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 6 강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 / 누가복음 5:27-39
요절 /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의 주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눅19:10) 오늘 본문도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사건 중 하나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죄인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였지만 다른 죄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레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래 레위는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아들로 그 이름의 뜻은 "연합"이었습니다.
(창29:34) 이스라엘 역사에서 레위 후손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임사역자들이 되었고 그들
중에 제사장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본문의 레위의 부모님은 그가 장차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 그와 같이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세리가 되었습니다. 곧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세무서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도리어 요즘 같이 전산으로 모든 것을 신고해야 되는 때, 세금 신고를
잘 못하는 어르신들이 오시면 잘 도와주고 섬겨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 세리들은 사회적으로 아주
악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지옥의 불쏘시개로 여기는
이방 죄인을 위해 일하다니 민족적으로도 변절자였습니다. 로마 정부는 일정 지역에 일정한 액수를 할당하였고, 그 지역에 세금 징수하는 권리를 최고 입찰자에게 팔았습니다. 그
권리를 사는 사람이 세리가 되어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넘겨주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금징수권을
따기 위해 많은 돈을 걸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자기들이 정확하게 얼마의 세금을 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처럼 세금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고지서로 보내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세금들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무조건 내야하는 인두세, 곡물의 1/10, 그리고
포도와 기름의 1/5을 내는 토지세가 있었습니다. 각종 수입에
대해 내는 소득세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종류의 의무세가 있었는데 심지어 짐마차의 각 바퀴마다
매기는 세금, 마차를 끄는 짐승에게 매기는 세금도 있었습니다. 특정
상품에 대한 세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 짐을 풀게 하고 마음대로 세금을 물릴
수도 있었습니다. 세금을 낼 수 없으면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세금을 내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면허증을 갖고 공공연하게 갈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그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눅3:13)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만큼
큰 죄인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울리는 사람은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기들이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법정의 증인으로도 설 수 없었습니다. 이런 레위가 오늘도 세관에 앉아 장부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경멸과 비난의 눈길로 그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에이, 저 세리 녀석!"하는
마음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목자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그의 무엇을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세관에 홀로 앉아 있는 그의 겉모습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도 보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눈은 불꽃같다고 하였습니다. (계1:14, 2:18, 19:12) 그 눈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을 관통하여 보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외로움을 보셨습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고 동족과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그의 양심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는 친구가 필요한 사람, 구원자가 필요한 사람인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한없는 긍휼의
눈으로 보시며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부드러운 음성은 직전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기 앞에 엎드려 있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음성으로 레위의 외로운 영혼을 만지신 것이었습니다. 레위는 그 동안 아무도 자기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멀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첫째로, 레위
자신의 삶의 방향을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레위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 왔습니다. 동족들이 고통을 받든 말든 그는 어려운 시대에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자존심도 버리고 민족도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그런 삶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인생의 분명한 방향전환을
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함께 가자는 초청의 음성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친구가 필요합니다.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하와를 창조하신 첫째 이유도 홀로 있는 그가 좋지 못하여 그의 동반자요 친구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 결혼하신 분들도 남편이요 아내 이전에 먼저 상대방의 친구요 동반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외로운 레위를 친구로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요15:14,15)
셋째로, "나를 따르라."
이는 더 나아가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인격과
믿음을 배우는 제자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고 레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언약을 저버린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정죄하는 대신 친구요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당시 비난 받는 죄인이었지만 레위에게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약점을 감당해 주시며 성 마태로 키우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목자의 부르심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과거에 가버나움 지역의 세금징수권을
따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팔았을 것입니다. 많은 비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견뎠던 것은 세리로서 그가
누렸던 재물과 권력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다시 세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첫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렸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돌아가서 다시
고기를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로서 사표를 쓰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레위는 이해타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이해가 관련된 문제에서 충동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그는 자기가 가진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이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되게 회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그러한 래디컬한 결단을 한 것을 5분 뒤에 후회했을까요? 아닙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이 잔치는 레위의 고별 잔치였습니다. 이제 세리 직업을
그만 두면서 그 동안 도와주었던 친구들을 초청하여 감사의 말을 하고자 하는 잔치였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시켜드리고자 한 잔치였습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더 귀한
예수님을 얻게 되어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을 몰랐습니다. 그가 모은 물질로 자기만을 위해 쓸 때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웅크린 손을 펴서 베풀었을 때 그의 영혼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임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하늘나라에 홀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잃어버렸던 영혼이 예수님을 구주로 만났을 때 그 기쁨을 혼자 간직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면 속이 쓰릴 것 같고 망할 것 같았는데 도리어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어이, 김세리 이것도 좀 먹어봐, 어이
박세리, 어서 와! 여기 앉으시라고!" 하며 흥이 넘쳤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잔치였습니다. 고소한 음식 냄새와 큰 웃음소리가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레위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인상을 쓰면서 괴로워하며 결단한 그러한 자기 부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전혀 후회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만남은 짧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도
따를 만 한 분으로 만났습니다.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가 잔치를 베푼 것도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5장 전반부에서도 보았듯이 예수님의 첫 제자들도 배와 그물과
가득 잡은 고기를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레위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비밀은 그들이 예수님의 진가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날마다 더욱 예수님의 가치를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 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골2:3) 모세도 이 예수님의 가치를 발견하고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히11:26)
