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활절 특강 2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말씀/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 철학과 사상의 영향으로 영혼의 불멸성과 영원성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영원성과 불멸성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몸은 본질적으로
저급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몸은 영혼에 비해 저급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저급한 몸을 벗어버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이 일종의 구원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내용 중 영혼구원에 관한 부분은 아주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영접한 순간
그들의 영혼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복음은 영접한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온전한 구원에 이릅니다. 문제는
영혼이 구원에 이르렀다고 해서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몸의 부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의 부활 없이 영혼 구원만으로도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각종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그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예배드리는 도중, 혹은 개인적으로 기도하다가 방언을 할 때 그들의 영혼이 이미 천사와 같이 되었기 때문에
천사의 언어로 예배드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탁월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었습니다. 탁월한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것을 자랑하며 교만해졌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깔보았습니다. 한편
몸의 본성과 욕구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적인 욕구나 시기심, 이기심과 같은 인간적인 욕망이나 욕구에 대해 그것은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 내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도 중 은밀한 가운데 음행을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성도들끼리 법정고소하는 문제 등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교회 중 가장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탁월한 교회라고 스스로 자랑했으나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영적으로 분별력이 약하고 어린 교회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본 서신서를 통해 여러가지를 교훈합니다. 그중
오늘 본문의 15장을 통해서는 우리의 구원이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며,
우리의 구원은 몸의 부활을 통해 완성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35-38절을 보십시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바울에게 반문합니다. “사람의
몸이 한 번 죽어 시신으로 변하고 썩어 흙이 되면 그것으로 끝이지 어떻게 몸의 부활이 있단 말입니까? 만약
정말로 몸의 부활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몸으로 온다는 것입니까?”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대답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You fool! 농부가 씨를 뿌릴 때 그 씨가 어떻게 됩니까? 씨는
죽지만 그 죽은 씨를 통해 밀이나 장미, 튤립같은 것들이 나타납니다.
씨만 보면 이 씨를 통해 장차 어떤 것이 나타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돋보기를 갖다
대어도 심지어 현미경을 갖다 대어도, 혹은 칼로 잘라서 분해해 보아도 장차 어떤 것이 이 씨를 통해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뭔가 나타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씨를 땅에 뿌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어떤 씨는 장미로, 어떤 씨는 튤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와같이 사람의 몸이 죽어 땅에 묻히는 것은 마치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몸은 부패가 시작되어 한 줌으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죽은
몸을 통해 놀라운 부활의 생명체가 나타납니다.
39-44절을 보십시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크게 착각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몸에는
다양한 형태의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는 두 발로 생활하기에 적합한 몸이 있습니다. 동물은 네 발로 다니기에 적합한 몸이 있고 새는 하늘을 날기에 적합한 몸, 물고기는
헤엄치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차원이 전혀 다른 또 다른 몸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해와 달과 별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예로부터 문학가들과 시인들이 보기에 해와 달과 별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였습니다. 강렬한 태양은 마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고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수줍어하는 여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밤하늘의 수많은 별은 우리가 죽으면 돌아갈 고향으로 느껴졌습니다. 제 모교인 외대 선배님이신 우리 모임의 한국 대표 김모세 목자님은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결핵에 걸려 치료도
받지 못하고 군에 강제징집되어 죽을 뻔 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죽으면 뭐 어때? 죽으면 별이 되지.’ 윤동주
시인은 별을 보며 다음과 같이 노랬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처럼 우리가 해와 달과 별을 볼 때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같고 각각 그 고유의 영광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런가 하면 이 땅에 있는 수많은 풀과 나무와 꽃을 볼 때 그 고유한 영광이 있음을 느낍니다. 예수님도 솔로몬이 입은 왕의 그 모든 화려한 옷보다 들에 핀 한송이 백합화에 하나님이 더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셨다고 마치 시인이 되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들에 핀 한송이 백합화의 영광과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 별의 영광은 그 영광이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포인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입고 있는
이 몸도 분명히 영광이 있고 아름답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인간의 몸을 조각하면서 또 그림으로 그리면서
인간의 몸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이 죽은 후 그 죽은 몸을
통해 나타날 부활의 몸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씨와 씨를 통해 나타나는 장미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처럼 부활의 몸은 찬란한 영광이 있습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 영광스럽고 강한 몸, 신령한 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몸을 ‘영의 몸(a
spiritual body)’이라고 표현합니다.
