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요한계시록 4강
어린 양 사자
말씀 요한계시록 4:1-5:14 요절 요한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 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계시록 2,3 장은 주님이 지상교회에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4,5장은 주님이 하늘의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하늘의 상황은 지상에서 영적 전투하는 교회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비결을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은 우주공간이 어디가 아닌, 하나님이 계신 영적 세계를 뜻합니다(고후12:2). 주님의 음성이 그를 하늘로 초청하였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 데” ‘보라’ 이 말은 감탄사로서 그가 엄청난 광경을 보았음을 뜻합니다. 그 광경은 하늘에 보좌가 있고 그 보좌위에 앉으신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땅의 보좌를 바라보았습니다. 땅의 보좌는 로마 황제의 보좌입니다. 또한 믿음의 사람들은 사탄의 권좌를 생각했습니다(2:13). 로마황제와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의 강한 세력을 생각할 때 성도들을 절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으로 하여금 하늘의 보좌가 있으며 그 자리는 공석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통치자로 건재하심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 상황이 때로 하나님이 어디로 가신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그 깊은 섭리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면, 보좌엔 앉아 계신 이 곧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같더라.” 벽옥은 하늘색 보석입니다. 벽옥은 하나님의 청결하심을 뜻합니다. 홍보석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뜻합니다. 또 보니 무지개가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녹보석같았습니다.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심판으로 불안에 떨고 있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미래에 평안과 소망을 주기위해 언약의 증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무지개는 녹보석같았는 데 녹보석은 바다의 색으로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십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소망가운데 피조물들을 인내하시며 섬기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를 24개의 보좌가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위에 24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아 있었습니다. 24장로들을 24명의 천사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란 표현을 볼 때 사람임을 알 수 있고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한 이들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들이 금관을 쓰고 있는 것은 그들이 믿음의 승리자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학자들은 구약을 대표하는 열두 조상과 신약을 대표하는 열 두사도일 것이라고 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앞에 켠 일곱 등불이 있습니다.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고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6a절을 보면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습니다. 수정같은 유리 바다는 하나님의 장엄함과 하나님앞에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남을 뜻합니다. 6b, 7, 8a를 보면 보좌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같았습니다. 이들은 에스겔서를 보면 한 생물이 4면에 네 생물의 얼굴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겔 1:10). 어쨋거나 이들의 모습이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사람 같고 독수리같은 것은 이 천상적 존재가 하나님을 보필하고 그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 용감하고 열심 있고 지혜롭고 민첩함을 뜻합니다. 그들은 날개를 각각 여섯 개씩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매우 신속하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고 생물 앞뒤(6)와 날개 안과 둘레에(8, 표준새번역) 무수한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생물이 가진 통찰력의 정도를 뜻합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8b)” 네 생물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기에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누구보다 더 잘 알텐데, 이들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한 단어를 두 번 말하면 강조한 것이요, 세 번 말하면 지극한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다르다는 뜻입니다. 내용과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과 얼마나 구별되십니까? 사 55:8,9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우리 피조물들의 생각과 뜻과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예컨대 다음 강에서 순교자들이 어느 때까지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겠느냐 탄원하자, 하나님은 순교자가 더 생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6:11). 우리는 살기를 바라는 데 하나님은 우리가 더 죽기를 바라십니다. 180도 다릅니다. 요셉은 꿈을 꾸고 자기 삶에 펼쳐지는 꽃마차 길을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상과 다르게 채색 옷을 벗기고 그가 노예가 되게 하시고, 성추행범으로 오해받게 하시고, 감옥에 넣으셨씁니다. 비둘기의 목을 비트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데로 모든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신앙생활에 회의를 품거나 불신에 빠집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긴 하지만 속도만 늦어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내 생각대로 나를 인도하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자녀들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내 생각대로 공동체를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나보다 훨씬 더 높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낮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고 요단강물을 막으셨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바벨론에서 그 백성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이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생각했습니다. 로마황제의 통치하에서 과연 신앙생활은 가능한가? 길드생활과 신앙생활은 병행될 수 있을까? 사도바울이 꿈꾸었던 로마의 복음화는 실현될 수 있을까? 너무 요원하지 않는 가? 내 믿음 지키는 것도 어려운 데 후손들에게 믿음을 잘 계승시킬 수 있을 까? 이렇게 고생하는 부모세대를 본 2세들이 과연 믿음으로 살 것인가? 이런 것만 생각하면 그들의 입에서는 한숨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도미티안 황제는 곧 죽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점점 복음화됩니다. AD 313년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기까지 합니다. 로마에 성베드로 성당이 서고 구교의 본산 바티칸 교황청이 서기까지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우리 보기에 요원한 일도 이루어집니다. 가장 힘든 일이 무엇입니까? 동역, 제자양성, 2세가 거듭나는 것 무엇입니까? 가장 힘들다는 동역의 역사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이지만 양들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과연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최후에 우리의 모든 헌신과 눈물을 기억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잘했다 칭찬하실 것입니다.
