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마태복음 15강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말씀/ 마태복음 9:18-38 요절/ 마태복음 9: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만나는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본문의 내용은 마가복음 5장, 또 누가복음 8장에 더욱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5:23절에서 그가 예수님께 처음 왔을 때 말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그러니까 야이로가 처음 예수님께 나왔을 때 가졌던 믿음은 지금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시면 죽어가던 딸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8:42절을 보면 그 딸은 나이가 12살이었고 야이로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습니다. ‘딸바보’라는 표현도 있듯이 아빠에게 딸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더더군다나 외동딸이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보통 아빠들은 아들을 볼 때 든든한 것은 있지만 평소에는 뭐랄까 좀 썰렁한 점이 있습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아빠가 퇴근해서 돌아와도 형식적으로 잠간 인사하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게임에 열중합니다. 식사하면서 아빠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니 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면 아이는 건성으로 몇 마디 하다가 귀찮아 하면서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버립니다. 이에 비해 딸은 얼마나 살갑고 다정한지 모릅니다. 아빠가 퇴근하고 오면 딸은 초인종 소리와 동시에 아빠에게 달려와 아빠를 안아주고 볼에 뽀뽀를 해 줍니다. 아빠가 식사하면서 딸과 대화하면 아빠가 졸려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딸의 입에서 이야기 보따리가 끊일 줄 모릅니다.
제가 그리스의 이마가 선교사님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보니까 언제부턴가 이분의 얼굴이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학생시절부터 늘 웃는 얼굴 하면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있다가 지금 미국 보스턴으로 간 변다윗 선교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역전이 되었습니다. 변다윗 선교사는 학생시절에 비해 좀더 무게가 있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마가 선교사님은 학생시절보다 더 밝고 해맑고 행복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본문을 보며 드디어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변다윗 선교사에게 아들이 둘이 있고 이마가 선교사에게는 딸이 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야이로의 얼굴도 이마가 선교사님처럼 늘 밝고 행복한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이 갑자기 시름시름 앓더니 곧 죽게 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 얼마나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야이로는 예수님이 어떤 병자든지 손을 얹어 낫게 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야이로는 아픈 딸을 집에 두고 전속력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앞에 온 몸을 던져 절하며 간곡히 죽어가는 딸의 몸에 손을 얹어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의 집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는 도중 혈루증 앓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여인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이로 인해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의 간증은 너무도 은혜로웠습니다. 하지만 야이로의 마음은 바싹바싹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마침내 긴 여인의 간증이 다 끝나고 예수님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야이로는 감히 예수님의 말씀을 중간에 끊을 수도 없고 안절부절하며 예수님 쪽을 보았다가, 자기 집 쪽을 보았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그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그에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야이로의 마음은 죽음의 세력에 압도되었습니다. 죽음은 단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그에게서 빼앗아갔으며 이제 야이로에게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부모들이 고생하면서 열심히 사는 것은 자식에게 좀 더 좋은 것을 물려주기 위함인데 이제 외동딸을 잃은 야이로는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야이로에게 있어 죽음은 가장 무섭고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야이로의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은 캄캄한 어둠 가운데 한 줄기 빛처럼 파고 들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처럼 죽음의 세력으로 인해 깊은 흑암과 절망 가운데 있던 야이로의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빛처럼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야이로는 마침내 거대한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고 이 죽음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강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다른 복음서에 상세하게 기록된 야이로의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을 전부 생략하고 야이로가 마치 처음부터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야이로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요시합니다. 그가 처음에는 겨자씨 한 알처럼 작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 그 믿음이 죽음의 세력 앞에서 거의 사라질 정도로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그의 연약한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러한 과정을 전부 생략하고 그가 예수님을 죽음보다 더 위대하고 강한 분으로 믿었다는 그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히브리서 11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삼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손의 인생을 만약 전기로 써서 책으로 발행한다면 학생들이 읽고 별로 배울만한 것이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청년의 정욕과 방탕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증거합니다. 이는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 하나님이 주신 모든 힘과 마음과 능력과 생명을 다 바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금까지 미약하고 연약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너무 연약해서 때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다 꺼질 위기 가운데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단번에 바뀔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믿음이 너무 약해서 눈에 보이는 상황에 때마다 요동하고 흔들리며 갈대처럼 살았지만, 죽음보다 강한 예수님을 지금 이 순간 믿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까지는 너무 연약한 믿음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지금 이 순간 죽음보다 강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실 때였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아마도 자궁에 염증이 생긴 것으로 인한 질병으로 추정됩니다. 보통 건강한 사람은 혈루증의 고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피가 많이 나서 빈혈 증상이 있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염증 증상은 온 몸에 고통을 줍니다. 예를 들어 저는 잇몸에 염증이 자주 생기는 편인데 한 번 잇몸 염증이 생기면 단지 그 부분만 아프고 피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에 열이 나고 기운이 하나도 없고 식욕도 없습니다. 밤에 잠도 잘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치과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누런 고름이 나고 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지다가 마침내 이빨이 빠지면 비로소 염증 증상이 가라앉게 됩니다. 이런 염증 증상을 제 때 치료하지 않으면 온 몸의 장기들이 함께 손상된다고 합니다.
