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성탄 제 2강 임마누엘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 1-25 요절: 마태복음 1: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퀴즈를 한 번 내 보겠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복음서는 무엇이지요? 예, “마태복음”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은 누가 썼을까요? 예! ‘마태’가 집필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제게는 좋은 수면제였습니다. 처음에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 지성인이라면 성경을 알고는 있어야지” 하면서,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먼저 구약을 펼쳐 보았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첫째 날이니라!”, 잘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좀 쉬워 보이는 신약 부분부터라도 읽어보자!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펼쳐서 읽어 보는데,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또 낳고.” 하였습니다. 낳고 낳고가, 자고 자고로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목자님께서 마태복음 1장에 대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서는 마태복음 1장이 가장 은혜를 받으면서 읽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 한 번 같이 살펴볼까요? 오늘 말씀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 둘째는 은혜와 믿음의 족보 가운데 오신 예수님, 그리고 셋째는 임마누엘 구원주로 오신 예수님 입니다.
첫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저자 마태는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믿음의 길을 출발하였습니다. 창 12:1절과 2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의 길을 나아갔습니다. 히11:8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여러 시련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22:18절은 말씀합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마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로서 약속의 메시야이시고 구원의 주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과 공의로 다스린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12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로서 약속의 메시야가 되십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지상메시야 왕국 건설이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약속의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로서 오신 약속의 메시야 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예언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서,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한 아기로 오신다고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 9:6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시간 약속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적인 생각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은혜와 믿음의 족보 가운데 오신 예수님 6절을 보십시오!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요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만 할 시커먼 죄인이었습니다. 삼하 11장을 보면, 다윗의 죄가 잘 나오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암몬 족속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모두가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금식이라도 하면서, 깨어 기도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이 풍전등화의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왕비들을 데리고 나가서 부상한 병사들의 상처를 싸매 주기라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한가하게 왕궁을 거닐다가 여인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었습니다. 왕궁으로 데려다가 간음이나 하였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한 것이 드러나자, 어떻게 이 일을 숨길까 궁리하였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불러서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유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충신 중의 충신이라 다른 병사들을 생각할 때 한가로이 동침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삼하11:11은 말씀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이 세상에 이런 충신을 또 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충신 우리야를 보았을 때, 다윗은 당장이라도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상황에서 더욱 사악한 간계를 꾸몄습니다. 우리야를 전쟁터 맨 앞에 보내어 혼자 남게 하고, 다른 병사들을 철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충신 우리야는 다윗의 사악한 간계로 전쟁터에서 홀로 싸우다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저자 마태는 다윗은 자기의 아내 ‘아히노암’이나 ‘아비가일’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것이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면서, 다윗의 더럽고 사악한 죄를 대대손손 적나라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다윗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한 인간이고 죄인에 불과합니다. 다윗도 자신의 의로운 행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족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윗과 더불어 은혜와 믿음의 족보를 뒷받침하는 네 명의 여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족보에는 어떤 사람들이 기록될까요? 우리 가문 중에서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사람들을 기록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기록하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어떤 여인들이 나옵니까? 첫째는 불륜녀입니다. 둘째는 창녀입니다. 셋째는 이방녀입니다. 넷째는 별 볼일 없는 여인입니다. 뭐라구요? 뭐, 거의 쓰레기 같은 여인들을 모아 놓았네요?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인들은 족보에 기록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 여인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다는 누구와 자식을 낳았다고 나오나요? 다말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아이를 낳았다구요? 요즘 막장드라마의 단골주제 같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유다와 자식을 낳은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이에 대해서 나옵니다. 유다는 아들이 세명이 있었습니다. 엘과 오난 그리고 셀라였습니다. 엘이 다말과 결혼하였는데 일찍 죽었습니다. 당시에는 형이 먼저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주는 형사취수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잇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오난이 다시 다말과 결혼하였는데, 그도 죽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결혼하도록 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또 죽을 것 같았습니다. 다말은 후손을 얻기 위하여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관계를 가지고 자식을 얻었습니다. 다말은 후손을 낳아 하나님의 기업을 잇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말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셨습니다.