45-49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바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과 영의 몸이 어떻게 다른지 보충설명합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은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과 동일한 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어떤
몸을 받았습니까? 아담이 받았던 몸은 흙에 인간의 유전정보가 새겨진 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가 바로 이 인간의 몸을 본따서 만들어졌습니다.
컴퓨터는 흙 대신 반도체라 불리는 돌 위에 이진법으로 여러가지 정보를 새겨넣어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의
눈과 손을 본따 입력장치에 해당하는 스크린과 키보드가 만들어졌습니다. 여러 정보가 새겨진 돌로 된 컴퓨터가
작동하는 것처럼 유전정보가 새겨진 흙으로 된 인간의 몸도 그 유전정보대로 작동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
몸 안에 하나님이 영혼을 불어넣어 인간은 생령(a living soul)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장차 나타날 영의 몸은 어떻게 다릅니까? 영의 몸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받으셨던 바로 그 몸입니다. 이 몸은 재료자체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몸은 더 이상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흙보다 훨씬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몸을 받았던 것처럼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동일한 영광스러운 몸을 받게 됩니다.
51-54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많은 이들이 축구를 아주 좋아합니다. 축구 시합을 할 때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뜁니다. 특히 경기를 지고 있을 때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립니다. 그러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어 심판이 호르라기를 붑니다. “삑 삑
삐익”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뛰던 선수들이 달리던 것을 멈춥니다. 어떤
선수들은 승리의 감격에 서로를 안고 기뻐하기도 하고 어떤 선수들은 패배의 아픔 가운데 그라운드에 드러눕기도 합니다. 잠시 후 선수들은 짐을 챙겨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마치 축구 시합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해 뛰지만 뛸 수 있는 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선수는 시합이 종료될 때까지 뛰기도
하지만 어떤 선수는 감독의 권한으로 시합 도중 교체되어 그 시합에서 영구히 아웃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과 목표를 가지고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심판장이신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종말의 나팔소리를 불게 하시는 때가 옵니다. 그 때가 오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활동이
정지됩니다. 푸틴이 자기의 생각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크라이나에 날리던 미사일도 종말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지면 하늘을 날다가 폭발하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질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던 주식시장도 종말의 나팔소리와 함께 그대로 영원히 폐장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성도들은 어떻게 됩니까?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순식간에, 홀연히’라는 표현은 원문상 ‘눈깜짝할 사이’라는
의미입니다. 눈깜박하는 그 찰나의 순간 성도들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육신의 몸을 영원히 벗어버리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몸, 영의 몸을 입게 됩니다.
55-57절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1945년 8월 15일 세계 제 2차 대전 말기 일본 천황은 무조건적인 항복선언을
했습니다. 일본 천황의 황복 선언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지던 바로 그 순간 일본의
식민지 통치 하에 있던 우리나라의 공기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만세 함성을 외쳤습니다. 이제는 그 지긋지긋하던 일제의 통치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고 기쁨의 함성을
외쳤습니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진 고문을 받다가 평생 후유증을 앓았으며 또 어떤 이들은 죽음에 이르렀습니까? 그런데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과 함께 그러한 고통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제 치하로 인한 고통과 아픔을 다시는 겪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36년간 일제 치하에서 고통하며 고난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모든 인류는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사망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일제 치하라는 그 현실을 잊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교내 신문 하나를 만들더라도 그 내용을 일본 당국으로부터 검열받아야
했습니다. 교내 신문에 불온한 내용을 실었다가는 그 날로 경찰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고 심지어 고문을
받거나 감옥에 갇혔습니다. 연극을 하다가 본래 대본에 없던 불온한 내용을 말했다가 관객 속에 일반인으로
위장한 일본 형사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어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망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주관하고 통치하는 사망의 눈길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통치가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아간 것처럼 사망은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빼앗아갔습니다. 아무리 아둥바둥 살아도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이 생각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허무를 심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였던 윤심덕 씨가 있습니다. 1926년
그녀는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작사하여 불렀습니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그녀는 자신이 불렀던 노래 가사처럼 행복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는 인생의 깊은 허무를 이기지 못하고 29살의 꽃다운 나이에 현해탄에 몸을 던져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 역시 이 허무의 뿔에 깊이 찔렸습니다. 그는
여러 작품을 통해 그의 마음을 죽음의 화살처럼 찌르던 허무를 표현했습니다.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에서 노인은 약 80여일간 물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커다란 청새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3일간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청새치를 잡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청새치를 배에 매달고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상어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밤중까지 상어떼와 사투를 벌였습니다. 죽을 각오로 싸웠고
나이프와 몽둥이가 모두 부러졌습니다. 항구에 돌아와보니 청새치는 앙상한 뼈만 남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죽을 각오로 싸웠으나 앙상한 뼈만 남은 노인의 모습을 통해 인생을 표현했습니다.