본문의 여인이 12년간 이 병을 앓은 것을 볼 때 만성 자궁내막염으로 추정됩니다. 그녀의 증상은 때로는 조금 좋아졌다가 때로는 매우 심해졌다가 하는 것을 반복했을 것입니다. 염증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온 몸에 열이 나고 하복부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오고 출혈과 화농성의 분비물로 고통하였습니다. 보통 염증 증상을 가진 분들을 보면 특히 밤에 고통이 심하므로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그녀는 이 고통스러운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의사들을 찾아갔고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을 이 병의 치료에 전부 다 썼습니다. 그러나 재산만 탕진하고 병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어갔습니다.
이런 그녀가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의 내용은 예수께서 손을 얹어주시면 어떤 병이든 다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율법에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부정한 자와 접촉하면 그 접촉한 자도 부정하게 됩니다.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나의 몸에 손을 얹어주실 수 없으시니 내가 예수님 뒤에 가서 몰래 그 겉옷 가 곧 옷술을 만지면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술을 만졌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의 옷술만 만져도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그녀의 믿음은 다소 미신적인 믿음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이 그만큼 위대하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너무도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저 옷술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크고 위대하신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십자가 옆의 강도의 믿음을 연상시킵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흉포한 범죄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흉포한 죄를 생각할 때 도저히 구원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고 놀라운 메시야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간구하였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 우리는 본문의 여인으로부터 귀한 믿음을 배웁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베로니카입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수건으로 그 얼굴의 땀을 닦아드렸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찍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크고 위대하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위대한 분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예수님을 멸시하기도 합니다. 또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위대한 분입니다. 무엇보다 위대한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흉악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고 그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의 옷술이라도 만질 때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베로니카의 믿음의 터치.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는 그 손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손보다 12년간 병으로 고통하고 여윈 손이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는 그 손을 하나님은 훨씬 귀하게 보셨을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믿는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는 믿음의 터치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옷술 자체가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다기보다 그녀의 믿음이 병을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하였음을 알려주셨습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유대인들의 장례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보통 24시간 이내에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게 됩니다. 랍비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장례식 때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최소한 두 명 이상의 피리 부는 자들과 한 명 이상의 애곡하는 여자를 고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피리 부는 자들은 장례식에 어울리는 슬픈 음의 피리를 붑니다. 애곡하는 여자는 주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도록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본문의 관리는 아마도 여러 명의 피리부는 악단과 애곡하는 여인들을 고용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내는 소리는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죽음과 슬픔의 세력에 압도되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소녀가 죽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녀가 죽었다는 것은 죽음을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합니다. 이에 비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음보다 더 크고 위대한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보다 강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나를 치면 그것은 나를 ‘때렸다, 혹은 폭행했다’가 됩니다. 이러한 폭행의 결과 코뼈가 부러질 수도 있고 혹은 그보다 더한 중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는 성인인데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나에게 고통을 가할 목적으로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나를 때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나에게 때린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나름대로 나를 폭행했는데 내 편에서 볼 때 그것은 폭행이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죽음보다 크고 강한 분이시기에 죽음이 소녀에게 가한 테러가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단지 소녀를 잠들게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죽음은 가장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어렸을 적 죽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지인 중 한 사람이 죽으면, 죽음의 무시무시한 힘을 체험하고 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이 그 죽음보다 훨씬 강하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증거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습니까? 