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누가복음 9강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누가복음 7:1-17
요절/ 누가복음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오늘 본문에는 2개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두개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예수님이 가진 놀라운 권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만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본문의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먼저 그는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군은 총 28개의 군단(legion)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각 군단은 6천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졌고 로마 군인은 20-25년 정도 복무한 후 전역하면 연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본문의
백부장은 ‘켄투리아(Centuria)’라 불리는 로마 군대의
최하위 조직의 지휘자였습니다. 명칭은 켄투리아(100명의
조직)였지만 실제로는 80명 정도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백부장은 15년 정도 군경력자 중에서 지휘통솔 능력이 우수한 병사들
중 선발되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하사관급 군인으로 상사, 혹은
원사 정도에 해당합니다.
이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4절과 5절을 보면 그를 예수님께 추천한 유대인의 장로들이 말합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합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 우리를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백부장은 15년 정도
전장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80명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그는 전장터의 맨 앞에 서서 적들을
맞아 싸웠을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전쟁 게임을 좋아합니다. 컴퓨터 그래픽 카드, CPU, GPU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전쟁 게임을 하면 정말 내가 전쟁터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나무 위에 숨어있는 적을 향해 총을 탕 쏘면 적이 ‘악’ 비명을 지르면서 나무 밑으로 떨어지는데 정말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은 게임이 아닙니다. 전쟁터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옥입니다. 방금 전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던 전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온 몸이 피범벅이 된 채 땅에
쓰러집니다. 전우를 죽인 적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폭발적인 분노를 느끼며 미친 듯 칼을 휘두릅니다. 그날 전투를 마치고 잠을 청할 때 눈 앞에 전사한 전우가 어른거립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다시 전투 준비를 합니다.
사람이 거칠고 험한 일을 하다보면 마음도 거칠고 험해지기 쉽습니다. 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으면서,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삶의 현장에
거하면서 백부장의 마음도 거칠고 폭력적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의 백부장은 마음이 부드럽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2절에서 백부장이 종을 사랑했다는 표현은 영어성경을 보면 “whom his master valued highly”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백부장이 종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까?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떤 분은 사람보다 일이 더 소중합니다. 내가
가진 꿈과 비전이 사람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람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꿈과 비전도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할 때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설령
젊은 날 가졌던 꿈과 비전을 다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세상에 다시 없을 소중한 한 사람을 얻었으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현재 포천센터를 개척하고 계신 김갈렙 목자님이 좋아하시던 시가 있습니다.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입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본문에서 백부장이 왜 종을 사랑했고 그 종을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백부장이 전쟁터로 떠날 때 종이 목숨을 걸고 백부장의 가족을 지켜주었는지 모릅니다. 혹은 신분은 비록 천한 종이지만 그의 내면과 성품은 그 어떤 로마 귀족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함석헌의 시에 나온 것처럼 백부장은 종을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어느 날 병이 들었습니다. 시름시름 앓더니 곧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죽어가는 종을 보는 백부장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갔습니다. ‘이
사람아 죽으면 안돼. 죽으면 안돼.’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구르던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떤 병자든지 그의 손을 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을 꺼리는 유대인의 풍습을 잘 아는 백부장은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에게 부탁하여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의 부탁을 받은 장로들은 그가
얼마나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또 유대 민족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는지 말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장로들의 부탁을 받은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기 얼마 전 백부장이 다시 사람을 보내 말했습니다. 백부장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오랜 군 생활을 통해서 지휘관의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말의 권세가 강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대장이 하는 말은 중대원 전체를, 대대장이 하는
말은 대대 전체를, 사단장이 하는 말은 사단 전체를, 육군
참모총장이 하는 말은 육군 전체를 지휘통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지휘관들 중 가장 높으신 분
아닙니까? 가장 높으신 분이므로 그 말의 권세가 가장 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제가 감당할 수 없으니 저 같은 사람의 집에 오실 필요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말씀으로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대로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저는 믿습니다.’
9절을 보면 백부장의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님이 가진 그 말씀의 권세를
알았을까요? 참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같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같은 한국말을
쓰고 김치를 먹고 깍뚜기를 먹으니까 그저 그런가보다 했는데 외국인들이 알아보고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외모도 자기들과
똑같고 말도 자기들과 똑같은 아람어를 쓰시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거나 기타 모든 모습이 완전히 자기들과 똑같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인 로마 군인이 예수님이 가진 말씀의 권세를
알아보았습니다.
