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 19 강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말씀 / 누가복음 11:1-13
요절 / 누가복음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지난 여름수양회 통해 많은 은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축복하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보통 즐거워합니다.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시편 50:23은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우리가 기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말로 감사를 드릴 수도 있고 찬송으로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기도생활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늘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질식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도해야만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작심삼일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그토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결국 모두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기도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기도에 대해 배우며 우리의 기도생활에 실제적인 진보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소원을 주시고 또 꾸준히 효과적인 기도생활을 하게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은 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실상 여기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수시로 기도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를 세우시는 등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는 더욱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신데 왜 기도를 하셨을까요? 기도하지 않으셔도 전능하신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나요? 물론,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자신이 하나님 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때나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사람이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계시는 동안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셨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피곤함 등 모든 면에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때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시기 위해 기도하셔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심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수시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도 기도에 대한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십니다. 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예수님은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how) 기도하라 하십니다. 곧 이 기도문을 그대로 판박이처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도내용과 방향성을 갖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래서 기도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소원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으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첫째, "아버지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을 언제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 יְהֹוָה)를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서기관이 필사하는 중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즉시 쓰는 일을 멈추고 '내가 그분의 이름의 거룩성을 위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쓰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목욕을 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붓을 깨끗이 빤 후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그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여 '여호와' 대신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אדונאי)로 불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예배에 가보면 ‘아도나이’라는 말을 많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대인들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랑받는 아들이 '"아빠'라고 부르듯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그와 같이 '아버지'로 부르라하십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제자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능력이 있어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죄를 완벽히 제거해줍니다.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성이 맺어지고 양자됨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의 마음에 임하십니다. 그들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마음 놓고 부를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의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마음에서 '주'로 고백한 사람은 누구나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죄악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에 처음에는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어색합니다. 그러나 자주 부르면 익숙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색함을 버리고 자유롭고 담대하게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원하십니다. '아빠'라고 부르며 구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늘 "아버지"께 나아가 사랑을 고백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버지께 안겨 확신 있게 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기가 힘든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나의 아빠'에게 아뢴다고 생각하면 기도가 쉬워집니다. 언제 어디서나 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의 모친은 90이 넘으신 분입니다. 옛날 분이라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셨지만 신앙이 순수하고 단순합니다. 교회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의자에 앉으시자마자 "아바지!"하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북 사람이라 발음도 ‘아버지’가 아니라 ‘아바지’라고 하십니다.
저도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새벽에 두 시간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마칠 때마다 마치 하루의 중요한 의무를 다한 것 같았습니다. 의무감에 기초한 기도보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에 기초한 기도가 귀합니다. 우리가 10분이던, 30분이던, 한 시간이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친밀함 가운데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 중에 한 목자님은 많은 기도 제목을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는 평신도이므로 직장 일이 바쁩니다. 그래서 이 분은 출퇴근하는 버스에서 기도 제목을 넘기며 기도하십니다. 참으로 시간을 잘 활용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하루 한 시간 걸으며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운전하시면서도 큰 소리로 기도하십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느헤미야의 기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느헤미야 2장을 보면 페르시아 제국의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왕의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왕에게 대답을 잘 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그 잠깐의 순간에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합니다. (느2:4) 그리고 왕에게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게 해 달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그의 지혜롭고 용기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순간적이지만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를 배워 순간순간, "아버지!" 하며 묵도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게 됨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는 새벽에 시간을 내어 기도할 수도 있고, 버스를 타고 가거나 걸으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기도 가운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친밀히 여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아버지'라고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아버지!" 늘 이러한 고백을 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또한 기도를 익히기 위해서는 개인기도도 중요하지만 센터에서 하는 기도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합심 기도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장작불도 혼자 타는 것보다 같이 모이면 서로격려가 됩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나대신 하나님이 해 주시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승리합니다. 요한복음 16:24는 말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기도의 비밀을 배우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며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을 기도하는 공동체로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둘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여기서 '나라'는 대한민국 같은 공화국(Republic), 즉 국민에 의해 선출된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왕국(Kingdom)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기도제목은 이 땅에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 곧 그의 왕국 (His Kingdom)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은 왕으로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십니다. 물론 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그의 제자된 우리도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Your Kingdom come!” 이것이 신자의 소원, 우리의 인생목적인 것입니다.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했습니다. 이 헌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과연 그런가요? 내 자신이, 또 우리 자신의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민족중흥"인가요? 여러분의 인생목적은 무엇입니까? 나의 인생목적, 우리의 인생목적은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와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된 그 나라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영원히 버림을 받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자신과 이웃을 그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기도하며 돕는 것이 우리의 인생목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곧 복음 전파를 위한 기도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가족들이 있는 분들은 가정에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캠퍼스에 활개 치는 사탄의 세력이 밀려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꾼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이 세상에 충만히 이루어지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세 가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란 그 날 살아갈 수 있는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필요한 양식을 걱정하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한민족 5천년 역사에 이렇게 풍족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는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양식이 없어서 먹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양식을 날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넓게 보면 양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머리 둘 곳 주시고, 옷 주시고, 호흡하면서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게 하시는 모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 '죄 사함을 위한 기도(4a). 4절에서 '죄'(하마르티아)는 아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습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요구하는 권리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세가 될 뿐입니다.
