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 8 강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 / 누가복음 6:17-49
요절 / 누가복음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상징과도 같은 계명의 말씀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1948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을 위해 구명운동을 벌이고 마침내는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에게만 주신 특별한 계명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담이 됩니다. 나 자신이 이런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계명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비범한 사랑을 소유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우리 각자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세우신 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평지에 내려 오셔서 무리들이 있는 현장에서 제자들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각처에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질병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사도들을 세우신 후 주신 최초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 교훈을 잘 듣고 분명한 영적 가치관으로 삼기 원하셨습니다.
20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지금부터 주어지는 교훈의 1차적인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20b-23절은 복이 있는 세 부류의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어지는 24-26절은 화가 있는 세 부류의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0b-23절입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첫째,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예수님은 먼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들은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이 알기로도 믿음의 3대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부자였습니다. 의로운
욥도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그들의 위대한 왕 다윗도 물론 부유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역설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너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가난’ 그
자체가 복이 된다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난을 찬양하며,
사람들에게 모두 가난하게 살 것을 명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됩니다. 반면에 부요한 자는 의지할 수 있는 재력이 있습니다. 물질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경제적 풍요함이 하나님 나라를 얻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재물 자체를 나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재물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재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하게 하고, 재물이 사들이는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실상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다 만족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라고 다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풍요와 가난의 문제는 오직 하늘의 복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째 요점은 이러합니다. "가난한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너희는 복이 있다."
둘째,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이라는 단어가
앞에 나와 강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주리고 있지만 머지않아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배부른 자들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맛보며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배부른 자들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배부른 자들에게는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가 없습니다.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본문의 맥락을 볼 때 여기서 우는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악하다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였습니다. 이런 세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을 미워합니다. 신자들을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쫓아냅니다. 신자들은 아픔과 외로움에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점은 이러합니다. "나를
믿는 것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받아주시며 큰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고난을 당할 때 울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고 뛰놀라 하십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강조되고 있는 "복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복'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솟구치는 내적 환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환경도 지배할 수 없는, 내면의 깊은 심연에서 솟아나는
환희, 희열, 행복, 만족, 평안, 안식, 절대 기쁨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복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의 약속이 있기에 믿음으로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런 복을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이
바로 천국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부요한 자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들은 세례 요한이 책망한 대로 가난한 이웃에게 옷 한
벌 나눠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눅3:1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처럼 자신만의 일락을 위하여 창고에 재물을 쌓는 자들입니다. (12:19) 예수님은
이런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18:25)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자들에게 다 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이웃의 배고픔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풍요를
나누는 사람이라면 그는 복이 있습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매우 부유한자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구체적인 회개의 삶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눅19:9)
25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예수님은 배부른 것이나 웃는 것을 반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배부름이나 웃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웃는 자는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아서 웃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에게 화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잠3:4)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은 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는 각 사람의 입맛대로
기준을 바꿀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좇는 자는 결국 그 끝에서 화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들의 인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한분을 영화롭게 하고자 애쓰는 사람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 곧 복된 사람입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네
이웃은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핵심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율법의
진정한 정신은 원수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할 때 원수들이 생깁니다. 집안 식구는 사랑의 대상인데 예수님 때문에 일시적으로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어떤 형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떨이에 맞아 이마가 깨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직장 동료들로 부터 때로 따돌림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미움 받고 모욕을 당할 때 참기 어렵습니다. 같이 미워하고 모욕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명하셨습니까? 그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축복하고,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눅23:34) 이 주님의 사랑을 덧입은 스데반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원수들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 질러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7:60) 그는 목숨을 바쳐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여기서
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시아곤'인데 이는 턱이나 턱뼈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가볍게 뺨을 때리는 모욕 행위 정도가 아니라 턱뼈를 갈기는 폭력적인
행위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출22:26과 신24:13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겉옷을 전당잡게 되면 그날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겉옷이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을 빼앗긴다는 것은 밤에 추위로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속옷도 주라
하십니다.