작품 속의 노인처럼 우리 인생은 각자 무언가를 얻기 위해 죽을 것 같은 고생을 하고 투쟁을 합니다. 그러한 고생 끝에, 투쟁 끝에 무언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꿈을 갖습니다. 그러한 기대와 꿈이 삶을 살아가는 힘이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보면 결국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어같은 이들에게
뜯기고 빼앗기고 남은 것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앙상한 뼈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끝나 무덤에 묻혀 한 줌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일진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둥바둥거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인생은 누구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밝은 달 아래 혼자 가만히 앉아 곰곰히 생각해보면 삶의 허무가 주는
그 무서운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언젠가는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고 관속에 눕혀 차갑디 차가운 무덤에 묻히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이 인생을 살면서
삶의 희망이 무엇일까. 언젠가는 사형을 당할 사형수가 감방에 갇혀 살면서 한끼 맛있는 식사를 한다고
기쁠까. 잠시 감방을 벗어나 감옥 뜰 가운데 양지바른 곳에 앉아 햇볕을 쬔다고 만족할까. 동료 사형수가 몰래 밀반입한 담배 한 모금을 맛있게 빤다고 행복할까.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이 풍진 세상을 살면서 나의
희망이 무엇일까. 나의 소망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들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잊기 위해 담소화락, 주색잡기에 침몰합니다. 그러나 담소화락을 마치고 홀로 있을 때, 주색잡기를 즐기다 즐기다
모든 힘과 에너지가 다 소모되었을 때 결국은 도망할 수 없는 죽음이 주는 그 깊은 공포와 허무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인생 중 과연 누가 이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 죽음을 이기는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명백히 몸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마치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듯 예수님의 몸은 차가운 대지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씨가 죽은 후 씨의 죽음을
뚫고 대지를 뚫고 아름다운 꽃이 탄생하듯, 죽으시고 땅에 묻히신 예수님의 몸은 부활의 새 몸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이 몸은 결코 다시 늙거나 병들거나 죽거나 썩지 않습니다. 썩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장차 예수님이 입었던 동일한 몸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되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죽음이 주는 모든 허무와 공포와 두려움과 무의미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죽음 자체가 마치 칼에 목이 짤린 괴물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소멸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힘찬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됩니다. 성도들이 천군천사와
함께 부르는 그 찬가는 온 우주를 진동시키는 힘찬 승리의 찬가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바울은 본 고린도전서 15장의 결론으로 58절 말씀을 기록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영혼 구원의 완성이
이르렀다고 생각하며 몸은 구원과 관계없다 여기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몸의 육신적인 본성과 욕심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몸을 입고 살아가는 이 삶은 마치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과 같습니다.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은 새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고 또 소중한 과정입니다. 농부는 겨울기간 동안 씨를 잘 관리했다가 때가 되면 정성껏 땅에 뿌립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몸 안에 살아가는 이 삶의 여정은 부활의 몸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며 또 소중한 기간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몸의 본성과 욕망을 좇아 살면서 죄를 지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몸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몸을 사용하여 항상 주의 일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몸의 눈으로 성경을 읽기에 힘써야
하고 몸의 입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몸의 손으로 선한 일을 하며
몸의 발로 사랑이 필요한 성도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부활의 날 성도들은 그러한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올 한 해,
또 몸 안에서 살아가는 남은 삶의 기간 이 몸을 사용하여 주의 일에 항상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