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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성탄 제1강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나셨다 (이사야 9:1-7)2024-12-0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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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탄 제 1강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나셨다


말씀/ 이사야 9:1-7

요절/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오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한 성탄 소식입니다. 그런데 성탄의 기쁜 소식과는 대조적으로 이사야 살던 시대상황은 매우 암울하고 어두웠습니다. 그럼에도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를 보내겠다는 메시야 소식에 소망가운데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깊이 만나고 성탄의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1. 큰 빛 되신 예수님


1절을 보겠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땅과 납달리땅을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 납달리 지역은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땅을 멸시와 배척을 당하게 하셨습니까?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이스라엘 북방 경계로서 이방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곳 거주민들은 이방으로 끌려가기도하고 이방 주민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그 땅은 민족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종교적으로도 여호와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솔로몬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그곳 거민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신전을 만들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다’ 하고 그것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로 우상숭배의 죄로 빠뜨린 악한 왕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모두다 이 우상숭배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bc722년 앗수르를 통하여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땅을 멸시를 당케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라 부르며 멸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도 ‘에이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무엇이라 예언하였습니까? 그들에게 다시는 흑암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그들이 멸시를 당케 하셨지만 이제 영화롭게 하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멸시받던 땅이 영화로운 땅이 될수 있습니까?


   첫째.  큰 빛을 비추사 영화롭게 하십니다.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 이는 좁은 의미로는 침략과 포로생활로 고통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노예가 되어 죄와 사망 권세아래 고통하며 영원히 심판받게 된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흑암에 행하고 있습니다. 흑암에 행한다는 것은 무입니까?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인생의 참 의미와 방향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온갖 죄악과 어둠 속에서 미워하며 싸우며 죽이는  사망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빛이 세리 레위에게 비추매 변화되어 성마태가 되었습니다.  갈릴리바다에서 물고기나 잡던 촌부 베드로가 이 빛을 만나 위대한 사도가 되어 수천 수만명을 회개시키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주의 제자가 되어 갈릴리를 명문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빛은 우리 인생들을 옭아매는 죄와 사망 권세를 물리치는 생명의 빛입니다. 절망하는 자에게 희망을 주고 고통 가운데 있는 자에게 평안을 주는 소망의 빛입니다.


   둘째, 주께서 그 멍에를 꺾으시고 창성하게 하심으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3절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침략과 짓밟힘에 시달리고 백성들은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세울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창성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 백성들은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그 즐거움은 추수하는 즐거움,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과 같습니다. 추수하는 즐거움은 자신이 열심히 일한 대가의 열매를 얻는 즐거움입니다.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은 승리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어떻게 이런 즐거움이 가능합니까?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멍에란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서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포로로 잡혀가 노예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으시고 그들을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훗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또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짓누르던 죄와 사망의 멍에를 십자가와 부활로 꺾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 삶에 열매 맺는 즐거움과 승리하는 즐거움을 주십니다. 더 나아가 5절은 말합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전쟁후 군인들의 신과 겉옷에 얼마나 피가 많이 묻어 있겠습니까? 그 피묻은 옷을 다음 전쟁때 쓰려고 보관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히 태워집니다. 이는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진정한 평화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의 멍에를 꺾고 자유를 주셔서 열매와 승리가 있는 즐거운 인생으로 창성케 하시며,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리나라도 반만년 역사를 돌아보면 북방으로부터 무수한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고 땅은 유린당하였습니다.  해마다 수많은 여인들이 북방으로 조공으로 끌려갔습니다. 헐벗고 가난하였습니다. 무속신앙이 판을 치고 술과 도박이 만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흑암 속에 행하던 이 땅을, 고통과 멸시를 받던 이 땅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땅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사 많은 선교사님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흑암에 갇혀있던 백성들을 부흥 사경회를 통한 말씀 신앙, 새벽기도신앙으로 깨우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비추셨습니다.  빛 되시는 예수님이 임하시매 슬픔과 운명을 딛고 일어나 교회를 세우고  새벽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잠들어 있던 이 민족을 일깨우고자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주의 제자로 성장하여 세계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생명의 빛이 임하자 이 땅을 짓누르던 죄와 사망, 절망과 흑암의 권세가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때가되자, 일제 치하의 멍에를 벗기시고, 6·25 전쟁으로 상처와 슬픔으로 가득한 이 땅을 하나님께서 창성케 하셨습니다.  우리 나라를 70년 만에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의 강대국이요, 현대사회에서 핵심기술인 반도체, 2차전지, 조선, 자동차, 원전, 우주항공, 방산기술까지 초강국이 되게 하셨습니다.   선교사 파송 2위의 영적강국으로 창성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던 이 나라를 전 세계를 영육간에 먹이는 제사장 나라로 쓰임 받게 하셨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우리나라를 창성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림니다. 


  지금 세계적으로는 이스라엘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십만 명이 죽었고, 수천만 명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파병되어 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까, 우리나라가 직접적으로 말려들까 염려됩니다.  지난 3일 밤 계엄령 선포를 통하여 우리나라는 총성없는 내전 상태로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심히 걱정되고 염려가 됩니다.  혼탁한 정치로 백성들의 마음은 나뉘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발달된 정보망을 통하여 흑색선동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며, 유튜브 알고리즘은 우리를 편향되게 만듭니다. 백성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구별하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게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현실에 코박고 있는 우리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보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꿇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나라 백성이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무장과 기도의무릎을 꿇고 영적으로 다시 창성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한 아기의 이름


1절에서 5절까지에서 일어난 놀라운 반전의 힘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6절상반절 되었는데 까지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대 반전의 힘의 근원은 한 아기입니다.  그러면 한 아기는 어떤 아기입니까? 어떤 아기이기에 앗수르가 강력한 군대로 나라들을 파괴시키고 무서운 칼과 창으로 잔인하게 살육 하는데, 어떻게 한 아기가 놀라운 반전을 한단 말입니까?  


