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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5강 `⁠죄사함의 권세자 예수님 `(누가복음 5:12-26)2022-04-0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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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5

죄사함의 권세자 예수님

 

말씀/누가복음 5:12-26

요절/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지난 주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과 위엄앞에서 무릎꿇고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백을 합니다. 너무 두려워나를 떠나소서요청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시몬의 죄가 용서되었고 용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오늘 말씀에서 저자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사하는 권세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실제적 사건들을 통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배우고 죄사함의 은혜가 이시간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님이 갈릴리의 한 동네에 계실 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나병은 오늘날 한센씨 병(Hansen’s disease)이라 불리는데 당시에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신경이 마비되고 관절과 신체의 모든 연골이 녹아내립니다. 초기에는 눈썹이 빠지고 나중에는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럼에도 신경이 죽어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나병환자가 많았습니다. 앞 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나병에 걸려 가족과 이별하고서 소록도로 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의대 교수님은 겨울에 뜨거운 아랫목에서 자다가 등에 화상을 입고서 병원에 왔다가 나병으로 진단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나병은 접촉성 전염병이며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무서운 병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병으로 징계하시겠다고 하셨고(28:27-28) 미리암, 게하시, 웃시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이를 근거로 유대인들은 나병에 걸린 것을 죄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육체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격리시켜 동네 밖에서 살도록 하였습니다. 부지중에 다른 사람이 접근해 오면 윗입술을 가리고서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쳐서 정상인의 접근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럴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여도 되었습니다. 만약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된 경우에는 희생제물을 바친후 사회로 복귀하여 정상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14:1-32). 당시 랍비들은 나병환자가 치유받는 일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12절을 보면 누가는 그 사람을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치과의사인데 사람들을 보면 보지 않을려고 해도 치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직업은 못 속이는구나그런 생각을 합니다. 의사인 누가는 이 사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온 몸에 나병이 들렸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상태가 아주 절망적입니다. 죽음이 문턱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다른 나병환자와 달랐습니다. 마을로 들어오면 안되는데 들어왔고, 사람들에게 접근하면 안되는데 용감하게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구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그는 주님께서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을주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명하니 귀신이 쫓겨가고, 시몬의 장모의 중한 열병을 꾸짖으니 병이 떠나고, 온갖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이 분이야 말로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 병도 능히 낫게 하실 수 있겠구나!’ 믿음이 생겼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주여 원하시면...’이라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 저는 주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입니다. 저를 낫게해 주지 않아도 저는 할 말이 없는자 입니다. 그러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다만 주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그런 뜻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기 의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믿는데 왜 내게 복을 안 주시나요?’, ‘내가 이렇게 기도했는데~ 날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해 주셔야죠.’ 이런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음으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이요 지금도 우리 육신의 본성은 늘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영원한 불 심판을 받아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주여~ 주여~’ 부르는 이유는 우리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서 고백하고 주님의 뜻에 나를 굴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닙니까? 우리가 항상 겸손한 자세, 감사하는 자세,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응대해주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예수님은 먼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 행동은 의식적으로 금지된 행위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코로나 걸린 환자와 마스크도 쓰지 않고 대화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관습과 전통을 깨고서라도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는 걸까요?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 그 이상입니다. 고통받는 이의 추하고 뼈아픈 현실에 깊숙히 관여하시는 구세주의 크신 긍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사회와 격리되어 패쇄적인 삶을 살았야 했던 부정한 나병환자와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인 예수님 자신과의 사이에 막혀 있던 장벽을 예수께서 무너뜨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그릇된 통념과 잘못된 전통들을 뒤엎어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막힌 것을 허시고, 끊어진 것을 이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내가 원하노라’ (I am willing)’ 이 얼마나 감격스런 말입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을 꼭 고쳐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원하지 않노라해도 나병환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도리어왜 규칙을 깨고 이렇게 오느냐고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환부에 손을 대시고내가 원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그러자 나병이 즉시 떠나갔습니다. 온 몸의 진물이 멈추고 흉측한 피부들이 순식간에 여자분들의 로망인 꿀 피부로 회복되었습니다. ~ 의사인 누가가 봤을 때 엄청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목수이신 예수님이 의사 누가뿐만 아니라 의료계의 명의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조차 하지 못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의료계를 찢어놓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병은 그 증상에 있어 죄와 아주 흡사합니다. 나병이 사람의 몸을 망가뜨리고 흉하게 하듯이 죄도 하나님께 주신 고귀한 형상을 망가뜨리고 추하게 합니다. 나병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듯이 죄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킵니다. 그래서 고독하게 만들죠. 무엇보다 나병은 처음에는 고통을 느끼다가도 조금 지나면 무감각해지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죄의식에 고통하다 나중에는 죄를 반복하여 지어도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무감각하게 되어 더 중한 죄를 짓습니다.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하죠.그렇다면 어떻게 추하고 냄새나는 나병같은 죄를 우리가 씻음받고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안되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죄의 담을 허무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며 치료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그에게 어떤 방향을 주십니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14) 당시에는 제사장이 나병의 발생을 확진하고,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확증했습니다. 제사장에게 완치 되었다는 확증을 받은 사람은 다시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죠. 예수님은 치료받은 그를 가정과 사회로 환원시키셔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보이도록 하심으로 제사장들에게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 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 많이 퍼져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자신의 병도 치료받고자 몰려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그들에게서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십니다(16). 예수님은 종종 사람들의 요청보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우선순위를 두시고 물러나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다시 초첨을 맞추고자 함입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칭찬은 우리에게 때로는 위로이지만, 때로는 위험입니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우리는 결과가 좋으면 머물고 싶고, 나쁘면 떠나고 싶어합니다. 환호에는 머물려고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떠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물기 위해서는 바쁠수록, 일이 잘 될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종교계의 전문가 또는 지도자들이 예수께 온 것입니다. 아마 깨끗하게 된 나병환자를 확인한 제사장이 상부에 보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온 목적이 무엇이죠? 조사차 나온 것입니다. 조사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증거를 기초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 증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누가는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은 영육간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도 위대한 치료자로 묘사합니다. ‘너희에게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4:2). 본문은 하나님의 권능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로 그 능력을 지닌 메시야이심을 아울러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집 안에 가득 차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죠. 이쯤되면 포기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대들보 위에 있는 갈대, 나뭇가지, 진흙등으로 덮어놓은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구멍이 뻥 뚫렸습니다. 병자를 침상째 무리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매달아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렸겠죠. ‘, 뭐여~ 예의도 없이...’ ‘남의 집 다 망가뜨려 놓네~.’ 어떤 사람은 유투브에 고발할 요량으로 스마트폰으로 찍기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어떤 믿음을 보셨습니까?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확신하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무례함보다 간절함을 보셨습니다. 관습에 메이지 않고 창조적이며 도전적인 믿음을 보셨습니다. 아마 그들이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남의 지붕를 뚫지 않았겠죠.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이 나를 환영하실까? 나를 낫게 해 주실수 있을까? 수치만 당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장애물을 뛰어 넘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나 신분이나 예의보다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11:6). 부족한 점이 많이 있을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께서 영접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데려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너의 중풍병이 나았다말씀해주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그가 중풍병에 걸렸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보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만을 아니라 죄로 망가진 우리의 영혼도 치료하길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 구원임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전체적이며 완전한 치유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선포를 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이 신성 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 그들의 말대로 구약 시대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속죄 제사를 거친 뒤 제사장만이 죄 사함을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너희는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여러분~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둘 다 어렵습니다. 죄사함이 더 높은 권세이지만 눈앞에서 당장 입증하기에는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이 더 어렵겠죠. 실은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는 의도는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운가를 알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둘 다 불가능한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조사를 나왔으면 예수님이 한 말과 예수님이 행한 일을 증거삼아 성경도 찾아보고예수가 도대체 누구인지제대로 해석하고 규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UBF가 어떤 곳인가조사 나왔다가 이곳에서 예수님 만나고 구원받고 목자가 되어 복된 삶을 살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들도 축복받길 원하십니다.

