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 31 강
영생을 얻는 길
말씀 / 누가복음 18:9-30
요절 / 누가복음 18:29,30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는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질문을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대기업에 취업을 할 수 있습니까?" "요즘 같은 경기침체기에 어디에 투자하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무병장수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수많은 질문 가운데, 실로 이 땅에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이 반드시 물어야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바로
이것입니다.
시편 90편3-5절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개역)" 이 세상의 삶은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나라에 비하면 실로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잠깐 자고 깨는 것과 같습니다. 가전제품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지만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선택은 영원을 좌우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반드시 얻어야 할 영생, 그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
9-14절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비유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극과 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은 세리가 근처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아이고, 저 세리가 왜 하필 이 시간에 왔지?" 하며 얼른 한 쪽으로 피했습니다. 따로
서서 거룩한 목소리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기도가
참 특이합니다. 그는 자신이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과 다르며 특히 세리와도 같지 않은 경건한
자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의로움이 충만합니다. "아, 이런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그는 '하나님이여'라고 불러놓고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실로 그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였습니다. 그가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면 자기의 죄가 다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나 시몬 베드로가 주님을
만난 후에 보였던 반응을 알고 있습니다(사6:5; 눅5:8). 아무리 고결한 삶을 사는 자라 하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의 죄와 허물이 다 드러납니다. 1초라도 그 앞에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요즘에 나오는
스마트폰의 카메라 성능이 아주 좋습니다. 실제로 새로 출시되는 사양은 디자인 등 다른 것은
거의 변화가 없고, 카메라 성능이 향상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카메라 성능이 너무 좋으니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사진을 찍으면 얼굴에 주름과 점, 심지어 땀구멍까지 다 보입니다. 기미 주근깨 다
드러납니다. 카메라 앞에도 그런데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나의 숨은 죄, 마음의 생각까지 다 드러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 앞에 서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사람 앞에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은 자기를 사람들과만 비교했습니다.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동기보다 겉으로 나타난 것, 곧 율법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비교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풀타임으로 율법을 연구하고 엄격한 종교 시스템에 따라 사는 바리새인들이 우월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비교의식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인이 아니라 유대종교 체계 안에서 직업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떠합니까? 그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실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부를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심각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회개하기 원했습니다. 교회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하'자를 부르는 데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를 하는 자는 하나님을 감히 뵐 면목이 없다고 여깁니다.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도리어 자기 가슴을 칩니다. 가슴을
친다는 것은 죄의 근원지인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23:48; 마11:19). 또한 여기서 '쳤다'(뒤프토)는 것은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 직업을 통해 지은 많은 죄를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자기가 왜 세리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세리로서 왜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세리가
자기뿐만이 아니라 많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처분만 기다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였습니다.
이 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1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justified before God"(NIV) 으로 그의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을 받으시고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회복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높이심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거나 부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곧 영생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깊이 인정하고 믿음으로 나아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2. 어린 아기와 같이 받드는 자
15-17절은 예수님이 어린 아기를 영접하시는 내용입니다. 당시에 유명한 랍비들의 축복을 받고자 아이들을 데려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15절에서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왔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어린 아기(브레페)는 '갓난 아기' 또는 '젖먹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모들을 꾸짖으며 접근을 막았습니다. 제자들은 아기들을 아직 인격체로 취급받을 수
없는 귀찮은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6b)
여기서 '이런 자'의
것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기 같이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합니다. 어린 아기는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엄마의 사랑을 믿기에 엄마가 먹으라고 주는 것은 무조건 먹습니다. 데려가는 곳에 그냥 갑니다. 단순하고 순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기가 엄마의 품을 의지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요한복음3장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어찌 그런 일이?" 하면서 자기주장을 했습니다. 반면에 지난번에 배운 바 있는 열 명의 나환자는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였습니다. 믿고 갔습니다. 그때 몸이
낫는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단순히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십니다. (17) '결단코'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처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 연륜이 오래될수록 순수한 믿음을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이 가을하늘의 구름과 같이 명확하십니까?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어린 아기와 같은 마음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누려야겠습니다. 누가 영생을 얻고 누립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기와 같이 받드는 사람입니다.
3.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은 18-23절에서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18절을 보면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마19:20)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유대 사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올랐고 많은 재물을 모았습니다. 당대의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강남의 수퍼펜트에 살며 포르쉐를 모는 사람이었습니다. 재물만 많은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잘 지킨 도덕적으로도 모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아쉬울 것이 없고 언제나 당당하고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도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영생의 확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 재산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결국 철저한 절망인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 것인가?"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내다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나왔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여쭈었습니다. 매우
진지한 자세로 물은 것입니다(막10:17).
