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가을수양회 제 1 강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말씀 / 에베소서 4:1-16
요절 /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A.D. 61-63년 사이에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 성도들과 아시아에 흩어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은혜와 기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그들이 받은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깨우쳐 주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소망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에베소서 1-3장은 신자들이 받은 신령한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는 이론편이고 4-6장은 실천편입니다. 실천편의 시작인 오늘 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1-3장의 교리들이 우리 신자들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성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사명과 우리의 영적 성장의 중요성에 대해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은 그 당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투옥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복음 진리에 따라 살다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사도로서의 권위와 진실성을 갖고 권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이 구절을 NIV 는 "live a life worthy of the calling you have received"로 번역하고 있은데 "부름 받은 그 부르심에 걸맞은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신자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라는 말의 뜻이 '에클레시아' 곧 부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특별히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교회'(敎會)라는 말보다 '소회'(召會)말이 더 적절하다고도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부르심 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많은 박해가운데 고향을 잃고 떠도는 나그네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신분의식이 있었습니다(벧전2:9).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위대합니까? 이러한 우리는 그러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외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내면적인 성품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여기에 나오는 동사들은 모두 1절에 나오는 "행하여"를 꾸미는 분사구문들입니다. 즉, 이러한 덕목들을 갖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덕목들이 무엇입니까?
(1) 겸손: 이는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입니다(빌2:3). 그런데 자기가 정말로 자신이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겸손해지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겸손은 일시적으로 남을 낫게 여겨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자의적인 겸손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자기를 낮추다가도 속교만이 올라와 어느 순간에 폭발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정말 낮은 사람,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깨달음과 영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속교만이 있습니다. "내가 그래도 너보다는 낫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도 없으면 무슨 기분으로 사냐? 합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자신이 남보다 낮은 자라는 인식을 할 수 있을까요? 이는 무엇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면 됩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입니다. 내가 자신에게 참으로 정직하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50페이지 라이프를 써서 발표한다고 해도 나의 숨은 죄, 나의 악한 본성, 나의 죄성은 내가 잘 압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나의 이기심과 교만, 꺼질 줄 모르고 솟구치는 욕심을 내가 압니다. 그러한 자신을 진실되게 인정할 때 나는 참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가 아니면 영벌을 받을 자라는 것을 압니다.
물론 다른 사람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발견한 사람은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처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덧입습니다. 사람들과의 상대적인 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뿌리부터 죄악된 자신을 인하여 상한 심정이 될 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집니다. 겸손은 크리스천의 미덕의 최고봉입니다. 우리가 사모해야할 최고의 은혜는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요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에서 가장 겸손한 분이십니다.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신 분이 말구유에 나시고 죄도 모르는 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모든 오해와 멸시를 받고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큰 바위 얼굴을 날마다 바라본 소년 어니스트가 그 얼굴의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계속하여 바라볼 때 그의 겸손을 덧입게 됩니다.
(2) 온유: 온유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성품은 야생 동물이 길들여지는 것과 같이 본성적인 혈기와 감정이 길들여지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과 태도로 남을 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칼로 찌르듯 함부로 말을 합니다. 찌른 사람은 잠시 속이 시원할지 모르나 찔린 사람은 큰 상처를 입고 고통합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온유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8,29). 사람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민수기 12:3은 말합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본래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영적 훈련을 많이 받았습니다. 날카로운 돌이 흐르는 물에 깎여 둥그런 자갈이 되듯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3) 오래 참음: 이는 보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3은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이 죄인들의 모욕을 받으실 때 얼마나 참기 힘드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장 그들을 멸할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보복 (Retaliate)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무골호인처럼 선과 악을 분간도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그저 이를 악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애매한 고난 가운데서도 마음이 시끄러워지지 않고 마음에 평화를 유지하는 내적인 힘입니다. 이러한 힘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4) 용납: 바울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합니다. 용납은 영접하는 것입니다. 특히 영접하기 힘든 사람을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용납할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내가 대신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요? 이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할 수 있습니다. 요일 4:10,11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원수같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사랑을 날마다 더욱 알 때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조금씩 자랍니다. 그 사랑의 자라 우리로 그 사랑을 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서로 용납할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를 위해 목숨을 주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져야 할 덕목들이 무엇인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위해 이러한 덕목들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씀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평화의 줄로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그 하나됨이 잘 보존되도록 힘쓰십시오." 여기서 평안의 매는 줄은 'the bond of peace'로 '평화의 허리띠'입니다. 성령께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우리를 평화의 끈으로 묶으셨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이 어디 있냐고요? 여러분의 이웃이 지옥입니다." 죄로 인하여 적개심을 갖고 사는 세상 자체가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배운 대로 정치철학자 홉스는 인간의 자연 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랑을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 이제 조금씩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또한 서로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죄를 속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시고, 사람들과도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그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힘써 지키라'(스푸다존테스)는 '노력하다'보다 강한 표현입니다. 온 힘을 다해 힘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한 교회 공동체로 모으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기질과 재능도 다르고 경험이나 관심사도 다릅니다. 생각이나 성격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도 다르고 같은 점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됨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많은 수고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만약, 그러한 수고와 희생을 멈춘다면 하나됨은 금방 깨질 것입니다. 교회는 갈라지고 나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직면하는 큰 어려움 중에 하나가 하나됨을 지키는 일입니다. 교회가 하나됨을 지키지 못해 서로 싸우고 갈라지고 조각나서 흩어집니다. 겸손이 아니라 교만으로, 온유가 아니라 분노로, 오래 참음이 아니라 혈기와 감정으로,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앞세우며 미워함으로 결국 분열됩니다.
