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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14강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 9:1-17)2020-06-0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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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14강 메시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 마태복음 9:1-17

요절 /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에 자기 의로 가득찬 바리새인들과 고정관념에 잡혀있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을 통해 우리가 자신들을 깊이 돌아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시간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본 동네인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갈릴리 순회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작은 자란 몸이나 키가 작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품에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런 자란 뜻입니다. ‘안심하라는 것은 그가 불안문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왜 그는 불안했을 까요? 뒤에 나오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 기초해 볼 때 그는 죄로인한 불안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중풍병이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죄의식이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죄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앞에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시면 죄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순간 죄는 동쪽이 서쪽에서 먼 것처럼 내게서 멀어집니다. 구약성경에서 죄사함은 도말(塗抹)이란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칠을 발라 지워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가 된 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우고 싶은 과거를 확실하게 청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온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나의 죄를 사해주시면 됩니다. 세상의 페인트는 나중에 혹시 벗겨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죄사함은 너무나 확실하여 영원히 다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자비를 믿고 나온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속에 있는 죄로인한 고통과 불안을 아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해결해주시는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 아마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아해하고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자 친구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당연히 중풍병일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실상은 주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얼굴이 검은 형제님을 보고 혹시 얼굴이 검은 것 때문에 자의식이나 열등감같은 문제가 있지 않을 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얼굴 검은 것으로 전혀 열등감, 자의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외모를 보지만 주님은 중심의 고민을 정확히 보시고 정확히 도우십니다.

 