저는 복음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외대에서 김소연 목자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여전히 역사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성대에 선주자매님과 성민형제님이 일대일하고 캠퍼스모임도 이루고 있습니다. 한성대도 강민수, 김경훈 형제님들이 그룹바이블 역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변화될까, 제자의 단계로 진입할까 싶지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소망가운데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생물들은 쉬지 않고 24시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24 장로들도 하나님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자기들이 쓰고 있던 관을 벗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찬양하였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자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11)”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만물이 얼마나 광대하고 복잡하고 다양하며 신비합니까? 이런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지극히 합당한 분입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는 데 이 두루마리는 인류의 종말과 성도의 구속, 그리고 최후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이 담긴 책입니다. 이 책이 안팎으로 쓰여져 있다는 것은 매우 상세하고 완전하게 기록된 책임을 보여줍니다.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는 것은 아무도 함부로 보거나 시행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힘있는 천사가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큰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위나 땅 위나 땅 아래에 자신이라고 답을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울었습니다. 눈앞에 구속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다 기록되어 있는 데 그것을 들여다 볼 수 없다니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했겠습니까? 요한은 사실 역사가 빨리 마감되고 만유가 회복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권한을 받아 그 종말을 시행할 분이 없는 것같자 울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누가 그 봉인을 뗄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까?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그분은 유대지파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입니다. 그분이 봉인을 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이긴 자,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줄기가 아니라 뿌리인 것은 그가 인간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실제는 다윗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왜 사자(Lion)라고 합니까? 창세기에 나온 야곱의 축복에 의하면 유대지파는 사자로 묘사되었습니다. 창세기 49:9b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사자는 동물계를 다스리는 왕입니다. 아무도 사자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는 유다의 족속이 왕가가 될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 예언대로 유다의 후손중 첫 왕이 다윗입니다. 그리고 20명의 왕이 배출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유대인의 왕’으로 불리우셨습니다(마2:2).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정도의 왕이 아닙니다. 창조주로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왕의 왕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부활로서 자신이 다윗의 줄기가 아니라 다윗의 뿌리임을 입증하셨습니다(롬1:4).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실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그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만유를 상속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황제, 중국의 황제들, 일본 천황,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 등이 자신들의 연호를 정하고 자신을 무슨 역사의 기준인양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전 역사적으로 그런 이들을 역사의 기준으로 인정한 경우는 없습니다. 전 세계인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의 기준으로 인정하고 그 역사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계가 인정하는 진정한 역사의 기준이며 주인공이시며 주관자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에서 만유회복의 명령을 위임받은 진정한 만유의 상속자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을 믿는 이들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역사창조자요 주인공으로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요한은 예수님이 유다지파의 사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예수님은 사자가 아니라 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일찍히 죽임을 당한 것같은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일곱 뿔이 있고 일곱 눈이 있었습니다. 그가 일곱 뿔을 가졌다는 완전한 권세를 지닌 분임을 뜻합니다. 그가 일곱 눈을 가졌다는 것은 성령으로 온 세상을 살피시는 분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5절에서 사자이셨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어린 양입니다.. 그것도 죽임당한 적이 있는 어린 양입니다. 정리해 보면 예수님은 본질은 사자인데 어린 양처럼 살다가 죽으신 분입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위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얼굴은 얼마나 위엄있고 무섭습니까? 그 이빨과 발톱은 5센치를 넘어갑니다. 웬만한 짐승은 그 앞에 얼어붙어 도망치지도 못하고 사자의 밥이 됩니다. 