백부장은 예수께서 어떤 병이든지 고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또
귀신들린 자도 명령하여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시 로마 시대 때
황제는 한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황제의 한 마디면 한 나라가 망할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병을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또 귀신을 몰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황제는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군대로 제어할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영역은 황제의 권한 밖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지휘관의 말의 권한은
그의 지휘 영역 안에서만 그 능력이 발휘됩니다. 대대장은 관할 대대 안에서만 그의 말이 권세가 있습니다. 대대장의 말은 대대 정문을 벗어나는 순간 그 힘을 잃습니다. 다른
대대의 이등병에게도 그 말의 권세가 대대가 다르기 때문에 권한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제어하신다는 것은 그의 통치 영역이 로마 황제보다 더 크고 넓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분은 도대체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 로마 황제의 명령이 로마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효력이
미치는데,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제어하시는 이 분은 나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으신 분이 아닌가! 장로들을 보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한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오시던 그 시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사과를 끌어당기는 지구의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발견했던 뉴턴처럼 자기 집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기시는 예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이런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튀어올라 얼른 사람을 보내 예수께서 자기
집에 오시지 말고 그 권한을 이용하여 말씀만 하시도록 간청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가진 말씀의 권세입니다. 뉴튼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지구가
가진 거대한 힘을 발견했던 것처럼, 그 발견이 뉴톤의 생각과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본문의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이 가진 그 놀라운 말씀의 권세를 깨달을 때 우리의 생각과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성경을 읽던 저의 자세를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편안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허리를 의자에 기댄 채 성경을 읽던데서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예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구나. 예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되지 않을 일이 없고, 예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바뀔 수 있구나.’ 새롭게 깨닫고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팀에서는 팀장의 한 마디가 권세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회장님의 한 마디가 권세가 있습니다. 대학원생에게는 교수님의
한 마디가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최고 통치권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진정한 힘, 최고의 권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은 1시간 동안 만나서 식사하기
위해 수억원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지불해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장 높으신 예수님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 분에게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말을 다 쏟아놓을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한 말씀만 해 주시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그 분께 다가가 간청할
수 있는 특권, 자녀의 특권, 아들과 딸의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고 주 예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전쟁터를 방불하는 직장에 출근하기 전, 나를 괴롭히는 상사를 만나러 가기 전
최고 통치권자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와 대화하며, 나의 필요한 것들을 아뢰는 개인 QT 시간을 반드시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의 믿음대로 죽어가던 종을 낫게 하셨습니다. 11절부터는 오늘 본문의 두 번째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4절을 볼 때 죽은 사람은 한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은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때입니다. 청년의 심장은 용광로와 같습니다. 혹은
기차를 달리게 하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꿈과 비전을 연료로 하여 청년의 가슴은 타오르고 열차가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리듯, 청년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에너지로 청년의 온 몸과 다리는 꿈과 비전을
향해 달립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멀리 있는 것처럼, 동편과
서편, 또 북녘 하늘과 남쪽 땅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청년과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50대가 넘어가면 한 몇일만 날을 새고 그 다음날 제대로
쉬어주지 않고 무리할 때 뇌출혈로 바로 그 자리에서 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날을 새고난
후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어지러우면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몇일 밤을 꼴딱 새도 끄덕없습니다. 한 청년은 시험 기간 1주일 내내 거의 밤을 샜습니다. 그는 시험 기간이 끝나면 밀린 잠을 푹 잘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이 농구하러 가자고 하니까 온 몸에 땀을 흘리며 격렬하게 농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만화책을 가득 쌓아두고 밤새 만화를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끄떡 없었습니다.
본문의 청년도 그러했습니다. 젊음의 생명력과 기운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싱싱한 꽃도 거칠고 맹렬한 비바람에 한순간 꺽이고 땅에 떨어지듯, 제 아무리 튼튼해 보이는 나무도 한 순간 폭풍우에 뿌리채 뽑히듯 청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병이나 사고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12절을 보면 그는 한 어머니의 독자였습니다.
어머니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라는 작품을 남긴 ‘박완서’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1950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입학식을
치른 지 겨우 닷새 만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953년 결혼한 후 네 딸과 외아들을 키우면서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40세가 되던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레지던트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1988년 만 25세의 젊은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아픔과 슬픔을 일기로 기록한 것이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작품입니다.