 6절 그의 어깨부터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의 어깨에 멘 정사 때문입니다.  정사란 왕이나 고관 관리들이 어깨에 두른 금사슬을 말합니다. 그것은 권세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한 아기가 어깨에 맨 정사는 어떤 권세입니까?  그 권세는 온 세상 온 우주를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그분은 이땅에 오시기 전에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태양과 광활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무수한 별들을 이분이 지으시고 이분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뿐 아니라 에굽과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제국도 이분의 통치 영역아래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과 생명도 우리의 삶 세세한 것까지 다 아시며 관여하십니다.  세상의 역사가 이분에게 초점을 맞추어 굴러갑니다. 


 이제 우리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그분에 대해 더 깊이 알아봅시다. 


   첫째. 그의 이름은 기묘자 이십니다. 기묘란 기이하고 묘하고 놀랍다 라는 말로 영어로는 wonderfull 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땅에 한 아기로 오신 것 그 자체가 기묘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이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의 죄의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십자가에 죽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나게 된것은 너무나 기이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죄로 고통받으며 어둠의 세력에 잡혀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자유와 기쁨을 만끽하며 생명력있는 삶을 사는 것은 기묘한 일입니다. 

 

   둘째. 그의 이름은 모사 Counsellor이십니다. 모사란 조언자, 왕의 책사입니다. 예수님은 원더풀 카운슬러가 되십니다. 고뇌하는 지성인 니고데모를 거듭남의 진리로 상담해 주시고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을 영생수의 말씀으로 상담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희생의 원리로 세상을 섬기사 진정한 승리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은 참으로 모사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정부 각료는 경제정책을 잘못 세워 많은 서민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사가 없어서 백성을 불안하게 하고 고통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캠퍼스 지성인들은 모사가 필요합니다. 대학에만 들어가면 뭔가 다 해결될 것 같았는데 대학에 들어와도 전망이 암흑과 같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지 모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뛰어난 모사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시고 도와주는 지혜자요 영혼의 상담자가 되십니다. 


  셋째,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어로는 Mighty God인데, Mighty는 어려움을 이기고 전진하는 강력한 힘을 말합니다. 한 아기 그분은 그 무엇, 그 누구보다 강하십니다. 그분은 만물의 근원이시고 만물을 지으시고 운영하시기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고치셨습니다. 귀신보다 더 강하시기에 ‘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아이에게서 떠나갔습니다. 나병환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병도 치료하여주십니다. 우리의 어떤 어려운 문제도 능히 해결해주십니다. 한 아기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그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이는 영원히 우리를 아버지처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는 보호자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요 우리를 양육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채찍질 하사 사람답게 키워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인해 마음에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술 마시고 가정불화를 일으켜 운명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 밑에서 지냈다 하더라도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나이 들면 연약해지고 병치레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병수발을 들어야 하며,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책임져 주시는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다섯째, 그의 이름은 평강의 왕 이십니다. 이는 ‘내면에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평강의 왕’ 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왕은 억압과 힘으로 통치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넘치는 평화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 분은 사랑과 대화, 긍휼과 용서로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AI시대의 도래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막연하고 불안 합니다. AI가 우리의 일자리를 잠식하고 있는데,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렵습니다.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또다시 AI와 일자리 싸움을 하여야 한다니 두렵기만 합니다.  내면에 진정한 평안을 찾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을 기피하고자 운동, 여행, 술에 취하기도하고 또 먹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럴지라도 불안감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14:1)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평강의 왕 예수님은 우리들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십니다. 


   평강의 왕이 다스리는 이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세상 나라는 흥했다가 쇠하여 없어집니다.  팍스로마나도 멸망했고, 해가 지지않는 나라 영국도 힘을 잃고, 강대한 미국도 점차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나라는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합니다. 그 분이 한 아기로 오시면서 시작된 이 나라는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 완성됩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요 소망이 됩니다. 우리를 평화로 다스리고 평안을 주시는 놀라운 그분의 이름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한 아기를 주시겠다는 이 예언의 말씀은 700년 후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탄생하사 성취되었습니다. 이 한 아기 예수님으로 흑암에 있던 우리는 큰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던 죄와 사망의 멍에를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왕같은 제사장으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한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우리를 돌보시며 평강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구원과 축복은 한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눅2:10).


저의 인생가운데도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기묘하고 놀랍습니다. 저는 열등감과 깊은 자의식과 대인공포증으로 고통하였습니다.  취직은 할수있을까?  결혼은 할수있을까?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염려하였습니다. 젊은이의 패기와 기상은 찾을수 없고 늙은이처럼 시들시들 죽어가던 자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저에게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삶가운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직장생활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슬퍼하던 저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셨습니다.  저는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밤낮 말씀을 붙들고 주님께 부르짖었는데 주님은 좋은 직장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광야 같은 사업의 길을 달리게 하셨습니다.  제가 주님 의지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부족한 저에게 추수하는 기쁨을 주시고 연약한 제가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업계에선 기묘한 사람입니다. 이는 아무리 보아도 사업할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 하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저의 인생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몇백년 후에 오실 한 아기를 인하여 감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한 아기 예수님과 지금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잠재우고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심령으로 영접하고 성탄의 기쁨으로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