사자는 어떤 동물도 순식간에 찢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어린 양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다른 짐승을 공격할 뿔도 없습니다. 공격하면 그냥 당하고 죽습니다. 궁지에 몰리면 모든 짐승은 저항합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발톱을 세우고 덤빕니다. 그러나 어린 양은 잠잠히 찢겨 죽습니다. 좀 퍼덕이다 죽습니다. 어린 양은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힘이 없고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사자이신 예수님이 어린 양이 되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엄청난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피조물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이 땅에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자 왕이신 예수님이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엄청난 권위와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래 참으시고 오히려 자신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되셔서 말없이 죽으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찢어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악된 우리 인생들을 살리신 방법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구원역사에서 승리하신 방법입니다. 사자였으나 죽임당한 어린 양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지, 선이 악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섬김으로 교만한 자들을 이기는 것입니다. 침묵으로 비방을 이기는 것입니다. 축복으로 중상모략이나 저주를 이기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죽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강퍅한 로마군병이 감동을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은 원수들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린 양 사자는 우리가 양들을 어떻게 섬기고, 동역자들을 어떻게 섬기고, 자녀들을 어떻게 섬기고 핍박하는 가족이나 직장동료나 상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박해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악한 자들을 상대해야 할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 사자이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내가 연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내가 무시못할 존재, 약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보여줍니다. 천지를 울리는 포효를 하면서 나를 무시하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고 내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줌으로 일시적으로 승리한 듯 보이나 사실은 비참함 패배자가 됩니다. 내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행동할수록 나는 패배자가 됩니다. 이김으로 집니다. 다른 삶을 찢었으나 그 사람을 잃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짐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섬김으로 이기고, 낮아짐으로 이기고, 죽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 말씀앞에서 제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산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제가 센터에서도 그러했고 집에서도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저의 최소한의 권위를 지키고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자같은 위엄을 보여주고자 포효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결국 자녀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주의 종으로서도 깊이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자이셨으나 어린 양으로 자신을 작게하고 말없이 죽으신 예수님을 이제부터라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겸손으로, 사랑으로 승리하는 목자, 아버지, 가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볼 때 이 어린 양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두루마리를 취했습니다. 그러자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어린 양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거문고와 성도들의 기도를 담은 금그릇을 가지고 어린 양께 새노래를 불러 드렸습니다.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9,10) 그들은 어린 양이 역사의 주관자가 될 자격이 있음과 그 크고 아름다운 덕과 공로를 찬양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어린 양의 공로는 영원한 찬양대상입니다. 죄의 종된 자들을 위해 피의 댓가를 지불하시고 그들을 사서 하나님나라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을 찬양하는 존재는 더 있었습니다. 수많은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뭐라고 찬양했습니까?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 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피조물들이 찬양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13)” 하늘예배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께 모든 찬송과 영광이 돌려집니다. 성부 하나님께 성자 하나님이 이렇게 찬양받으시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동일본질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신에게 순종하셨으며, 죽임당한 그 희생은 영원히 찬양받기에 합당한 아름다운 덕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우리도 혹 누군가에게 찬양받기를 원한다면 희생하면 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사자이지만 어린 양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이기고 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어린 양 사자 예수님을 잘 배워서 진정한 승리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