그가 묻는 바가 무엇입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는데도 아직 영생의 확신이 없으니 이제 무엇을 더 해야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필요한 자격이나 혹시나 모르고 빠뜨리고 있는 어떤 행위가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영생을 선한 삶을 산 결과로 오는 대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Good teacher)이라고 일컬은 것도 그런 의미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결코 선한 분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관원을 돕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관원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곧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선하지 않으며,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사실, 곧 올바른 인간 이해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그의 입장에서 자기 문제를 발견하도록 도우십니다. 20절입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십계명의 후반부인 대인(對人)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이웃에 대한 율법 준수를
명하십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주력할 뿐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이웃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요일4:20). 그런데도 그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5,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가르치고 지키도록 훈련합니다. 그러나 그런 율법 준수는 율법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자적으로 겉모습으로만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그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선을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 선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선하다.' “나는 도적질 하지 않았으니 선을
행한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일들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불과합니다. 앞부분의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도 그러합니다. "내가 십일조를 드렸나이다"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자랑일 수 있을까요?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선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율법 준수로는 영생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증거가 그 자신입니다. 어려서부터 지켰지만
그가 기대한 영생, 즉, 무의미와 두려움, 죽음에서 자유로운 삶, 하늘의 생명력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하는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합니다.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22절입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 가지"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를
하면 그가 영생을 얻는 데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될 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일반화하여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재산을 다 드려 자선사업을 하면 영생을 얻는다? 아닙니다. 성프란시스 같은 탁발 수도사처럼 청빈한 삶을 살면 영생을 얻는다? 아닙니다. 본문에서 그 청년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는 것은 많은 재물이 그로 하여금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방향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 어떤 사람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다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롬3:20: 갈3:24).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 관리에게 이런 행위를 요구하셨을까요? 이는
그의 내면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고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다(요일3:15)" "간음하는 것만 죄가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죄다(마5:28)".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높은 기준 앞에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기보다 현재 그가 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이
말씀은 그로 하여금 자기가 섬기는 신이 재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는 재물을 가장
귀히 생각했습니다. 그 재물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 줄 신으로 믿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막10:21). 예수님은 이런 그를 사랑하사 재물신을 섬기는 삶에서 돌이키도록 하셨습니다. '영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그의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십계명 중 가장 중요한 제 1계명 곧,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도 지키고 있지 못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네가 섬기는 신, 맘몬을
네 삶에서 몰아내고 나를 섬기라. 맘몬이 영생을 주지 못한다. 내가
준다. 왜냐하면 내가 영생이기 때문이다(요14:6)" 하신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를 소유하는 것이 영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삶이 영생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생명의 떡이요 그를 먹음으로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요6:51). 우리가 그를 믿을 때 신비한 일이 일어나는데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된다는 것입니다. 곧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예수님은
영생 자체이십니다. 그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를
따르는 삶이 영생을 누리는 삶입니다. 영생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이 땅에서 포기한
모든 것은 하늘에서 나의 상급으로 고스란히 쌓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부자 청년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3절입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니라." 청년은
영생을 원했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재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영생이신
예수님을 믿기보다 재물을 믿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기보다 다른 신도 하나님
곁에 두기 원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19:22)고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과 대화하려 하지 않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예수님이 영생임을 알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그의 신적인 빛을 우리에게 비춰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신적인 빛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된 것입니다(고후4:6). 우리가 발견한 예수님은 세상의 그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붙들어야 할 분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따를 분입니다. 우리가
영생이신 예수님을 알고 소유하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가운데 영생을 소유한 기쁨을 충만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4.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4,2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십니다. 당시 랍비들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물의 위험성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도대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인 재물을 받은 자도 구원을 받기 이렇게 어렵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27절입니다.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재물의
힘은 막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다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통제하지 못하지만 재물은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게 보입니다. 그래서 쉽게 재물을
의지합니다. "내가 못할 것이 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재물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재물이
사들이는 것들은 다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재물이 사들인 것들을 탐닉하다가 안일의 누룩이 자리
잡습니다. 세속적인 사람, 곧 속물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새 마음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보화임을 알게 하십니다.
C.T. Studd는 영국의 유명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손흥민과
같았습니다. 더 했습니다. 명문 캠브리지
대학 출신이었고 억만 장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영생이심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아낌없이 다 나누어주고 중국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긍휼을
구하는 사람, 어린 아기와 같이 단순하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 재물을 마음의 첫자리에서 과감히 끌어내리는 사람의 마음에 은혜를 주십니다.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28절입니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헌신적인 결단을 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받아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29,30)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까지 일시적으로, 예, 일시적으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버리는
정도로 분명한 결단을 한 사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이중 부정으로 강한 긍정입니다. 반드시 영생을
얻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우리 신앙의 든든한 반석이 되는 약속인지요! 예수님을 그와 같은 자세로 따르는 자에게 주님은 우리의 가정도 구원하십니다. 일시적으로 불화하지만 결국 참된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여러
배를 이 땅에서 되받아 누리게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마음의 첫자리에서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영생을 얻는 삶이요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영생이신 예수님을 꼭 붙잡고 그를 뒤따르는 가장 복된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