다음으로는 라합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라합은 누구였습니까? 가나안 이방여인으로서 창기였습니다. 몸을 팔아서 연명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신23:17절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와 남창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떡하니 올라가 있습니다. 이유는 라합이 믿음으로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보호하여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수2:11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비록 창녀였지만 하나님을 천지만물의 창조주로 영접하였습니다. 라합은 자신의 동족보다도 하나님의 편에 섰습니다. 라합은 죄악된 동족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히 11:31절은 라합의 믿음을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다음으로는 룻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룻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이방여인은 당시 창기와 마찬가지로 취급되었습니다. 또한 모압출신이었습니다. 모압출신은 하나님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도록 저주받았습니다(느 13:1). 거기에다가 과부였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룻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도록 권면 하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끝까지 따랐습니다. 룻1:16은 말씀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은 나오니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룻은 자신의 미래와 자신의 소중한 꿈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음으로는 마리아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님의 탄생이 시골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시골처녀 마리아는 그냥 소박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소녀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런 마리아에게 천사가 임하였습니다. 눅1장 31절은 말씀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상의 여인들을 인간적으로 보면 불륜녀, 창녀, 과부, 시골처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사라나 리브가 같은 여인들은 제쳐두고, 이런 별볼일 없는 여인, 천한 여인들을 족보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족보는 믿음의 족보임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생명 구속역사에 어떤 사람들이 쓰임받는 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도덕적인 관점이나, 사회적인 관점보다도, 은혜와 믿음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구속역사에 믿음의 사람들을 주권적으로 들어 쓰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도 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들 자신을 볼 때, 하나님의 구속역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에이, 내가 뭘~! 내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기둥이라고! 나는 절대 안돼!”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족보를 볼 때,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은혜와 믿음의 역사임을 배웁니다. 나의 인간적인 환경을 봅니까? 나의 죄악된 과거를 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임마누엘 구원주로 오신 예수님 18절을 보십시오: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정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정혼 중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 후, 1년 정도 정혼기간을 가졌습니다. 정혼 기간에 마리아와 요셉은 서로를 그리워 하면서 서로를 향하여 애틋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요셉은 석양이 넘어갈 즈음에 마리아의 집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조용하게 불러 보았습니다: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야를 빨리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눈가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이런 요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메시야를 임신하고 출산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정혼기간은 과학이 발달되지 아니한 당시로서는 다른 사람과의 부정한 일이 있었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정결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 중에 임신을 하게 되면, 불륜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고민하였습니다. 요셉으로서는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레20:10절에서는 누구든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떠벌리고, “속았다! 속았어!” 하면서 분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리아를 당장 돌로 쳐 죽이고, 예물반환 등 그동안 입은 손해에 대해서 배상을 청구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마리아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았습니다. 마리아에게 가장 좋은 길이 되도록 배려하고자,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요셉을 성경에서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이 너무나 큰 고통 중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천사가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된 것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요셉의 모든 의문이 한 순간에 풀리고, 영혼에 생명의 빛이 쏟아졌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감격의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를 통하여 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21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죄문제를 담당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야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부강하게 만드실 메시야를 바랬습니다: "Make Israel Great Again!".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근본문제는 무엇일까요? 내가 처해 있는 어려운 환경입니까? 사회의 구조적 문제입니까?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해서 입니까? 이 환경만 개선되고, 금수저가 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까요?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까요? 이스라엘이 다윗왕의 때처럼 부강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까요? 그러나, 환경이 변화되어도 금수저가 되어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근본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의와 탐욕, 시기, 살인, 분쟁, 무정, 무자비 등의 죄악으로 인해서 잠시도 평안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이 쏘는 독화살에 쏘여서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갑니다.
여기 독화살의 예가 있습니다. 한 농부는 4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형제지간에 우애가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모두들 그 농부를 부러워 하면서 칭찬하였습니다: “저 농부는 참 좋겠어! 저렇게 우애가 좋은 형제들을 두었으니,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어!” 어느 날 농부는 경작하던 농지 4,000여평 남기고 죽었습니다. 농지는 신도시개발로 수용을 당하였고, 100억이 넘는 막대한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엄청난 돈이 생긴 후에 발생하였습니다. 4형제가 돈을 두고 싸웠습니다. 큰 형이 더 많이 가지려 하자, 막내 동생이 분을 품었습니다. 유산을 나누려고 모인 자리에서 휘발유를 자신의 몸에 끼얹고 그러면 안된다고 큰 형을 협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옥신각신 하다가 라이터의 불꽃이 튀었고, 두 형제가 불에 타 숨졌습니다. 세상에 이런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죄문제로 고통받는 인생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심으로 인생들의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죄를 짊어지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히 함께 하시며 도와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7장 14절 말씀으로서, 이미 예수님의 탄생 700여년 전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단어는 ‘임’이 함께, ‘마누’가 우리와, 그리고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이 단어는 마태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지독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오직 자기만을 알았고, 오직 돈만을 알았습니다. 그는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오직 자신의 잣대로만 판단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이런 지독한 이기주의자인 마태와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마태와 함께 하셨습니다. 마태의 차디찬 가슴에 사랑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그에게 사랑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시면서 한걸음 한걸음 성마태로 성장하기까지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마태복음 1장의 의미를 배운 후, 마태복음 1장은 더 이상 수면제가 아니라, 은혜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저는 특히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특히 라합과 같은 창녀라도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세리 마태보다 더 이기적인 죄인입니다. 제가 저를 보면 절망만이 됩니다. 제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임마누엘의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소망을 두십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인을 사랑의 사도로 인도하십니다. 제가 저의 죄와 허물을 들고 순간순간 주님께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올 한 해를 돌이켜 볼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은 죄와 허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예수님은 이런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이 임마누엘 예수님께 이 시간,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 오늘날 캠퍼스와 우리 주위에는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참된 소망은 임마누엘 예수님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 분들을 임마누엘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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