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부활절 (제1강)
부활의 복음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우리 구주 예수님의 부활을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 조금도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이 사실은 인류 역사상, 또한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가장 놀랍고 기쁜 소식입니다.
고린도전서는 AD 54년경, 사도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으며(BC27) 상업, 무역, 정치의 중심지로 번창하였습니다. 약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12개가 넘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주신 아폴로 신전이 중앙에
있었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유명하였습니다. 이 신전에는
1,000명이 넘는 신전 매춘부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도시 전체를 타락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이 된다는 헬라어 "코린티아조마이"는
성적으로 타락한다는 의미를 가질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음란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그 도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제
2차 전도 여행 중 AD 51년경부터 약 1년 6개월간 그곳에 머물며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린도 사람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시며 그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의
음란하고 세속적인 영향력을 이기며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곳을 떠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다시 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세속적인 영향력이 들어와 다시 음란과 우상숭배에 물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분열되어 서로 판단하며 정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돕기 위해 16장에 달하는 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는 특히 이 편지의 13장에서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들의 근본 문제는 복음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세속적으로
변했고 그로 인해 모든 문제가 생긴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복음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그들이 처음 가졌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신앙을 회복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물질문제, 가정문제, 동역문제, 세대차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잡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 새롭게 배우며 생생한 부활의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바울은
먼저 그들을 “형제들아”하며 애정 어린 호칭으로 부릅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이 넘칩니다. 이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보통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이미 전했던 복음을 다시 한 번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다.
복음 가운데 섰습니다. 복음이 주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복음에 대한 감격이 시들 시들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그들에게 전했던 복음을 다시 상기시키고자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자들이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의 그 감격이
지금까지 나의 마음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가? 보통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 복음을 믿었을 때 나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구원의 감격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다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 부활
소식을 들어도 이미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복음의 은혜가 점차 사라지면서 세상의 염려와
걱정이 들어오고 세상의 관심사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고린도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2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고린도 성도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지 않았습니다. 헛되이 믿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이후 거짓 교사들과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잡하게 한 결과입니다. 세상의
영향력이 교회 공동체에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일깨울
수밖에 없었고, 아울러 부활의 증인들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3,4절에서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일반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가르친다고 할 때 이를 넓게 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 곧 성경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의미합니다. 지금
바울은 여기서 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3). 사람이
죽는 것은 슬픈 소식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산 사람을 십자가
위에 눕혀서 양손과 발에 못을 박고 그 나무를 세워 물과 피를 다 흘리게 하여 죽게 하는 그야말로 끔찍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죄인같이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 죽으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의 죽으심이 '우리 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의미 있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셔야 되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에덴동산 사건을 잠간 다시 언급합니다.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낙원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자유를 주셨지만 낙원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시고자 하는 계명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의 영적 질서를 지키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하신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무나
과실을 수 천 그루도 말씀 한 마디로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생긴 관계성 파괴였습니다. 이 관계성이 파괴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죄는 바이러스와 같아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이 죄의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망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죄의 대가입니다. 형벌입니다. 여기서의 사망도 단순한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27절은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내가 분명히 죽었는데 왜 존재하지?"라고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것에
엄청난 두려움으로 떨 것입니다. 죄인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서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죄로 인해 이러한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인간에게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늪에 빠져 혼자는 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자가 없는 인간은 절대적인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도 그 분의 속성상 범죄한 인간을 처벌하지 않고는 용서할 길이 없으셨습니다. 죄사함을 주고 싶으셔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실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 우주가 떠날 만한 놀라운 방법을 쓰고자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죄 없는 자기 아들에게
뒤집어 씌워 죽게 하심으로 죄의 값을 치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모든 자에게 그 아들의
공로를 전가하여 의롭다 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 방법은 실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계획을 작정하시고 때가 되자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므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제 단 한 가지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곧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으면, 곧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을 믿으면 죄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너무 쉬워서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둘째, 복음이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4)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사
약 6시간을 계시다가 운명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였고, 한 병사는 예수님이 이미 죽으신 것을 알고 그의 다리를 꺾지 않고 대신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19:34,35는 말합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이를 본 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자기가
분명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증언이 참되며 독자들이 이를 믿기 원한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내려져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의
죽음과 묻히심은 로마 병사들과 아리마대 요셉과 장사한 자들에 의해 목격되었습니다. 이렇게 묻히신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는 온 우주가 진동할 만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우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게 하였고,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시적으로 부활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죽음
권세를 정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시고 영원히 부활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복음의 내용은 어떤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2,000년
전에 예수님에게 이루어졌던 한 사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사건이 나를 위해 있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건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로마서 4: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나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나를 의롭다하기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나의 것이 되어 내가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한 일이 되냐고요?
