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 10 강
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
말씀 / 누가복음 7:18-50
요절 /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그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주님께 사랑고백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심장이
식기 전에 꺼내어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마음이 미지근해집니다. 예전의 감동이 없어지고 더 이상 사랑의 온기를 느끼지 못합니다. 식어진
첫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민도 되지만 내 마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일생동안 주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오늘 말씀이 이러한 우리의 고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해결의 길을 제시해 주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해주시길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당시 세례 요한은 마케루스(Machaerus)성의
지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 성은 헤롯대왕의 여름궁전이었는데 사해 동편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옥에 갇힌 이유는 그가 당시의 갈릴리 지역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의 죄, 곧 그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을 책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의로운 자가 투옥되는 불의한 시대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 중풍병자를
낫게 하신 것,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는 평지보훈을 가르치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은 세례 요한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세리를 제자로 삼으셨어?" "원수도 사랑하라고?" 그는 제자 중
두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이신지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여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분명히 메시아로 증거했었습니다. 누가복음3장에 보면 그가 메시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나요?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3:16) 말하였습니다. 또한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실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을까요? 적어도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요한은 옛 언약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꼭 대부분 당시 사람들처럼 정치적인 메시아관을 가진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는 메시아의 성격이 심판하시는 분으로 보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메시아가 오시면 악을 심판하고 공의를 세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요한의 설교에도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3:7b을 보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하였습니다
눅3:9절에도 비슷한 말을 했고, 또 눅3:17을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였습니다. 요한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관은 다분히 심판하시는 메시아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계시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단회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온 세상을 단번에 심판하시는
것으로 세상 역사가 끝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떠합니까?
신약의 계시는 그리스도가 두 번 오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오셔서 죄 사함의 역사를 이루고, 다시 한 번, 곧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던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메시아의 구속과 심판에 대해 제한적으로만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투옥되어 있는 것으로 인해 마음이 조급하였던 것이 또 한 가지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요한은 예수님이 악인들을 당장 심판하시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아이십니까?”하는 요한의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시던 일을 그들로 그대로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가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그대로 알려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눅4:18,19 절에 나타난 대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치신 그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일이 우리의 소원이나 이해와 다를
지라도, 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때 우리는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24,25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알려주십니다. 당시 유대 땅에는 자기 일신의 부귀와 안락을 위해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산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어용 종교지도자와
같이 권력에 아부하여 왕궁에서 한 자리하는 자도 아닙니다. 26b를 보면 예수님은 요한이 선지자보다
훌륭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또 28절을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라면 모든 인류를 말합니다. 역사상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요한이 가장 위대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요한이 구약 시대에
살았던 모든 선지자들보다 업적 면에서 더 나은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업적 면에서는 모세나 엘리야나,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했고 고난도 오랫동안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련성 때문입니다. 그의 위대성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라는 사명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길을 직전에서 예비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모든 선지자보다
뛰어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까? 28b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요한이 위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요한이 비록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탁월하였지만, 신약의
성도들처럼 영적인 이해가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약시대 곧 옛 언약의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희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성령을 충만히 받지 않던 세대의 사람으로 거듭남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풍성히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 신약에 속한 성도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위대한 사역을 하지는 못하였더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며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된 계시의 완성인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 친히 각 사람의 심령 속에 내주하사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이 비록 위대한 선지자라 할지라도 성령시대에 사는 신약의 성도들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으로 작은 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밝히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성령님을 소유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밝히 분별하고 능력을 받는 우리 신약의 신자들은 얼마나
축복된 사람들인지요! 이를 인하여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30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뜻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빗대어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아이들은 장터에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였습니다.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었습니다. 또 장례식 놀이에서는 한 편이 곡을 하면 다른 편은 울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았습니다. 장단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불평했고 원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이런 게임의 룰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 같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비난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실인처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빈들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거룩한 생활에 힘쓰며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면 그를 “아, 참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구나”라고 해야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런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을
사랑으로 영접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러면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아, 참으로 겸손하시고 은혜로운
분이시구나”해야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판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딴죽을 걸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그들이 진리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싫어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면 회개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방어하고 변명하려고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귀를 막습니다. 그러나 3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은 왜곡되고 비난 받습니다.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진리의 말씀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말씀이 그들의 삶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 세계만방에 선포되고 참 진리라고 인정받게 됩니다. 지혜가 지혜임은 그 열매가 말해줍니다. 결과가 증명합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영히 섭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더라도
말씀에 겸손히 순종할 때 우리는 열매를 맺습니다. 풍성한 인생, 형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여 항상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6절을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식사 초대하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초청한 것을 보면 이 바리새인은 상당한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 기본적인 예절을 잘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를
볼 때 초청한 이유가 예수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예수님에게 큰