 

24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예수님은 자신을인자라고 하십니다. ‘인자란 말은 복음서에 90여회 나오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 26회가 나올 정도로인자란 말은 누가복음의 핵심 사상입니다. ‘인자란 용어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인자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어 위에서 중풍병자를 달아 내림으로 믿음의 길을 열었다면 하늘에 계셨던 성자 예수님이 하늘을 뚫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3:13)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하늘 아버지에게로 이어지며, 누가복음 마무리는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납니다. 둘째, ‘인자는 예수님이 메시야되심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전체 요절인 눅19:10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이를 위해 오셨습니다. 셋째, ‘인자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심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고난없이 영광을 얻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난과 죽임을 당해야만 합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또한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죄사함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라고 생각했습니다(왕상8:34,39) 죄사함을 받기 위해 성전에 나가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죄사함의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하늘에서 죄를 사하던 하나님이 그 권세를 가지고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풍성한 사죄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 되어 주셨고,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의 보혈을 힘입어 죄를 자백하면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 놀랍지 않습니까?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까지도 다 용서하셔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완전히 깨끗케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근본적인 죄사함을 받았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또 다시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때 마귀는 우리에게 정죄의식을 심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야? 네가 그러고도 목자야? 웃기고 있네조롱합니다. ‘넌 이제 끝났어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사죄의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이때에도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자백한다는 말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단순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왜 사죄의 확신이 중요합니까? 사죄의 확신이 있을 때 오히려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잘 이루어집니다. 생명력있게 주를 따르며 열매맺는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아무 조건없이 죄사함을 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 그러자 중풍병자가 사람들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매우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예수님은 종교계를 찢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무엇을 알아야 했습니까?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시는 하나님이구나. 바로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구나그리고 베드로처럼 무릎꿇고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이렇게 고백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소한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렇게 라도 물어야 마땅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옥에 갇혀 있던 세례요한(제사장 가문출신)이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답하십니까?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9:22) 이 말을 전해 들은 세례 요한은 아마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 놀라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적하고 죽이고자 하죠.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은얼마나 신앙 경험을 많이 했느냐보다예수님을 얼마나 잘 아느냐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의 됩니다. 그 분의 통치 아래서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다른 무언가를 구하기에 앞서 모든 고통과 사망의 근원인 죄를 사함 받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그 은혜를 찬양해야겠습니다. 죄 사함의 확신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