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 29 강
엎드리어 감사하니
말씀 / 누가복음
17:1-19
요절 / 누가복음
17: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신 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약 6개월간의
행적을 9:51~19:28까지 10장에 걸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직접 통과하지 않으시고 동쪽에 있는 이두매 지방으로 다니시던 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용서하는 믿음과 감사하는 믿음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믿음이
귀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용서도 하고 감사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며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첫째, 용서에 대해
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죄인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부지중에
남을 실족시키기도 하고 자기가 실족당하기도 합니다. 유감이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실족시키는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아직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화가 있습니까?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습니다. 맷돌을
사람에게 매어 바다에 빠뜨리는 것은 고대 로마, 그리스 등지에서 실제로 시행되었던 사형법의 일종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바다는 혼동과 악의 무서운 상징이었습니다. 바다에서
실종된 육신은 마지막 때 부활하지 못한다는 속설도 있었습니다. 그런 바다에 무거운 연자 맷돌을 매고
던져져 절대 떠오를 가능성 없이 가라앉힌다는 것은 절망과 영원한 파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누군가를 죄짓게 만드는 자는 큰 화가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지극히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실족하지 않도록 섬세한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는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면 됩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화가 임하는
것이지 회개하면 주님은 용서하십니다. 또한 어떤 형제가 그런 죄를 짓고 회개하면, 신앙공동체에서도 그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3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여기서 죄를
범하는 것은 문맥상 남을 실족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죄를 진 형제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경고는 영어로 'rebuke' 인데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고는 "형제"에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는 나의 목숨을 주어서라도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그 경고는 깊은 사랑에 기초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솔직하고 분명하지만 부드러운 사랑의 책망이 되어야 합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짜증난 상태에서 상대의 잘못을 들추는 것이 아닙니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예의를 갖춰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의 목적은 그 형제를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는
심각하고 무거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자매가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누리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죄를 다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소한 잘못이나
무심결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잘못을 따지거나 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건건히 지적하면
우리는 하루라도 조용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소한 것들은 일방적으로 용서하고 다만 위하여 기도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벧전4:8은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러나 형제의 죄가 지속적이고, 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는 일방적인 용서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찾아가서 경고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경고할 때, 그가 회개하면 즉시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죄인의 회개를 받으시면 즉시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요 므낫세는 남유다의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공히 극도의 우상숭배를 하였고 그런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로 인해 나라들을 멸망케 하십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아합이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녔습니다. (왕상21:27-29)
하나님은 이런 그를 받으셨습니다. 아합이 극히 악한 왕이며 심지어 그의 회개에 진정성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기뻐하셨습니다. 아합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가 죽은 후에 그 아들의 시대에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므낫세도 그러합니다. 그의 우상숭배의 죄악은 극에 달하여 열왕기하 23장을 보면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가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모세의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켰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므낫세가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를 누그러뜨리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므낫세를 징계하사 앗수르로 하여금 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게 하셨습니다. 므낫세는 환난을 당한 때 크게 겸손하여졌습니다. 회개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회개도 받으셨습니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므낫세 같이 사악한 왕의 회개도 받으셨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그만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가
회개하면 즉시로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형제의 죄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십니다. 마태복음 18:22에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무한히 용서해 주라 하십니다. 이는
그가 행한 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범죄할 수밖에 없는 그의 연약성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그렇게 용서하시는데 우리가 누구라고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미움은 먼저 자기를 해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서도 어찌하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서는 자기 생각, 때로는
오해한 것에 파묻혀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었던 점들을 알고 그 사람
편에서 이해하면 미움이 가라앉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 이것이
미움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는,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들과 같습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이를
깊이 깨닫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는, 말씀과
기도로 마음에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합니다. 힐링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시간만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건강한 공동체에 담겨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생기면
미움이 사라지고 용서가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분을 용서했는가 안했는가를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가 재앙을 당할 때 고소해하면 여러분은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꾸준히 배우고 영접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키워가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면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갈5:6) 우리가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둘째, 겨자씨 같은 믿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그런
죄를 범한 사람을 무한정 용서하기에는 자기들의 믿음이 너무 작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5절)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예수님은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에게 명하여 바다에 심기라하면 그렇게 된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7:20에서는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큰 믿음을 구했지만 믿음은 아무리 작아도, 그 믿음을 실행하면
엄청난 일을 해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행하면 하나님이 큰일을 이루십니다. 믿음은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 크기가 10센티미터냐 1미터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을 통해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인가입니다. 주님은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행하라! 그러면
비록 작지만 그 진실된 믿음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 미국 국제 수양회에서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이 말씀을 재미있게 풀어주셨습니다. "당장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이 아니더라도 진실된 작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한 삽을 뜹니다. 오늘 한 삽을 뜨고 내일 또 한 삽을 뜹니다. 계속하여 믿음으로
하루 한 삽을 뜹니다. 이런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루에 열 삽을 뜨게 됩니다. 백 삽을 뜨게 됩니다. 결국 그는 산이 옮겨진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앞에 놓여진 어떤 상황도 받아들입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다만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 믿음으로 지금
한 삽을 뜹니다. 주님이 산을 옮기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믿음을 가졌더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 믿음을 실행하십시오. 지금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믿고 기대하십시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캠퍼스에 나아갑니다. 낮에 시간이 안 되면 밤에라도 나아갑니다. 캠퍼스 안에서 피싱을 하지 못하면 밖에서라도 합니다. 그렇게 자고
깨고 하는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자랍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받으시고 일하십니다.