선지자적인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 싶었던 같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그의 초청에 응하셨습니다.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습니다. 이때 어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37절을 보겠습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이 여자는 그 동네에 알려진 죄인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여자를 죄인라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성적으로 부도덕한 여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녀는 자기의 과거만 바라보았다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나아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 섰습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기 머리를 풀어 그 발을 닦았습니다. 발은 신체에 가장 먼지가 많이 붙는 부분입니다. 반면에 머리털은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만큼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자기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너무나 존귀하셔서 자기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발의 먼지라도 닦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으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신학박사 학위를 가졌을지는 몰라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냉랭하게 대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발에 향유를
쏟아 부었습니다. 이러한 연속적인 행동 가운데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자신의 행동으로 사랑과 헌신을 표현했습니다. 감사가 넘치면
말을 잊습니다. 감정이 끓어오르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말이 나오겠습니까?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더 크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집에 앉은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이를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리새인 시몬은 나름대로 판단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선지자 맞아? 이 여자가 부도덕한 여자인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더구나 선지자라면 그런 정도는 당연히
분별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저 여자가 어떻게 오늘 모임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집에 들어온
것 자체도 심히 불쾌한데, 예수님은 저 여자의 모든 기막힌 행동을 받아주시고 있잖아? 부도덕한 저 여인이 발을 만지는데 가만히 계시네?”하며 스스로 판단하였습니다. 사람의 속을 아시는 주님은 이런 그에게 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채권자에게
두 빚진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 곧 지금의 돈으로 약 1억 원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 곧 약 천만 원을 졌는데, 그들은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려준 자는
큰 맘 먹고 그 둘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누가 더 채권자를 사랑하겠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은 “아, 그건 당연히 더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탕감을 준 사람은 예수님이고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은 여인, 그리고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은 시몬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고 시몬은 적게 사랑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에게 입 맞추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여인은 그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시몬은 그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지만 여인은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형식적으로 대접했습니다. 그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미지근한 물과 같았습니다. 반면에 여인은
펄펄 끓는 물과 같았습니다. 시몬은 형식을 잘 갖추었습니다. 여인은
형식 같은 것은 다 무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펑펑 울었고, 머리털을 풀어 헤쳐 발을 닦고, 발에다 입을 거듭 맞추었습니다. 향유를 발에다 통째로 부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그녀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한 까닭에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들립니다. 선행을 많이 하면 죄를 사함받는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올바른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의 많은 죄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에 예수님이 시몬에게 말씀해 주신 비유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유에 의하면 여인은 오백 데나리온 탕감을 받은 자입니다. 그녀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것에 감사하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오랫동안 죄 문제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비참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기의 죄의 사슬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떠 밀려가는 대로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일말의 자존감도 다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세상을
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영혼은 슬픔과 아픔으로 날마다 깊은 심연으로 곤두박질했습니다. 이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의 목자 예수님, 긍휼의 예수님,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아! 죄사함! 그녀는 비로소 영혼의 자유를 누리며 모든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늘의 기쁨과 평화가 그녀의 마음에 임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감격이 넘쳤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죄사함과 구원을 주신 예수님이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정성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이 자기 동네 시몬의 집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간 고이 보관하였던 자신의 결혼의 꿈의 상징인 향유 옥합을 들고 그 집에 온 것입니다. 그녀에게 향유가 아무리 비싸다하더라도 자기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죄사함의 은혜를 주신 예수님이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그 예수님은
여인의 참 구주셨습니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발의 먼지조차도 자기 머리털보다 더 귀했습니다. 값 비싼 향유보다 더 귀했습니다. 100 병이 있으면 다 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적게 사함을 받은 사람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함 받은
것이 적으니까 그냥 적당히 부담되지 않는 정도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를 많이
받았기에 많이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녀 자신을 온통 부어드린 것입니다. 큰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머리로만 아니라 가슴으로 압니다. 그래서
늘 찬송을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 역사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희생이 많으십니다”. 예, 그렇게 동역자들을 격려하고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큰 은혜 받은 줄 아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아무리 헌신적으로 일해도 수고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 모든 것을 희생이 아니라
감사로 합니다. 자신이 받은 죄사함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주님을 뜨겁게,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 드리고도 더
드리지 못한 것 때문에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위해 생명을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자기도 주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주고자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주님과
그런 사랑을 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은혜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를 많이
사함 받기 위해 일단 이 여인처럼 죄를 많이 지어야하겠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죄를 많이 지어도 그 죄를 느끼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흉악한지 알지 못하고 상대적 우월감에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죄사함을 많이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자기가 원한다고 자기 죄를 많이 깨닫고 죄사함의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그리고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나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시몬이 이 여자보다 죄를 적게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의 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습니다. 사64:6a 는 말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의
의는 해어지고 때가 낀 넝마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되게 서는 것,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자기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은혜를 구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앞에서 본, 장터의 어린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영적인 완악함을 책망을 받는 종교지도자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또한 미지근한 마음의 소유자 바리새인 시몬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그들은
머리로만 지식을 쌓았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되게 서서 자기를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되게 서서 회개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지 않은 것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런 바리새인들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바로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자요, 내가 그런 바리새인입니다. 내가 주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미지근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습니다. (마18:24) 이 빚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 영원히 갚을 수 없습니다. (시49:8) 그런데 우리는 이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오! 이것이 진정 사실이란 말입니까! 영원한 지옥 심판에 들어가야 마땅한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완전 탕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진정 사실입니까? 아무리 귀한 머리털이 문제겠습니까? 옥합이 100 병이라도 아깝겠습니까? 주님,
이러한 은혜를 받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다만 불쌍히 여겨주시길 기도합니다.
깨끗한 거울 앞에 서면 다 드러나듯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놀라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 앞에 굴복하고 주님을 그와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의 깊이가 곧 은혜의 깊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깊이가 그 사람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의
겸손의 깊이입니다. 우리에게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가 날마다
새롭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큰 죄 사함 받은 것을 알고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더 깊이 깨닫고 더 뜨거운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길 기도합니다. 기쁨으로 나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