만유의 심판장이신 하나님이 내가 그 사실을 믿을 때 그렇게 쳐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의가 전혀 없지만 예수님께 대한 나의 믿음 한 가지를 보시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내가 행한 것으로
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롬4:6, 4:24) 죄사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고, 그 길만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혜를
베푸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고만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 마호메트, 공자도 착하게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기독교도 악하게 살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독교는 사람은 착하게 살려고 해도 착하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요 자기 힘으로 절대로 선하게 될 수 없는
존재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는데 이 사실을 믿는 자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일은 또한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고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와 일생동안 함께 하시며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십니다. 성숙한 사람, 예수님을 닮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아가십니다.
복음의 두 기둥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이 치러졌으면 부활은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요?”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으로 우리의 죗값은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가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는 했지만 결국 죽음의 세력에 굴복 당하신
것이 됩니다. 마치 사형수가 죽음을 당하고 끝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죗값이 치러졌으나 우리가 다시 살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의 부활을 믿을 때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어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입니다. 시편16:10은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26:19절은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언 구절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나 사건이 그러합니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사흘간 있었다가 육지로 나온 사건을 보십시오. 명백하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요나보다 더
큰 이"라고 하셨습니다. (마12:41)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어떤 예수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을 믿기보다, 그저 예수 믿으면 축복해주시는 분 정도로 믿으면 그것은 헛된 믿음이요 결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혼합시키고 희석시키는 자들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하며 그들을 저주하였습니다. (갈1:8,9)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을 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행1:22)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만 그 사실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됩니다. (히4:2) 사람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을 신앙의 초보, 알파벳의 ABC 정도로 여깁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은 시작
단계이면서 또한 최종 단계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모든 충만한 것을
받고 누립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부활의 생명력이 넘칩니다.
이 땅에서 죽음을 모르는 불사조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가 믿는 것이지만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2:8)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믿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미 부활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로
사망이 주는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멸시하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역사상의 사건이라면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있을까요? 5-8절을 보십시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쓴 시기는 A.D. 55경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 후 약 25년 정도 후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가 기록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부활의 증인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수제자 게바 곧 시몬 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는데 그 중에 지금까지, 곧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 대부분이 살아 있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증언입니다. 지금 당장,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 한 300~400명 정도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법정에서 두 명의 증인만 있어도 효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수백 명의 부활의 증인을 세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주님의 살아계신 때에는 믿지 않았던 형제입니다. (요7:5)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야고보를 특별히 기록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확실히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게 된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격 없는 자기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환상을 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자기가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이상 5-8절에서 반복되면서 강조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보이셨다”입니다. 그들이 "보았다(saw)"는 표현보다 그들에게 "보이셨다(appeared)"라고 기록된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부활하셔서 그들을 인격적으로
찾아가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들의 소망이 되었고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지금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이것입니다. 주 예수님! 주님의 부활을 감사 찬양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희들을 찾아와 주시고 변화된 인생을 살게 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부활신앙도 희미해졌는데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우리 각자에게 찾아와 주시길
기도합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충만히 허락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 예수 믿는 자들을 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도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하실 뿐 아니라 사도요 부활의 증인으로 택하셨습니다. (9-11) 바울은 이 은혜에 잠겨 자기가 완전히 녹아 버렸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그 은혜만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며 많은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고난과 업적 속에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당시 헬라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혼은 불멸하지만 육체는 소멸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상식이라고 여깁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난센스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활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복음 전하는 자의 삶이 헛것이 됩니다. 또 복음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됩니다(15).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게 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두 거짓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그 역사적 사실성 위에 굳게 서 있습니다. 많은 대적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했고 기독교를 박멸하고자 하였지만 부활의 복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지난 2천 년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망의 닥친 것은 한 사람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담은 사망의 첫 열매였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에 새 생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만큼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이러한 부활생명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완전히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부활하여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세상의 종말이 옵니다. 그날에 주님께서는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첫째, 사망 권세를 멸하십니다. 둘째, 만유의
질서를 회복시킵니다. 24절에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파하신 후에는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만물을 저의 발아래 복종케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아버지께 복종케 됩니다.
그날에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괴된 창조의 질서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이러한 소망과 믿음을 가진 바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의 생애는 한 마디로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날마다 죽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슬퍼하거나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난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불사조와 같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 하겠다고 했습니다. (31b) 부활을 믿지 않는 세상
동무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 열심히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향락주의는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에 기초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속지 말라” (33a) 우리가 세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부활의 복음을 온전히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죽은 자의 부활을
굳게 믿을 때 날마다 기쁨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부활의 믿음과 소망으로 크게 기뻐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 복음을 믿는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요5:24) 이미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았습니다. (엡2:6)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나중에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1 나노초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복음을 굳게 지킴으로 이 땅에서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이미 면류관을 쓴 승리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