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누가복음 32강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8:31-19:10
요절/ 누가복음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31-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하나밖에 없는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 이삭을 죽이려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막았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나무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다 아들 대신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그 양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리도록 친히 준비하신 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고 올라갔던 산 - 그
산이 바로 오늘날 예루살렘이 위치한 산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데리고 이 산으로 올라가는 여행길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의 핵심 줄거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인자 - 곧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과 능욕과 침뱉음과 채찍질을 당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의 아들 이삭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십니다. 그 제물이 누구입니까? 그 제물이 바로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이방인들에게 희롱과 능욕과 침뱉음과 채찍을 당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혼인관계
파탄의 귀책사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혼인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 관계가 깨어지고 마침내 이혼에 이르게 될 때 그 원인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주된 책임이 있는가 따지는 것입니다. 가정법원에서 ‘귀책사유’라고
부르는 것을 성경은 ‘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산산조각난 유리처럼 깨어졌을 때 그 관계 파괴의 귀책사유가 ‘죄’입니다.
혼인관계 파탄의 귀책사유는 다양합니다. 그중 주된 것이 불륜, 중대한 거짓으로 인한 신뢰상실, 선을 넘어서는 무책임함이나 불성실함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죄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돈이나 명예나 쾌락 등을 신으로 숭배하며 섬기는 영적 불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것, 자기 중심적인
자세로 자기만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것 등이 있습니다.
파탄에 이르게 부부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귀책사유가 있는 편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과 동시에 상대편에서 그 뉘우치는 마음을 받아주고 지난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인간의 죄로 인한 그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저 십자가 형벌이 본래는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이었음을 인정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할 때,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실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이 일어납니다.
35-43절을 보십시오.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맹인은 삶에 큰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함으로 길 거리에서 구걸하는 것 외에는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먼지 휘날리는 길거리에 앉아 목이 쇠도록 ‘조금만
도와주세요, 조금만 도와주세요.’ 구슬프게 외치며 구걸해야
겨우 굶어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느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었을 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크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은 ‘인자’와 더불어 메시야를 가리키는 별칭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했을 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그를 가까이 데려오도록
말씀하신 후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심과 동시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앞을 보지 못하던 맹인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열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고장이 나
깜깜하던 블랙스크린에 갑자기 총천연색 화면이 켜지듯 그의 뇌리에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이 아름다운 빛과 색깔로 보였습니다. 그는 입을 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무리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사건은 깨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혼인관계 파탄으로 남처럼 살던 부부가 다시 온전히 치유되고 회복될 때 이전처럼 서로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은 죄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것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 소원하는 바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남편이 아내의 요청을 귀기울여 듣고 응답하듯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만약 거절하시는 것 같고 듣지 않으시는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최고로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려는 계획이 있으신 것이니 실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9: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여리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인 반면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50미터가 낮았습니다. 추운 겨울에
예루살렘에 있다가 여리고로 오면 따스한 휴양지에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종려나무가 많은 이 아름다운
도시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란 이름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소망 가운데 삭개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실제 삶이 어떠합니까? 그는 세리장이요, 또 부자였습니다.