셋째, 겸손에 대해
7-9절입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어떤 사람에게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일어나 "종님,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어서 와서 식사하세요"라고 할 주인이 있겠습니까? 종이 주인이 명한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겠습니까? 이
비유의 결론이 10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비유를 통해 제자의 자세를 배웁니다. 본문에 보면 종은 하루 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배도 고프고 피곤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말하기를 음식을 준비하고 주인이 먹는 동안에 수종을 들며 심부름을 한 다음에 먹으라고 합니다. 종은 이러한 말에 이치를 따질 권리가 없습니다. 일꾼에게는 그 대가로
삯을 주지만 종에게는 보상이 없습니다. 한 마디의 고맙다는 인사도 없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이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수고하였더라도 그의 마지막 생각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죽도록 수고하고도 일한 것이 없다는 마음 자세입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잘 배울 때 가능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는 예이지만 한번 더 나눕니다. 중세 시대에 한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형수는 어떤 날 아침 형을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종탑에서 땡그랑 소리가 나면 그는 처형됩니다. 아침이 되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종을 치는 자가 힘껏 줄을 당겼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더욱 세게 줄을 당겼습니다. 여전히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줄을 당기는데 그 줄을 타고 피가 흘러내려왔습니다. 놀라서
종탑에 올라가 보니 그 사형수의 아내가 종소리가 나지 않도록 타종하는 그 종에 자기를 꽁꽁 묶어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사람들은 감동을 하였고 그 사형수를 풀어주었습니다. 그 남자가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깊이 알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며
기꺼이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갖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라고 하면 그저 심령이 눌릴 뿐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배우도록 하면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희생이나 헌신이란 말이 없습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드리길 소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불평이 없을 것입니다. 무익한
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알아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다 무엇입니까? 조금이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받고자 아니하면 낙심도
없습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수고하고도 죄송스런 마음뿐입니다. 무엇이나
내가 하는 일은 부족하다고 하는 마음, 수고하고도 부족하고, 주고도
부족하며 오히려 죄송한 마음이 됩니다. 이러한 겸손은 자기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여사 날마다 더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소서.
넷째, 감사에 대해
11-13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율법에 따르면 환자가 정결하게 되었을 때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진영 밖에서 진찰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에 제사장은 일정한 절차로 제사를 드리고 치유확인서를 발급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 전제되는 필수조건은 몸이 나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시려면 먼저 그 몸을 낫게 해주시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냥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너희가 제사장에게 가는 그 동안에
너희는 나을 것이니 나를 믿고 지금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니
예수님, 아직 우리 몸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데요? 이 상태로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요? 이대로 갔다간 돌에 맞아 죽을 것 같은데요"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순종하였습니다. 가는
중에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14절)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
(16) 저자 누가는 그가 사마리아인이라고 언급합니다. 아홉 명은 어떻게 한 것일까요? 그들도 물론 나병에서 나아서 너무나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설움과 외로움,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된 기쁨에 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좋아하고 기뻐만 하였지 자기들을 낫게 해주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17,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지금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무엇을 책망하고 계십니까? 감사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 감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도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교만이란 "내가 했다", "내가 이루었다" 하는 마음입니다. 자기가 잘해서 무엇을 했으니 누구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자랑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런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건강 즉, 겸손을 유지하며 일생 끝날까지 살아 갈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 가을 하늘을 보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름다운 날씨와 공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에
나바울 목자님의 장례를 섬기면서 서로 기도해주고 사랑하는 우리 신앙 공동체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삭막한 세상에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그들이 감사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오신 하나님이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모든 목적은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영접하도록 하심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백성들은 그들의 주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아홉 명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9)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영접한 그 사마리아인에게 영혼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아홉
명은 나병에서 깨끗함을 얻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이 이방인은
영혼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썩어진 영혼이 완전히 깨끗해졌습니다.
이상의 본문을 볼 때, 우리는 용서하고, 겸손하며, 감사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함을 배웁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왜 이 문맥에서 하필 무익한 종의 비유, 감사하는
나병환자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Increase our faith!)에 대한 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이 어떻게 자랍니까?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2:8) 그런데 그 믿음은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편, 통로를 통해 주십니다. 그 방편이 바로 겸손과 감사입니다. 먼저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겸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나 많이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매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흐려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나는 아무 소유권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 사람의 보상을 구하지
않는 자세, 다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세로 살 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종의 자세를 갖고 살 때 믿음이 자랍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면 주님 앞에서 사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때때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전하십니다. 나병환자
열 명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 방향에 순종하기 위해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순종함으로 믿음의 증거나 나타나고 그 믿음이 점프하듯 성장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이 자랍니다. 하나님께서
감사를 받으시고 그 믿음을 인쳐주십니다. 믿음을 선물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주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할 때,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우리의 믿음이 죽죽 자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받은바 은혜를 감사해야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위해
겸손과 순종,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