30절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이 말씀을 하시는 의도는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계산된 행동으로 다시 받을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처럼 주는 것을 뜻합니다. 실상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강도의 폭행을 방관하라거나 절도자의 손을 제지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손실이나 이해타산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소중한
영혼에 상처를 입히지 않을까를 우려하시며 헌신적으로 구제하라는 뜻으로 하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는 모든 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Golden rule,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칭찬듣기는 좋아하면서 남을 칭찬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또
무시를 당하기는 싫어하면서 무시하기 잘 합니다. 인정받기는 좋아하면서 인정하기는 싫어합니다. 비판받기를 싫어하면서 비판하는 데는 선수입니다. 이러한 본성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문제만 생기면 주위 사람들은 원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해야 합니다.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으면 먼저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준을 설정해 주십니다. 먼저 신자들이 실천해야 할 사랑이 불신자들의 사랑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자기를 선대하는 사람에게 선대합니다. 돈을 빌려줄 때도 이자를 돌려받을
생각을 하면서 빌려줍니다.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랑은 칭찬받을 것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35a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상이 큽니다. 또한 이러한 생활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로 악한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합니까? 35b-36절을
보십시오.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 말씀은 우리의 도덕과 윤리의
표준은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인자하십니다.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자비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의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한 그 사람, 내게 실제적인 악을 행한 그 원수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 것도 힘든데, 용서에서 더 나아가 사랑하라고요? 그가 지금도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 너무 심하시네요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 도달할 수 없는 명령으로 나를 괴롭게 하시네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더 엄격한 율법으로 무거운
멍에를 지우려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에 매여 눌린 우리를 자유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높은 수준의 율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은 그것을
우리 힘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지키게 하시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신30:6) 그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자기 가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겸손히 영접하고
순종하고자 할 때,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불가능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영으로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을 주셔서 그렇게 하도록 하십니다.
(겔11:19,20)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을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결단하고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로 빚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소망입니까!
37절을 보십시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이 말씀은 물론 아무런 비판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판단을 하며 삽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 등등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임이나
이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비판한다는 것은 영어로 Judge 로 되어 있는데 재판장의 자리에서 죄인을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는 의롭다 여기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안 될까요? 이는 우리가 그 사람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만한 충분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같은 죄인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공의롭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판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거나, 다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주면, 하나님은 우리가 준 것 그 이상으로 후히 돌려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가 얼마를 헌금했다 또는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얼마를 주었다고 하여, 이튿날 더 많은 물질을 우리에게 그대로 돌려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시점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넘치게 채워주십니다. 영적으로 풍성하게 해주십니다. 가족과 형제 우애를 주시고 무슨 일을
하든 형통하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앞으로는 벌지만 뒤로 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뒤로 새지 않게 하시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준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게 하십니다. (말3:11)
39절을 보십시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집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습니다. 40절에서 '온전하게 된 자' 라는
것은 영어로 'fully trained' 인데 충분히 훈련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곧 그들이 현재는 맹인과
같이 분별력이 없지만 충분히 훈련을 받으면 그들도 예수님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들이 사도라는 타이틀만 즐기고 영적 훈련을 받지 않으면 자기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구덩이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는 부지런히 영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을
사랑하는 자는 끊임없이 성장합니다. 그러나 영적훈련을 받지 않는 자는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으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는 자와 같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압니다.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어떤 나무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자신이 만일 포도나무라면 포도나무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시나무라고
말해도 자신은 여전히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나무, 선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늘
마음에 선한 것을 쌓고자 우리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의 초점은 언제나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입니다. 외면적인 것은 내면적인 것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내면을 잘 관리하고 내면에 선을 쌓는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의 주옥같은 평지보훈은 제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물과 같은 말씀이라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46-49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부르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비판하지 말라', '주라', '마음에 선한 것을 쌓으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그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하신 한 말씀이라고 온 힘을 다하여 노력하며 기도하며 순종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누구와 같습니까? 그는 마치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 집은 든든히 섭니다. 사납게
흐르는 탁류가 그 지은 집에 부딪칠 때가 옵니다. 그러나 그 집은 끄떡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마치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홍수가 나고 탁류가 몰아치면 곧 무너집니다. 말씀을 머릿속에만 쌓아두고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심을 갖고 실천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자기를 가장 잘 돕는 길입니다.
결론적으로, 제자의 삶의 초점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외적인 행위보다 마음에 선한 것을 쌓기에 힘써야 합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쌓고, 진리의 말씀을 쌓는 자가 참된 제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님과 진리의 말씀이 그를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소망을 두시고 원수도 사랑하는 사람들로 키워 가시는 것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예수님을 배우기 힘쓰는 제자들이 되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