이 일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 2004년에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하루하루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기록한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사랑하는
독자를 잃은 어머니의 그 아픔과 슬픔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박완서 씨의 큰 딸은 아들은 잃은 어머니가 혼자 계시다가 큰 일이 날 것 같아 어머니를 부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어머니가 원기를 회복하도록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박완서 씨는 그 음식을 먹으면 먹는대로 전부 다 토했습니다. 딸에게
미안해서 몰래 몰래 토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지 25년 2개월밖에 안 된 아들, 병 한번 치른 척 없고 청동기처럼 단단한
다리와 매달리고 싶은 든든한 어깨와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코와 익살부리는 입을 가진 준수한 청년인 아들, 이
아들을 데려가신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들이 죽은 해가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습니다. 사람들은 큰 잔치를 한다며 웃고 떠들고 춤을 추는데
그녀가 만약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전국에서 아무도 웃지 못하도록 매서운 명령을 내리리라 생각했습니다. 독자를 잃은 애미를 보며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상대방을 볼 때는 그 자리에서 당장 꺼져
없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잊으라는 말,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속으로 격렬한 반감을 느꼈습니다. 25년 2개월
동안이나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아들, 내 기쁨이요, 보람이요, 희망이요, 기둥이었던 아들. 그
아들을 다 잊어버리라니 어떻게 그렇게 모진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까닭이 남아있다면 그 애를 기억하며 그 애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로 고통받는 일뿐이거늘 어찌 그 아들을 잊으라 하는가 생각하며 목이 쇠도록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 땅 속에 누워있다고 생각할 때 발작적인 설움이 복받쳤습니다.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돌진했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혀 몸부림쳤습니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뜨거운 철판 위에서
들볶이는 참깨처럼 온몸이 바삭바삭 타 들어갔습니다. 탈진해 마침내 쓰러지듯 무의식의 세계, 잠의 세계로 들어갈 때 차라리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탈진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얇은
책이어서 금세 읽을 줄 알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아픔은 얼마나
큰 것일까요. 본문의 어머니가 느낀 슬픔과 아픔은 본인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가늠하기 힘들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과부의 아픔도 크거늘 외아들을 잃은
아픔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요.
12절을 보면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습니다. 다들 각자 생계로 바쁘겠지만 이 과부의 슬픔과 아픔을 생각할 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하루 생계를 내려놓고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과부의 눈에서는 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수께서는 과부를 부셨습니다. 과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원문의 표현은 내장이 끓는 듯 하였다는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위로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울지 말라” 세상의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외아들을 잃은 과부에게 세상의 그 누가 “울지 말라”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그 누가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14,15절을 보십시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과부를 위로하신 예수님은 관에 가까이 다가가신 후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때
관을 멘 자들이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치셨다고 생각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청년의 귀에 속삭이듯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청년아, 얘야,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렴.
일어나서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렴”
권세가 없는 사람은 크게 말하든 속삭이듯 말하든 그 말의 권세가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반면 권세를 가진 사람은 크게 말하든, 속삭이듯 말하든 그 말에
권세는 동일합니다. 예수께서 청년에게 이제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의 권세가 임했습니다. 죽은 청년이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로마 황제가 사람을 죽일
권세도 있고 살릴 권세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라 할지라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로마 황제의 말의 권세와 통치가 미치는 영역밖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죽은 청년에게도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살아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것과 진배없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꿈과 비전, 생의 의욕을 잃고 매일 게임이나 하며 무덤 속의 누워있는 청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님, 학교 선생님들이 이런 청년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다가가 도와주려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도움의 음성, 조언도 청년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지난 봄학기 전국 JBF(중고등부)
교사 포럼을 가졌습니다. 이때 여러 교사분들의 체험과 간증을 들었습니다. 교사분들은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죽은 청년과 같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살아나는 간증을
했습니다. 게임 중독에 빠진 청년이 말씀을 듣고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교사 자신도 대학시절 죽은 청년과 같았는데 말씀을 듣고 살아나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의 권세가 있습니다. 저도 본문의 청년처럼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의 어머니가
저에게 비누를 하나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저는 혼자 가기 심심해서 당시 5살 된 어린 동생을 데리고 갔습니다. 비누를 사서 돌아오는데 공터에서
나오는 트럭에 동생이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 본 저는
너무 큰 충격을 받고 길건너 반대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잠시 후 거적대기를 씌운 동생의 시신 앞에
어머니가 달려오셔서 펄쩍펄쩍 뛰면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으셨습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다시 비누를
사오신 후 눈물을 흘리며 못다한 빨래를 하셨습니다. 어깨를 훌쩍이며 우시는 어머니를 뒤에서 바라본 저는
그날 이후 내 마음의 어떤 한 부분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후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뭔가 크게 성공해서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어느날 예수님이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주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성공해서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심으로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참된 위로, 진정한 위로를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얼핏 보기에 가장 높은 통치자가 잔인하고 포악한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 영상을 보았습니다. 영상에서 러시아 군인은 항복하여 손을 든 우크라이나
시민에게 조금의 자비도 없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쏘았습니다. 그 러시아 군인처럼 죽음이나 각종
재난 사고는 조금의 자비도 없이 우리에게 죽음의 총, 재난의 총을 쏩니다. 이렇게 잔인한 죽음과 재난의 통치를 받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죽음보다 더 강한 통치자가 있습니다. 죽음이 ‘죽어’라고 명령하면 그 누구도 명령을 거스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보다 더 세고 강한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죽음도 그 권세를 잃습니다. 예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시면 죽은 청년도 벌떡 일어납니다. 이 예수님이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그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신 분이 이렇게 마음이 따뜻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우리가 이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시고 영접하여 주님이 주시는
그 위로를 충만히 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