교회가 깨어지기 쉬운 이유는 이러한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됨을 깨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열시키고자 애쓰는 자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마귀는 온갖 간교한 속임수로 접근합니다. 자기 말을 들으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마귀의 말은 너무나 간교하여 감미로운 음악과 같고 달콤한 꿀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확신있게 말합니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사탄 마귀는 교회의 하나됨을 공격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분열된 교회, 조각나서 힘을 상실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마귀에게 식은 죽 먹기입니다. 분열시키고 약화시켜 각개 격파를 하는 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마귀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살인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죽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약간의 해를 끼치고 물러나는 자가 아닙니다. 죽일 때까지 끝장을 보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 힘써야 합니다. 유니티를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고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 싸움의 대상은 서로가 아니라 마귀와 악한 영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 싸운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갑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해왔다 하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됨이 깨지는 건 아주 작은 일,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몸이 찢어지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하나됨을 유지하여 주님의 거룩한 공동체로 성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수고와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특히 유니티를 이루고자 힘써야 합니다. 유니티를 위해 수고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21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생각하며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함으로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됨을 잘 지켜나가길 기도합니다.
4-6절은 우리 믿는 자들이 하나 될 수 있는 기초를 말해 줍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여기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뜻합니다. 이러한 '한 몸'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히 하나로 묶여진 유기체를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살아있는 몸이 되었습니다. 또한 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서로 다른 소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로서 같은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 소망은 장차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엡1:10). 우리의 몸이 구속되어 주님의 형상을 덧입고 다시는 죄가 없고 죽음이 없는 그 나라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를 영원히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분명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7절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각 사람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 곧 은사에 대해서 말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인 재능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메시야 승리 찬송인 시 68:18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8-10)" 예수님은 낮아지심으로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고 대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자로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승리로 얻은 전리품을 은사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은혜의 선물, 곧 은사를 주실까요? 그 이유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엡14:12). 여기 '온전하게 하다'는 단어는 '준비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자기 자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도록 하심입니다. 우리는 캠퍼스 학생들을 제자양성하는 공동체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경선생으로 성장하고 쓰임 받고자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공동체를 섬기는 모습은 다양하고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은사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서로 우열을 비교할 수 없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한 목적으로 한 마음으로 머리되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11절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다섯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여기서 바울이 방언과 신유의 은사보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의 은사를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이 은사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교회의 기초를 이룬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이런 의미에서의 사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구약이나 신약의 선지자들은 직접적인 계시의 전달자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성경이 완성된 오늘날 선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선지자는 성경 해석의 특별한 은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전도의 은사를 말합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복음 전하는 전도의 직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오늘날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은사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 복음을 들고 나가 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목사는 양떼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목회자를 말하고, 교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선생을 말합니다.
13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건강한 교회는 성장합니다. 생명이 있다면 성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생명은 성장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성장은 일생동안 계속해서 이루어 가야 하는 구원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화'되어가는 것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직접 만날 때까지, 주님에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님 안에서 보내는 세월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더욱 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 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영적으로 자라고 있는지 말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에게까지 자라가고 있는지요?
영적 성장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장하려면 음식을 잘 섭취해야 하듯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말씀을 잘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완전히 소화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일체가 되어 나의 힘이요 에너지요 생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먹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예수님을 아는데 있어서 장성하게 되고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도록 하시는 것에 매우 열정적이십니다. 이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계속 더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시는 그날에 우리는 그 완벽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일이 애를 쓰지 않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힘을 써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듣고, 말씀 공부도 힘을 써서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음식을 먹고 나서 활동을 해야 성장하듯이 말씀을 섭취하고 나서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성장하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할 때 교회의 하나됨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교회공동체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며 하나됨을 힘써 지키는 공동체로 축복하여 주사 오직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