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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30강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누가복음 17:20-18:8)2022-10-0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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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누가복음 30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 누가복음 17:20-18:8

요절/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20,2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로마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로마가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여러가지 장치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동전에 로마 황제의 얼굴을 새겨놓았습니다. 시내 곳곳에 로마 제국의 깃발을 세워두었고 로마 군인들이 주요 건물의 경비를 섰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 한 커다란 신상을 보았습니다. 왕이 신상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커다란 돌이 날아와 신상을 쳐부수었스니다. 그 신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해졌습니다. 신상은 세상 나라를 상징합니다. 태산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니엘은 언젠가 세상 나라가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예언이 언제 이루어질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무어라 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명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열 명 중 한 사람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병이 나은 것도 기뻤지만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것이 더욱 기뻤습니다. 조상들에게 듣고 머리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한 것이 가장 기뻤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체험한 기쁨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번쩍번쩍한 사건으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임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눈을 열어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죄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도록 하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2절부터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자의 날은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금 당장 로마 제국을 돌로 빻아 버리시고 다니엘서에 기록된대로 온 세상을 통치하는 태산과 같은 분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지금 당장 바로 오지는 않습니다. 그 날이 오기 전 먼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와야 합니다.

 

초대 교회 때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로 호칭되었습니다. 이때 로마 황제가 아닌,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불이익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로 막대기로 길바닥에 물고기를 그렸습니다. 이는 헬라어로 물고기라는 단어가익투스인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의 앞단어를 합하여 발음하면 물고기라는 단어와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박해하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박해를 해도 은밀한 가운데 바닥에 물고기를 그리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늘어갔습니다. 성도들의 수가 하나님이 예정하신 수만큼 가득찰 때 비로소 인자의 날이 옵니다. 그러면 인자의 날은 어떻게 옵니까?

 

23-25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요즘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 이단 교회에서는 자기들의 교주가 재림 메시야라고 주장합니다. 2,000년 전 예수라는 한 비범한 청년 위에 임했던 메시야의 영이 이제 자기들의 교주 위에 임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분리해서 설명합니다. 이전에는 문재인 씨가 대통령이 되었다가, 지금 윤석렬 씨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2,000년 전에는 예수라는 청년이 그리스도였는데 지금은 자기들의 교주가 이 종말의 시대에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종말의 시대에 그리스도는 이 교회에 있다, 혹은 저 교회에 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마치 번개가 하늘 이편에서 저편에 순식간에 번쩍 하며 나타나는 것처럼, 온 세상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 구름을 타고 천군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의 몸, 다른 교주의 몸으로 오지 않습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2,000년 전 베들레헴의 구유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던 바로 그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6-30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노아 시대의 특징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적인 타락입니다. 다른 하나는 폭력입니다.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 제도를 무시하고 자유연애를 신봉했습니다. 19세의 나이에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저술한 작가로 유명한 메리 셸리는 자유연애주의자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아내가 있는 유부남과 부부처럼 지냈습니다. 둘은 여행 중에 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알고보니 그 부부도 정식 부부가 아니고 각각 유부남 유부녀인데 눈이 맞아 부부처럼 지내고 있는 사이었습니다. 두 부부아닌 부부는 각자의 처지가 너무 비슷해 매우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메리 셸리의 남자 파트너가 그 부부아닌 부부의 여자 파트너 제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로 인해 네 사람은 시기심과 질투에 얽힌 복잡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노아 시대는 이런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일을 미화하여 소설로 나왔을 것입니다. 또 폭력, 살인, 강간 등 강력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소돔 성에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 성에 살고 있던 롯에게 찾아왔습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조각 미남처럼 잘 생겼습니다. 조각 미남같은 남자들을 본 소돔 남자들은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롯에게 손님들을 내어놓으라고 했습니다. 롯은 자기 딸들을 내줄 터이니 이 손님들을 내버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은이놈이 외지에서 온 주제에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내린다면서 롯을 해치려 했습니다. 천사들은 잠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고하나님이 죄악으로 타락한 이 성을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키실 터이니 너는 가족들을 데리고 이 성을 떠나라말했습니다.

 