이 믿음이 있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무리를 내보내신 후 집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키셨습니다.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터치’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술을 터치함으로 병에서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을 때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표현할 때 종종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에게 고기를 먹이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반문했고 이에 하나님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되물으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66:14절을 보면 장차 종말의 시대,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가 시작될 때 여호와의 손이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리라 예언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여호와의 손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터치를 통해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에서 예언한 종말의 시대를 알리는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은 그의 손길로 우리를 터치하여 주시고 우리의 삶을 터치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휴대폰 액정을 살짝만 터치해도 휴대폰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까. 반면 우리가 휴대폰 액정을 전혀 터치하지 않으면 휴대폰은 백날이 지나도 그 화면 그대로 있습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전혀 터치해주지 않으시면 우리의 삶은 백날을 살아도 늘 그모양 그꼴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터치해주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가장 먼저 내 마음이 달라집니다. 늘 부정적이고 불평과 불만, 회의적인 생각, 절망적인 생각으로 가득하던 내 마음이 달라져 소망의 생각, 믿음의 생각,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 권능의 손길, 그 자비와 사랑의 손길로 나의 삶을 터치하여 주시는 것. 내 마음을 터치하여 주시는 것. 참으로 기대가 되고 설레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야이로의 믿음, 베로니카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7-3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흔히들 몸이 백냥이면 눈이 구십냥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눈은 몸의 지체 중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눈을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얻습니다. 눈이 전달해 준 정보를 토대로 뇌가 판단하고 손과 발이 움직입니다. 눈의 기능을 잃었다는 것은 뇌 편에서 볼 때 최대의 정보 공급망을 잃은 것입니다. 이 경우 뇌는 눈 대신 다른 기능을 예민하게 발달시킵니다. 보통 맹인의 경우 소리 정보에 대한 분별력과 판단력이 거의 보통 인간의 수준을 넘어 동물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맹인의 경우 사람의 목소리만 듣고 여러가지 판단과 분별을 하는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의 깊은 마음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전부 읽어낸다고 합니다. 또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시각 정보에 마음이 팔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도 스마트폰 쳐다보며 멍하게 돌아다니는 좀비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에 비해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은 자기가 들은 소리 정보를 되뇌이며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본문의 맹인들이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었으나 메시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알았습니다. 또 그 메시야가 가장 먼저 하실 사역이 맹인의 눈을 밝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곧 이사야 35:4-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사야서에 의하면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놀라운 일들의 목록 중 가장 첫 번째로 기록된 것이 맹인의 눈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고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시력이 1.5 이상 되어서 예수님을 똑똑히 보고 그가 행하신 모든 일들을 똑똑히 보는 이들 중에서도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66권의 성경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많은 전도자들의 메시지가 있지만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에 비해 본문의 맹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믿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믿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대로 메시야의 능력을 그들의 눈에 행하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사실 이 말씀이 오늘 메시지의 제목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가 정말로 예수님만이 너의 인생의 참된 소망이신 것을 믿는가? 너가 정말로 오직 예수님만이 너를 삶의 절망,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믿는가? 너가 정말로 예수님만이 참으로 믿고 의지할 너의 소망이신 것을 믿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이 준엄한 질문 앞에 본문의 맹인들과 같은 답변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맹인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구걸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졌던 두 맹인들은 실상은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삶의 귀한 스승들입니다. 우리가 위인전기를 보면 위대한 위인들을 본받고 배워야 하지만 실상 가장 본받고 배워야 할 분들은 본문의 두 맹인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메시야 예수님 앞에서 얼마나 가난합니까. 얼마나 겸손합니까. 얼마나 간절합니까. 메시야 예수께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본문의 두 맹인을 배워 예수님 앞에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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