사람은 죄문제가 해결되어야 진정으로 행복합니다. 죄에는 우리가 지은 자범죄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살아온 본질적인 죄가 있습니다. sins SIN입니다. 이 두가지 죄 모두를 사함받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을 느낄 때 우리는 참되고 영원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죄사함을 받아 밝고 힘찬 삶을 날마다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8절 말씀은 과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실 수 있는 자격자인 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선언을 들은 사람들중 서기관들이 반발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필사하면서 율법 전문가가 된 율법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했다고 반발했습니다. 신성모독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해당했기에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악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증명하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이 두 말은 모두 어렵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사실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두 말의 차이는 앞의 말은 증명이 불가능하고 뒤의 말은 즉시 증명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뒤의 말을 해보이심으로 자신의 앞의 말이 빈말이나 거짓말이 아닌 진실하고 권위있는 말이었음을 입증하시겠다 하십니다. 특히 중풍병자에게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완전하고 강력함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중풍병자는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사람에게 이런 권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대행자 곧 그리스도임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능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로서 하나님의 대행자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예수님에게 나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우리의 모든 숨은 죄들을 고백하고 죄사함받아 참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친 후에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 내용은 마태복음을 쓰고 있는 저자마태의 이야기입니다. 세리는 오늘날의 세무사나 세무공무원과는 다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로마를 위해 세금을 긁어모으는 세금청부업자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창기와 동일시 했는 데 창기는 돈을 위해 몸을 팔았지만 세리는 돈을 위해 나라와 민족와 양심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창기! 이런 불명예를 감수하고서라도 당시 세리들이 세리가 된 동기는 오직 하나 돈을 모으기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결정 밑바탕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더라도 돈만 많이 벌면 그래도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럼, 돈을 많이 긁어 모은 마태는 행복했을 까요? 그는 돈만 벌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삶의 가치에 대한 만족과 보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 자기 가족과 자기 자신도 인정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으로 괴로웠습니다. 그는 인생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었고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쓰레기 취급했습니다.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의 영혼의 고뇌를 보셨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결정을 이제 되돌이킬 수도 없고 끝장나버린 그의 삶은 엎질러진 물과 같았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영혼은 절망속에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의 고뇌를 보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오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의 삶을 다시 재창조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손에서 마태는 인류역사에 위대한 스승이요 성자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엎질러진 물같은 상태일지라도, 쓰레기장에 갈 폐품같은 상황이더라도 이 재창조의 주님의 부르심안에서 어떤 사람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빚어져 세리레위에서 예수님의 사도 성마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개명된 이름 마태의 뜻처럼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초청에 깊이 감사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식사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진 것을 본 듯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그들은 사람들을 의인들과 죄인들로 나누고 죄인들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으며 함께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인으로서 자기발견이 안되어 있고 율법을 준수했다는 자기 의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몇 가지 율법을 피상적으로 준수한 것으로 자기 의의 탑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선긋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자기기만, 자기착각입니다.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그것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죄인된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오도록 주신 것입니다. 율법에 제사법이 있는 이유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이것은 진실로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율법을 피상적으로 준수했던 부자청년은 주님이 이웃 사랑 계명을 지켰느냐고 물었을 때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가 이웃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라고 했을 때 그는 주저함으로 그가 사실은 깊은 이기심의 한계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사랑 계명을 지키지 못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반면에 사도바울이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자 했으나 지킬 수 없는 자임을 깊이 시인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있으나 실제로는 선을 행하지는 못하는 자임을 깨닫고 통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칼빈은 우리 인간이 엄밀한 의미에서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실한 실존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착각했습니다. 율법의 일부를 피상적으로 지킨 것을 확대하여 자기 자신이 의로운 존재인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세리와 창녀들같은 죄인들을 판단정죄하여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자들로 규정했습니다. 자기 의에 도취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집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보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말씀하셨습니다. 12,1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온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습니다. 여기서 병든 자는 몸이 아니라 영혼이 병든 자들로 곧 죄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판사나 검사나 아니라 영적 의사로 오셨습니다. 때문에 죄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사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들 중 건강한 자가 따로 있고 병든 자가 따로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일부사람들의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인들이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이를 보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죄인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정하는 죄인들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죄인들, 곧 의인된 심정이 충만한 죄인들입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주 예수님께 나오고 의인된 심정이 충만한 자들은 예수님이 필요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모를까요? 그것은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이 깊이 병들었음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의사는 암 전문의인데 자신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건강검진을 자세히 받으면 속에 깊이 숨겨진 병들이 다 나옵니다. 정밀검사를 받을수록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의원이 맥집듯 대충 진단하면 자신이 의인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부자청년이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처럼 말씀과 성령의 현미경, CT, MRI, 초음파 등 정밀검진을 깊이 하게 되면 심각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말씀과 성령의 진단도구로 정밀검진해 보면 우리는 결코 의인이 아닙니다. 정말 벌레처럼 추한, 벌레만도 못한 이기적인 죄인입니다. 뼛속까지 이기적인 죄인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영광을 구하는 자입니다. 분열주의자입니다. 경건한 척 보이지만 사실은 세포까지 음란한 자입니다. 정말 비참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런 우리는 자신의 더러운 의로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공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지 않고서 하나님앞에 설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이렇게 죄인으로 깊이 자기발견을 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누구를 봐도 나보다 낫게 여깁니다. 그가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와 함께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압니다. 내가 그를 용납하기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용납하기 위해 애써야 함을 압니다. 이렇게 죄인으로 깊이 자기발견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도 영접하고 그와 함께 하고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성숙은 자기 의를 쌓고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정죄가 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깊이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죄인의 우두머리다. 넘버 원 죄인이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깨달음과 고백이 아닙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나보다 심각하고 추하고 속좁은 죄인은 없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넘버 원 죄인입니다. 그런데 1만번째 죄인, 10만번째 죄인, 10억번째 죄인을 내가 어떻게 감히 판단합니까? 내가 어떻게 그와 함께 하기를 고민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죄인으로 깊이 자기발견을 한 사람은 누구랑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조금도 판단함없이 오히려 감사하고 경탄하며 그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신앙성숙이란 이렇게 누구를 봐도 판단이 되지 않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즐겁게 유쾌하게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 판단하는 마음, 함께 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듭니까? 나보다 낫게 여겨져 그와 함께 하고 싶습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수준의 척도입니다. 이 신앙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인으로서 깊은 자기발견입니다. 우리가 이 죄인으로 깊은 자기발견을 하여 어떤 사람과도 함께 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 말씀은 호세아 6: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긍휼은 사람을 대한 것이요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은 동료인간에 대해 차별과 강포와 착취를 행하면서 안식일만 되면 헌물을 들고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 대해 탄식하시며 자기에게 제사를 안드려도 좋으니 제발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말씀셨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형제들을 둔 아버지의 심정과 같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말도 섞지 않고 차갑게 지냅니다. 그리고 서로를 무시하고 판단하고 왕따시킵니다. 예를 들어, 동생을 짓밟은 형이 어버이날이라고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들고 온다면 그걸 아는 어떤 부모가 그 형을 기쁘게 받겠습니까? 부모의 최대의 기쁨은 형제우애입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자기에게 아무것도 안해도 좋으니 서로 우애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걸 가장 원하고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동료 형제자매들을 불쌍히 여기며 함께 하며,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를 이해하고자 하여, 시간과 마음을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에 이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안에 있는 바리새인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시 3대 의로운 행위는 구제, 기도, 금식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은 힘들게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도 안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인지 따졌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이란 고행이다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상대적인 자기 의가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있고 판단을 할 때 예수님안에서도 선긋기, 편가르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신앙생활이란 혼인 집에서 신랑과 함께 하는 것처럼 즐겁고 기쁜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은 즐겁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고 자기 의만 있습니다. 자기 의가 있는 사람들은 즐겁기보다는 바장하고 우울합니다. 잘 보면 항상 인상을 쓰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같은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교만하거나 판단하는 마음 아니면 우울한 마음으로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우리 삶에 중심에 모신 이들은 내가 잘해도 못해도 교만하지도 우울하지도 않고 항상 안정된 심령으로 즐거운 삶을 삽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같은 내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추구하는 전통적 신앙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런 자기 의를 추구하는 신앙의 패러다임을 깨야 합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죄인으로서 자기발견 이것이 구원의 기초이며 신앙성숙의 척도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자기발견을 깊이 하여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어떤 사람과도 함께 하고 친구가 되고 동역할 수 있는 원만하고 유쾌한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