함께 하는 이성이 따로 있고 해외 출장갔을 때 교제하는 이성이 따로
있습니다. 떳떳하면 부인에게 말하겠지만 뭔가 떳떳하지 못하므로 숨기다가 나중에 들키면 큰 싸움이 됩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신뢰감이 사라지고 결국은 이혼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상대 배우자의 마음에 평생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또 자녀의 마음에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남깁니다. 이러한 음행은 하나님 보실 때 악한 죄입니다. 마치 바람 난 배우자를 향해 불타오르는 분노와 질투를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은 영육간에 음란한 죄인들이 죄를
행하는 것을 볼 때 타오르는 진노를 느낍니다.
여러분. 이 시간 각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배우자 몰래 외로울 때 다른 여자를 잠간잠간 만나는 것이 그렇게 큰 죄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의 대상이요, 닭꼬치에 꽂혀질 정도의 큰 죄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아직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사기꾼이 사기치는 것에 대해 큰 문제의식이 없는 것처럼 음란한 죄인은 음행에 대해 별다른 죄의식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나를 대신하여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내가 저렇게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큰 죄를 지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사장 비느하스는 장차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비느하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타오르는 분노의 마음을 안고 범죄한 두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13절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속죄 제사가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죄에 대한 불타오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을 안고 범죄한 우리 대신 자기 자신이 못과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십자가에 매달려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에 대해 불타오르는 진노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제가 비록 아직 겉으로 드러나는 음행과 여러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제 마음 안에 기회만 되면 그런 죄를 짓고자 하는 무서운 탐욕과 음행의 욕망이 있습니다. 또 사실 여러가지 음행의 죄를 지었습니다. 음행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대신 욕망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가 창에 꿰여 닭꼬치가 되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저주와 수치를 받아야 할 죄에 해당합니다. 그것을 인정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독사 안에 독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무서운 죄의 본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기회만 되면 틈만 나면 죄를 짓고자 하는 무서운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죄의 본성을 이기고 광야와 같은 삶을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입니다. 봄학기 누가복음에서 배우겠지만 광야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죄의 시험,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 말씀이 나를 다스릴 때 죄의 욕망대신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만이 무서운 죄의 욕망을 제어하고 광야와 같은 세상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민수기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봄학기 누가복음 생명의 말씀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이기며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6:63-65절을 보십시오. “이는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계수한 자라 그들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한 중에는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6장은 민수기에 등장하는 두 번째 인구조사입니다. 이 인구조사에는 여러가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인구조사의 중요한
결론은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첫 번째 인구조사했을 때 계수했던 사람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평했던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붙들지 않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반드시 죽음과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27:15-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27장에서 모세는 새로운 세대를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으시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입니다. 이는
그가 늘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시대, 새 세대를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친히 세워주셨습니다.
결론입니다. 광야학교에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죄의 심각성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죄짓기를 두려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죄에
대해 불타오르는 진노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악한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그 죄의 본성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할 때 거룩한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특히 봄학기 누가복음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여 광야와 같은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