셋째,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기도. 하나님은 때로 그 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욥1:1) 그러나 야고보(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시험에 들도록, 곧 시험에 굴복하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시험 가운데 이기도록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나의 인생에 시험이나 시련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시련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상의 1-4절에서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5-8절에서 기도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에 나오는 비유에서 요청을 받은 친구는 왜 결국 떡을 주게 되나요? 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이는 친구의 간청함 때문입니다. 여기서 '간청함'(아나이데이안)은 밤늦게 친구를 찾아와 계속 문을 두드리며 떼를 쓰는 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아이들처럼 고집스럽게 떼를 쓰듯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간청함'은 그가 밤늦은 시간에 찾아온 친구를 먹이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친구를 불쌍히 여겨 어찌하든 먹이고자 계속 문을 두드리는 그의 딱한 처지를 보아서라도, 그 밤에 일어나 떡을 내어주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를 들어주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일한 말을 반복하더라도 중언부언과 간청함은 다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진정한 기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 속에 나의 마음을 담아서 드리느냐 아니면 외적인 형식만 빌려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 나를 담아 드리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좋은 문장들을 반복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에 응답하십니다.
9-12절은 기도에 대한 응답 약속입니다. 9,10절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응답이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구하는 것 즉, 말로 구하는데 응답이 없으면 발로 찾아다니고, 그래도 응답이 없으면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보면, 그 사람의 처한 환경 (Accessability)에 따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거실에 있는데 아버지가 거실에 계시면 그냥 구하면 됩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 계시면 방으로 찾아가서 구하면 됩니다. 방문을 닫고 계시면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여시면 구하면 됩니다. 접근성에 따라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리라 즉, 모두에게 응답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9절에 세 번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에는 "그러면"이 있습니다. 기도했을 때, "그러면"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응답 약속을 믿으라는 것에 중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응답되는 때와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때와 방식이, 우리가 구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즉시 응답될 것이지만 실제로 그런 법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대로 응답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그것을 믿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막11:24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더 나아가 내게 유익한 기도가 아니거나 하나님의 뜻과 전혀 맞지 않다면 아예 응답되지 않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 경우도 기도가 응답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하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고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하는 삶은 얼마나 귀한 삶, 복된 삶인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예전에 기도했던 것이 오늘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기도한 것은 또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응답이 됩니다. 기도를 계속 해 나가는 것은 나의 기도응답 창고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이 쌓이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우리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마태복음 7:11에는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했는데 누가는 특별히 그 좋은 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기본적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신자에게는 성령이 오셔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도 드리는 것입니다. 또 다시 새롭게 성령을 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성령이 없으셔서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주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스마트폰으로 비유하자면 배터리가 100%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항상 100%로 유지가 됩니까? 충전기에서 빼자마자 방전되기 시작합니다. 사용하지 않아도 자체 소비에 의해 방전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방전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다시 성령충만함에 이르게 되며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구하는 것 대신 성령충만을 주십니다. 성령충만이 더 나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함없는 항구적인 기쁨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넘치는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봉사와 전도의 힘을 주십니다. 성령의 은혜가 있을 때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을 부릅니다. 사랑으로 낮아져 섬깁니다. 성령충만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친밀함을 주십니다. 성령충만은 우리로 계속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인생 목적을 분명히 하게 하십니다. 그 인생목적에 열정을 갖게 하십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삶입니다. 우리가 구할 때 그러한 성령충만이 주어집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구하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늘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의 요청에 대해 가장 귀한 선물인 성령을 구하라는 방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인생목적을 분명히 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충만히 받아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