당시 여리고를 통치하던 로마 정부는 그 지역의 세금 징수권을 현지인에게 입찰 방식으로 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은 액수의 세금을 거두겠다고 써낸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준 것입니다. 세금 징수권을 따낸 사업자는 약속한 만큼의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고 그 나머지 부분을 수익으로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겠습니까? 세금 징수권을 따내기 위해 높은 금액으로
베팅했을 것입니다. 그 금액을
다 채우고 충분한 이익을 얻으려면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이 악착같이 지독하게 세금을 거두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런 세리들 가운데서도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리장이 된 것을 볼 때 세리
중에서도 탁월한 실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석유사업가 존 록펠러는 1870년 오하이오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타회사를 흡수 병합하는 방식으로 1882년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수입과 지출이 기록된 장부책을 항상 가슴에 끼고 살았습니다. 그는 퇴근 후에도 장부책을 보며 어떻게
사면 지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릴 수 있을지 늘 그것을 궁리하고 연구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지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면 그것으로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아마 삭개오도 록펠러같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방은 온갖 종류의 챠트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작년 세금 수입 통계 챠트, 올해 목표 차트, 지금 현재 상황을 보여주는 현황 챠트가 걸려있고 빨간 펜, 검은색
펜으로 숫자가 가득 기입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날 이런 그가 예수께서 여리고 성으로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와 같은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셨다는 충격적인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한 번 보고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여리고성 입구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내달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람이 너무 많고 그의 키가 작아 아무리
깡총 깡총 뛰어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커다란 돌무화과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마음에 한 번
계획한 것을 이루기 위해 체면같은 것 생각하지 않고 돌무화과나무를 기어올랐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있던 자리에 오신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고 삭개오가 있는 돌무화과나무를 쳐다보셨습니다. 이때 돌무화나무 잎 사이에 숨어있던 삭개오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본능적으로 상대방 눈 마주치는 것을
피합니다. 눈은 몸의 기관 중 가장 정직하고 마음의 상태를 창문처럼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혹시
내 마음을 들키지 않을까, 또 상대방이 나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생각하는 부담을 느낍니다. 대신 집에 가서 애완동물의 눈을 한없이 쳐다봅니다. 애완동물의 눈은
편견이 없습니다. 주인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좋은 대학에서 교육을 잘 받았는지, 연봉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습니다. 애완동물의 눈은 나를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눈빛입니다. 그래서 너무 좋습니다.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행복감을 가져다 줍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자기를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의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가진 재산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경멸의 눈빛으로 보았습니다. 삭개오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금전 출납의 상황이 기록된 장부만 보았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그가 내야 할 세금의 액수만 보았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알기 원할 때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춰봅니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맑은 눈동자에 거울처럼 비치는 나의 모습을 볼 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바로 옆에 앉아 계신 분의 눈을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눈을 마주쳐 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비쳐진 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삭개오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그 눈동자를
통해 삭개오는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영혼이 된 그를 찾기 위해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유대의
수많은 마을들을 돌고 돌아 마침내 이곳 여리고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을 보는 순간 삭개오는
그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뒤이어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은 그가 느꼈던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삭개오야”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삭개오를 여러 다른 별칭으로 불렀습니다. “매국노, 반역자 xx, 로마의 앞잡이”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본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하루밤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친밀한 사귐과 교제를 의미했습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의 집에 하루 숙박하는 것은 깊은 교제와 사귐을 의미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얼른 돌무화과나무를 내려와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가 예수님 일행과 함께 즐거운 만찬을 나눌 때였습니다. 삭개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지금까지 삭개오는 집 안 창고에 쌓아둔 재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했습니다.
재물이 늘어갈 때 그의 존재 가치도 그와 비례해서 커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는 경험을 통해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그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가 돈을 세며 돈과 함께 할 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니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늘 가난한 자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하기로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난 세월 모든 장부를 다 뒤져 혹시 자기가 부당하게 속여 빼앗은 것이 확인되면 4배 보상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람의 심장은 하나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하나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돈과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누가복음은 66권의 성경 중 이것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에 의하면 누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적으로 재물을 아까워하고 재물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고백이
다 거짓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위해, 또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내어주겠다는 고백을 통해 그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기 위해, 나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종종 여행을 떠납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유람 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고
멀리 산티아고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여행을 하다보면 오감이 새로워지고 예민해집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길을 걷다보면 주위의 경치를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음식을 먹으며 낯선 사람들과 대화할 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끼게 되고 또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런 여행은 분명 삶의 활력소가 되고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기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발견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과 눈을 마주쳐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eye contact! 예수님의 눈동자에 거울처럼 비추어진
나의 모습!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번 누가복음 19장 말씀을 묵상하며 나를 보시는 예수님의 눈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를 보시는 예수님의 눈은 큰 사랑의 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가장 사랑하시고 저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 최고의 좋은
것은 이 땅을 살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제가 제 삶의 여러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삶의 고난과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수많은 인생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에 터치되는 말씀을 전하는 말씀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삶의 여러 어려움과 시련을 당할 때 주님께 다소간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을 보고 그 모든 섭섭한 마음이 눈독듯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고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2,7부 형제 자매님들, 목자님들. 예수님은 여러분을 큰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십니다. 이 시간 세상의 여러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함몰된 마음의 눈을 들어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그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잃어버렸던 나의 고귀함과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