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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20강 `더 강한 자 예수님 `(누가복음 11:14-36)2022-08-01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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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누가복음 20

 

더 강한 자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1:14-36

요절/ 누가복음 11:21,22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알고 분별하는 좋은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예수님이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본문에서 말을 못한다는 단어가 원어로코포스인데 이것은 말을 못한다는 의미도 되고 귀가 멀어 듣지 못한다는 뜻도 됩니다. 사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듣지 못하는 것은 서로 같은 개념입니다. 영어로 하자면 말을 하지 못하는 mute, 듣지 못하는 deaf가 같은 개념입니다.

 

부모님과 자녀 사이에 generation gap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으로 뭐라고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이 하나도 자녀의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부모님에게 랩가수처럼 웅얼웅얼거리는 음성으로 뭐라고 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부모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의 말은 그 진의를 다 이해하지 못한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계속 합니다. 마치 한 사람은 영어를 하고 한 사람은 중국어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회사에서는 프로젝트의 모든 과정과 결과에 총책임을 져야 하는 팀장과 그런 책임감없이 자기 맡은 일만 하면 되는 팀원 사이에 입장 차이가 있습니다. 팀장은 전체를 보면서 모든 과정과 결과까지 예측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입장에서 팀원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팀원은 전혀 입장이 다릅니다. 그래서 둘이 대화를 하는데, 그래서 뭐라고 뭐라고 서로 말은 하는데 마치 외국어를 하는 사람처럼 의사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예배가 끝날 때 손을 들어 축도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고후 13:13) 여기에서 교통하심이 원어로코이노니아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3절에서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귐 역시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보통 fellowship으로 번역하는데 우리 모임의 이름 University Bible Fellowship할 때 fellowship이 바로 교통, 교제, 코이노니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교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나님은 태초부터 혼자 계시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의 교통하심과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늘 서로 자신의 속마음을 나누면서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소통과 교제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서로의 사랑과 신뢰가 깊어지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지으실 때 마치 악기 만드는 사람이 그 악기를 통해 좋은 소리가 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것처럼, 기타 만드는 사람이 그 기타 내부의 울림을 통해 좋은 소리가 나도록 좋은 나무(가급적 합판보다 all solid)를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 공기를 이용해 좋은 소리가 나도록 허파와 목의 성대, , 입천장, 이빨, 입술을 만드셨습니다.

 

이에 비해 사탄이 하는 일은 소통의 단절입니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한 소통을 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정말 눈이 시리고 배가 아프고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정도로 그 꼴을 보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까 깊이 연구한 끝에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했습니다. 이 사탄의 작전은 성공하여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큰 벽이 생기고 소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사탄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인간과 인간이 상호간에 소통하지 못하도록 작전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generation gap을 이용하고, 서로간의 입장 차이를 이용하고 또 각자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요즘 이른바 황혼이혼을 하는 커플이 늘고 있습니다. 황혼 이혼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결혼하여 30, 40년을 살면서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고 나눈 대화의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정말 서로를 깊이 이해하며 나눈 대화의 시간이 없습니다. 이러한 소통의 단절, 대화의 단절, 이로 인한 거리감, 소외감, 갈등 - 그 모든 것의 배후에는 사탄과 사탄의 agent인 귀신이 있습니다.

 

세상에 언어를 만드시고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교제하고 교통하며 사람이 서로 친밀한 대화와 교제나누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오늘 귀신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 한 (아마도) 청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메시지에서 뉴턴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여러분,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딱 3년간 공생애를 보내는 그 귀한 시간, 1 1초가 아까운 그 귀한 시간에, 그 시간을 투자하여 귀신들려 말을 못하는 한 청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말을 하게 하신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뉴턴처럼 놀라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적인 감수성과 문학적 예민함을 가진 시인은 들에 핀 이름없는 꽃 한 송이를 보고 우주를 꿰뚫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예수님도 한 때 시인이 되어 들에 핀 꽃 한 송이를 보고 하나님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이 들풀도 이렇게 아름다운 옷으로 옷입혀 주시는데 사랑하는 그의 제자들을 어찌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는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 6:30)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사탄이 가장 힘써 하는 일은 하나님과 사람,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의 단절, 대화의 단절, 서로에 대한 깊은 무관심, 무정함, 사랑없음이며 이에 비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가장 힘써 하시는 일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친밀한 소통과 교제,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깊은 이해, 그 이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사건은 수천년간 지속되었던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 시작하는, 그 출발을 알리는 위대한 사건인 것입니다. 

 

15~20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일부 무리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propaganda technique 중 이른바중상모략(defamation)” 기법입니다. “, 귀신을 쫓아냈어? 그러면 귀신의 우두머리하고 짜고 고스톱 친 거 아니야?”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소극적 논증과 적극적 논증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소극적 논증에서 예수님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사실 혹은 진리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해지고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집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내부총질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 저 집안은, 저 나라는, 저 회사는 내부 분열 중이다.’ 이런 소문이 나돌면 그 집안이나 나라, 회사는 곧 망하고 말겠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사탄의 나라가 내부분열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동일한 원리가 동일한 케이스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이용해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공격하는 이들의 제자들도 가끔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케이스를 보고 귀신의 역사라고 한다면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21~26절을 보십시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1~26절은 예수님의 적극적 논증입니다. 소극적 논증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일이 사탄을 통해 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셨습니다. 이제 적극적 논증을 보겠습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합니다. 그런데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경우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게 됩니다.