롯은 사위들에게 천사들이 말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믿지 않았습니다. “장인 어른, 낮술을 드셨습니까? 웬 농담을 이렇게 하십니까?” 말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롯은 아내와 두 딸들만 데리고 소돔 성을 떠났습니다. 천사는 소돔을 떠날 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이것은 소돔의 삶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소돔 성 위에 마치 미사일이 쏟아지듯 불과 유황이 쏟아졌습니다. 롯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하나님이 만약 이 시대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정중히 사과하셔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시대 사람들은 극도의 성적인 방종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성적인 방종의 뿌리는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생각은 얼핏 보기에 엄청난 자유를 줍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꼭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도덕 윤리같은 고리타분한 것으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마약이 화두입니다. 한 강력한 마약은 사람의 몸에서 평생 분비되는 쾌감 유발 물질보다 더 많은 분량을 열 몇 시간 동안 분비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하면 그 사람의 뇌와 몸은 즉각 중독이 되어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끊을 수 없습니다. 마약을 중단하면 금단현상으로 이빨이 흔들리고 피부 밑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피부가 다 벗겨지도록 긁어댄다고 합니다. 식욕이 떨어져 밥을 먹지 않아 피부 밑의 지방층이 소모되어 노인의 피부처럼 쭈글쭈글해집니다. 사람들이 좀비 영화를 많이 보는데 좀비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이 마치 마약 중독자와 흡사합니다. 좀비와 접촉한 사람이 잠시 후 또 좀비가 됩니다. 한 도시에서 몇 사람이 좀비가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전체가 좀비화됩니다. 그래서 그 도시를 봉쇄하고 도시 안에 있는 좀비들이 경계선을 넘으려 하면 전부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좀비를 쏘아 죽이는 게임도 있습니다. 이런 좀비 영화, 혹은 게임은 점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얼핏 보기에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실상은 내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나의 삶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정상적인 가정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과 행복을 다 앗아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무한한 삶의 가능성을 소장시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나실 때에는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에는 이 세상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오십니다. 이 심판은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자기 찾아옵니다. 맛집에 줄서서 잠시 후 맛난 음식을 먹을 상상을 하며 휴대폰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옵니다. 오랜 연애 후 마침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결정하고 예식장을 알아보고 계약하려고 서류에 사인하려는 순간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옵니다. 또 심판은 한 번 찾아오면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또 피할 길도 없습니다. 홍수가 순식간에 내 몸과 집을 삼키는 것처럼, 불과 유황이 미사일 쏟아지듯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한 번 임하면 돌이킬 방법도, 피할 길도 없습니다.

 

31-37절은 심판의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자고 있는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는 것처럼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18: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사람들의 죄가 어느 한계 선을 넘었을 때 임합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가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려는 하만의 계획이 어느 한계를 넘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나치 정권의 죄가 선을 넘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마치 산모가 경험하는 산통과 같습니다. 산모가 산통을 경험해야 비로소 옥동자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야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 땅에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 때나 임할 수 없습니다. 아홉 달 반이 차고 옥동자가 태어날 준비가 다 되어야 산모에게 비로소 산통이 찾아옵니다. 이와같이 온 세상의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가득찰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세상 역사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울수록 신자들이 점점 믿음으로 살기 힘들고 신앙적으로 낙심할 수 있는 위험성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1945년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 일본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지 않고 민족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해방이 가까울수록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패망이 가까울수록 일제 통치의 악랄함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고,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비유에서 한 도시에 재판장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과부에게 남편이 남긴 작은 재산이 있었는데 어떤 원수가 과부를 속여 재산을 빼앗아갔습니다. 과부에게 있어 남편이 남긴 재산은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젊은 날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모은 재산은 남편의 분신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원수가 그녀를 속이고 그 재산을 강탈한 것이었습니다. 과부는 얼마나 원통했을까요? 과부의 눈에는 원통한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그녀는 과연 누가 나의 이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유일한 사람이 그 도시의 재판장이었습니다. 소문을 듣자하니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재판장이 과부처럼 사회적 약자의 요청을 들어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처럼 날마다 재판장을 찾아가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재판장은 처음에는 과부를 무시하다가 나중에 생각하기를내가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정말 번거롭게 하니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할 것이 아닌가속으로 말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가 이 비유 말씀을 들을 때 한 가지 오해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불의한 재판장과 하나님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처음에는 과부의 요청을 무시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비로소 과부의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처음에는 우리의 기도를 무시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과부처럼 기도하면 그때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고 마침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것은 오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포인트는 재판장과 하나님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달리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 택하신 자들을 눈동자처럼 아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과부를 멸시하는 재판장도 원통함을 품고 간청했을 때 그 간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은 얼마나 그 택하신 자들의 원통함을 속히 풀어주기 원하시겠습니까!

 

다만 여기에서 우리는 나의 타임 테이블과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그를 시기한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도록, 이 곤경에서 그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노예가 된 후 그는 이 노예의 삶에서 구원해 달라고 매일 밤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거꾸로 응답되었습니다. 노예의 삶에서 구원받기는커녕 그는 죄수가 되어 차가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드리는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그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뜻 안에서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성숙한 용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가 당하는 원통함을 속히 풀어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습니까? 이 기다림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믿음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나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나를 세상 그 무엇보다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응답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여러가지 원통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제가 가르치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더 강한 것 같은 것으로 인한 원통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있지만 내가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잘 섬기고 전하지 못한다는 원통함이 있습니다.

 

제가 과거 얼굴이 세모처럼 생기고 턱이 나왔다는 것으로 인해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놀림을 받으면서 저는 절대 무시받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매월 월말고사를 치루었는데 졸린 것을 극복하기 위해 세수를 하고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잠을 참고 날을 새며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역사를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으로 살면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말씀의 능력을 잘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인한 수치심이 있습니다. 제가 이 수치심과 원통함을 기도로 바꾸기 원합니다. 과부처럼 주님께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속히 응답하시고 말씀의 능력, 복음을 능력을 제가 섬기는 말씀 역사를 통해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종말의 시대는 세상에서 죄와 어둠의 세력이 점점 더 강해지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성도들은 필연적으로 원통한 일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원통함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우리의 원통함을 속히 풀어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