예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다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1:17) 우리가 날마다 이 예수님의 진가를 발견하며 넘치는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번째 종류의 죄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잔치 주변에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차마 그 모임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밖에서 이
잔치를 들여다보고만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죄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마태복음에 따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잡수시느냐?"하며
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9:11)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이런 사람이 너희가 따르는 선생이냐?"라고 예수님을 비방한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이와 같습니다. 중범죄인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처럼 이런 죄인들은 사회에서 격리시켜두어야 한다,
높은 담을 쌓아 이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가
분리주의자라는 뜻인데 그들은 당초의 바벨론의 세속 문화에서 분리하고자 했던 본래의 정신을 잃고 자신들만의 우월감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정통한 율법학자였던 이들은 전도서 7장 20절의 말씀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했던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왕상8:46) 이런 말씀들을 알고 있던 그들도 물론 자기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들과 비교하며 그래도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18:11)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였습니다. 저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다면 의사는 쓸데없습니다. 병원은
문을 닫고 우리 의사 목자님들은 실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병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의사입니다. 어떤 분은 아픈데 의사의 도움을 거절하고 그냥 버티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영적으로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한
영적 의사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겐 내가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 건강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롬3:10)
바리새인의 문제는 그들이 의인이라서 예수님이 필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저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저도 의인이 아닙니다. 저도 회개하고 싶습니다." 라고 해야 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상대적인 의로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나병환자처럼 병을 깨닫지 못하면서 아주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자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하시며 엄청난 저주를 퍼부으십니다. 아니, 예수님이 왜 그들에게 이토록 혹독한 말씀을 하시는가요? 저는 처음에 그 부분을 읽으며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그들이 조상들이 한 짓이 나쁜 것임을 시인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무섭게 저주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지?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에서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들은 조상들에 대해 상대적인 의로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읽으며 교만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악인들을 비판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말해야 되었나요? 그들은 이렇게 말해야 되었습니다. "주여, 우리도 조상들과 똑 같은 죄인입니다. 그들 시대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들과 똑 같이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시고 지켜 주십시오!" 하고 했어야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실패한 사람들, 범죄한 사람들을 교만한 마음으로 판단하며 상대적인 의로움을 갖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세, 그러한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우리가 그들과 똑 같은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 의로움에 빠지면 남을 비판하면서 "아,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하고 생각하며 자기를 높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이런 우리가 왕바리새인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죄인인 줄 아는 죄인이 있습니다. 또
죄인인 것을 아는 죄인 중에도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감기 정도 걸린 것처럼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불치병에 걸린 심각한 죄인임을 깨닫는 죄인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아서 회개의 기회도 놓치고 성령께서 그들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기회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오늘날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아닐까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상대적인 의로운 마음을 갖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 회개하며 진실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금식이라는 규례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금식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경건을 실천하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특히 죄에 대한
회개와 함께 따라오는 것이 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회개를 이야기하면서 금식은 커녕
먹고 마시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예수님, 만일 당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면, 왜 죄인들과 함께 회개의
표시인 금식을 실천하지 않으십니까?", "죄인을 회개시킨다면 죄인과 더불어 금식을
해야지, 지금 당신들은 앞뒤가 안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하는
것입니다.
34절과 35절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당시 이스라엘은 남녀가 결혼하면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머물면서 일주일 동안 집을 개방했습니다. 부부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이 잔치 동안에 손님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일주일 동안 손님들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혼인 잔치 동안에 손님들은 금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금식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금식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따르기 위해서 금식하는 거라면, 지금
그들 곁에 계시는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르면 됩니다.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바로 물어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더 간절히 구하기 위해 금식한다면,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금식이라는 단계를 거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들
곁에 계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겁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금식보다 그 분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 분을 직접 보고 그 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의 시기를 잠시 미루어 두신 겁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상황은 변할 것입니다. 지금과 다른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때는 금식하기에 합당한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36-38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낡은 전통에 매여 예수님의 신선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문제점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 옷과 낡은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는 결국 같은 주제를 가르쳐 줍니다. 새로운
것은 그것과 어울리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가르침을 옛 방식으로 해석하며
따르려 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에 맞는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39절입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사람들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익숙하고 편한 옛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새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묘사이면서 동시에 경고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찢어지고, 터지고, 쏟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새 포도주는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 즉 복음이고, 낡은 가죽부대는 사람들이 만든 사상, 제도, 전통 즉 종교를 말합니다. 복음과 종교를 쉽게 설명하면 복음은 생명력이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으니까 무엇을 할 때마다 감격이 있고,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종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으니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해도 감동, 감격, 기쁨,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열심과 반복되는 형식에만 매이게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변화를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종교 생활이 아니라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히
죄를 고백하고 사함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 분을 따르는 감격과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대적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형편없이 보이는 죄인들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종교적 전통에 매여 살며 상대적 의로움에 안주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가 그랬고 중세가 그랬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남을 비교하여 상대적인 의를 갖는 죄를 회개하고, 넘치는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