 

여러분, 강한 자가 자신의 소유를 가만히 눈뜨고 빼앗기는 일이 있겠습니까? 강한 나라인 러시아나 중국, 미국으로부터 조그마한 소유, 예를 들어 섬 하나, 산 하나를 빼앗으려 든다면 그 나라와 핵전쟁을 벌일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강한 자일수록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결코 아무도 자기의 소유를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곧 사탄은 강한 자입니다.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강한 나라인 것처럼 사탄은 핵무기처럼 강력한 두 개의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죄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의와 바른 길은 교육시키기 어려우나 죄짓는 길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귀신같이 잘 알아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디에서 배웠는지 아이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부모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또 부모의 지갑에 손을 대고 가게에 들어가 몰래 물건을 훔칩니다.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약한 아이를 왕따시키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은 강력한 사탄의 무기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어짜피 죽음으로 끝나는 세상, 의롭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짜피 곧 아니 내일 죽을 것이 분명하니 오늘은 세상 근심 다 잊고 먹고 마시고 놀고 불타는 쾌락의 밤을 즐기자.” 이것이 사탄 성경 3:16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정말로 사탄 성경 3:16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있다면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이렇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탄의 소유되었던 한 청년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과 교제가 회복되었고 하나님과 그 청년 사이에 소통과 교제가 회복되었습니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사탄보다 더 강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꼭 어떤 두 나라가 핵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지극히 작은 한 사건을 통해서 아, 이 나라가 저 나라보다 더 강하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강대국이 다른 강대국의 지극히 작은 섬 하나를 빼앗고도 상대방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면아 이 나라가 저 나라보다 강하구나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나라이고 하나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탄의 나라는 여전히 크고 강성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탄의 지배 하에 죄를 짓습니다. 사탄에게 종신 고용된 직원처럼 사탄이 주는 월급에 해당하는 쾌락을 맛보며 죄를 짓습니다. 이처럼 평생 죄를 짓다가 마지막 퇴직금으로 받는 것이 사망입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평생 죄짓느라 고생많았다. 이제 죽음을 퇴직금으로 줄 터이니 죄 짓는 고생 그만하고 무덤에서 편안히 쉬거라.” (사실 이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그 죄에 대한 준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 만유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때로 이 나라는 연약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탄에게 속했던 사람을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오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두 나라 중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죄와 죽음으로 여전히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것 같은 사탄의 나라 편에 서야 할까요? 아니면 때로 연약해 보이지만 사탄에게 속했던 영혼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데려오는 하나님 나라 편에 서야 할까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기에 중간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끝까지 최종 결론이 날 때까지 관망만 하겠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잠시 청소되었다가 일곱 귀신이 들어와 더 악한 상태가 된 사람처럼 됩니다.) 

 

2주 전 여름수양회가 있었습니다. 7부의 경우 “Have Faith in God, 하나님을 믿으라말씀이 전체 타이틀이었습니다. 이 수양회를 통해 “Have Faith in God, 하나님을 믿으라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각자 현실에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지만하나님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이런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는 비전과 확신이 생겼습니다. 또 수양회 처음 참석한 분들이 대표소감을 발표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처음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믿게 됨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소속을 옮긴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분들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예수님이 사탄보다 더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처럼 사탄과의 세계 대전에서 최후 승리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아직 치루어야 할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제가 사탄보다 더 크고 강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여 이 영적 전쟁에서 최후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사탄보다 크고 강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여 본문의 말 못하는 청년처럼 내면이 억압되고 소통된 단절된 청년들을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또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통하고 교제하는 청년으로 회복되는 일에 귀한 일군들로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비난하고 공격하던 이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해외유학을 하고 유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현직 교수활동을 하는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학위를 받지 않은 예수님이 이들과의 공개 토론회에서 멋지게 승리하셨습니다. 명쾌한 예수님의 논증에 그들은 입이 있으나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한 여인이 예수님을 복 중에 임신하고 낳은 여인이 복이 있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9~32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사탄이 건설한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분으로 오셨는지 의구심을 나타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집트의 왕에게 노예로 붙잡혀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가 왔습니다. 모세는 시퍼런 나일강이 붉은 피로 변하는 표적, 메뚜기 떼가 온 이집트 땅을 뒤덮는 표적, 최후에는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그 가운데 길이 나는 표적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표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 위대하고 엘리야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면 뭔가 그에 상응하는 표적이 있을 것이 아닌가,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괴롭힌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미션을 받았습니다. 민족주의자였던 요나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스페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이때 바다에 커다란 풍랑이 일었습니다. 지금은 풍랑이 일 때가 아닌데 왜 이런 풍랑이 일었는가 조사하던 선장은 요나가 그 원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선원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배를 제어해보려 했지만 풍랑이 점점 더 거세져 요나를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다에 빠진 요나를 커다란 물고기가 삼켰습니다. 요나는 어두운 물고기 배 속에서 삼일 간 지내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물고기는 요나를 해변가에 뱉어냈고 살아난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요나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어두운 무덤 가운데 3일간 계셨다가 밝은 주일 아침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 이것밖에 없습니다.

 

33~3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밝은 마음의 눈을 열어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카톨릭에서는 7가지 죄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죄가나태의 죄라고 합니다. 모든 죄 중에 게으른 죄가 가장 중한 죄라는 것입니다. 만약 심판의 때에 너는 왜 심판을 받게 되었는가 묻는다면 그 원인은 정욕이나 교만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더라면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었을 터인데 게을러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갖고 예수님의 주신 말씀의 의미와 또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의 의미를 생각하여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사탄의 통치에서 벗어나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말 못하던 한 청년이 입을 열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교제와 소통이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작은 사건이지만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큰 일보다 한 청년의 내면이 회복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교제와 소통이 회복되는 작은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역사방법을 잘 알고 지극히 작아 보이는 이 일을 소중히 생각하고 힘쓰는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