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마태복음 9:35-10:42
마태복음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9:35-38절은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기도하라 하신 예수님이고, 10:1-42절은 부족한 제자들을 추수할 들녘에 실제 보내시면서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9:35-38절은 맨 뒤에 다루겠습니다. 10: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따르는 무리들과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12명 만을 부르셨습니다. 왜 열두 명을 부르셨을 까요? 혹자는 12명이 한 유능한 선생이 인격적으로 양육할 수 있는 소수정예의 최대치라고 말했습니다. 대개는 이스라엘 12 조상들을 생각하셔 예수님이 새 이스라엘을 이루시기 위해 첫 조상으로 12명의 인물을 세우신 것으로 봅니다. 주님은 일하실 때 일감과 함께 권능을 주십니다. 사명만 주고 권능을 주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더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그것은 생활할 수 있도록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보장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2사도는 누구누구입니까? 베드로라 하는 시몬부터 총 12명의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이 부르실 당시에는 보잘것없고 초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해 보면 큰 교회나 성당의 모든 입구나 내부에 항상 열두 사도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거나 그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이름을 우리가 친숙한 발음으로 들어봅시다. 피러, 앤드류, 제임스, 쟌, 필립, 바쏠로뮤, 토마스, 매튜, 사이몬, 내대니얼. 쥬다.. 그들은 세계 20억의 크리스천들인 새 이스라엘의 조상들로 정말 유명한 사람들이요 인류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장차 이렇게 엄청난 인물, 큰 인물들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받아야 할 작은 훈련과 사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도훈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마리아나 이방인들 지역에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지역에 가서 천국이 임한 것을 전파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영적으로 매우 어립니다. 또한 세상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을 마치 이리가운데 양들을 보내는 것같다고 하셨습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12 사도는 이스라엘 곳곳에 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합니까? 첫째로, 그 만큼 천국복음 전파는 빨리 전파해야 할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천국복음전파는 우리의 신앙지식이나 인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팩트자체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연수나 내 수준을 너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복음전파는 어린아이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어려움과 위험에 직면할 때 우리가 실제적인 믿음을 배우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이론만 배워가지고는 사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안전하지만 절대로 위대한 뱃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군인도 그렇습니다. 계속 훈련소나 육군사관학교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현장에 나가서 어려움과 부딪히면서 우리는 실제적인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영적 세계도 그렇습니다. 사역자체가 체험적 지식을 제공하며 우리를 균형성있게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어리고 현장이 위험하지만 그들을 밖으로 내보셨습니다. 또 그들을 따라가지 않으시고 자립적으로 믿음을 배우며 사역을 하도록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 말씀은 그들이 이번 전도여행에서, 그리고 평생 무엇을 전파하며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줍니다. 첫째, 천국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천국의 상실과 회복입니다. 천국은 공간보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탄과 인간의 죄로 제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통치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가는 천국을 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온 천국을 전하라 합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을 받아들이고 누려라’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쁜 소식이며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12사도는 이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살아야 행복합니다. 평신도이든지 풀타임사역자이든지 간에 세상에서 가장 힘써서 하며, 자부심과 보람과 긍지를 느껴야 할 일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뜻있는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며 삶의 가치와 보람을 느꼈습니다. 6.25 이후 전후세대는 산업화의 역군이 되어 우리나라를 물질적으로 잘사게 하는 데서 보람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암송했는데 그 첫 머리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습니다. 그리고 80년대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최고의 가치와 의미로 생각하고 ‘임을 향한 행진곡’을 부르며 감옥에 가는 것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며 살까요? 국내여행이나 세계여행을 하면서 경치를 보거나 맛있는 것을 먹는 데서 의미와 가치를 찾습니다. 먹방이나 자연인의 삶을 보며 의미와 가치를 찾기도 합니다. 최근에 유투브방송을 보니 자연인은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야 해서인지 캠핑카를 몰고 다니면서 이곳저곳의 자연을 즐기고 사람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을 다녀보면 어디나 한국 사람들이 열심히 여행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중앙아시아를 다녀온 어떤 분의 말을 들으니, 현지에서 한국인상대하는 분이 김밥을 열심히 싸서 물어보니 한국아줌마들이 그렇게 중앙아시아의 산들을 찾는다고 합니다. 열심히 한국의 산들을 다 다녀서 이제 한국에는 다닐 곳이 없어 세계로 진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자연은 아름답기는 하나 허무할 뿐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 유럽 사람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자신의 마지막은 ‘Back to the Ocean’ 대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척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 바로 이 땅에 온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도록 돕는 천국복음전파야 말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놀라운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은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는 일입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에 비해서는 부차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병과 약한 것을 고침 받는 것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병들고 약할 때 우리 삶에 많은 고통이 있고 장애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12 사도는 이런 일을 해서 사람들의 행복과 더 나은 삶에 기여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일은 우리가 전하는 천국복음전파를 확증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표적의 역할입니다. 이런 표적들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게 되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권위와 진실성을 믿게 됩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에 놀라운 일을 통해 주님의 말씀의 권능과 진실함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는 이 표적을 통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이 가르치는 것을 진실로 배우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이 표적은 제자로의 부르심이 흔들릴 때도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한분이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었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힘없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들은 153 마리의 살아있는 물고기 떼들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표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났고 다시 제자의 삶, 사도의 삶을 힘차게 재출발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천국복음전파사명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그 따르는 표적으로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시고 칭찬과 박수를 받게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복음전파사명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속하신 이런 표적들도 구하는 가운데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우리도 힘차게 복음전파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9-15절은 우리가 천국복음전파를 감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먹을 것과 안전과 숙박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전파사명을 감당하면, 당신의 천사들을 곳곳에 예비하시고 안전과 더불어 먹고, 쉬고, 자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고 복음을 영접하는 이들의 헌신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되게 해주십니다. 물론 복음을 전파할 때 항상 복음전파자들을 귀히 여기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전파자들을 거부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럴 때 사도들은 그런 반응에 너무 매여 위축되거나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했으면 그뿐입니다. 영접하는 여부와 그 책임은 복음을 들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 오늘날 복음전파하는 우리에게 가장 가슴아픈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전파의 열매를 많이 거두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확인하시는 것은 오직 사명에 대한 ‘충성’뿐이니 열매에 매이지 않고 충성스런 복음전파자의 삶을 끝까지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6-42절은 긴 내용인데 주로 전도자의 삶을 살 때 겪게 되는 어려움과 어려움을 어떤 자세와 태도로 감당할 지 권면하신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사도들과 복음전파자들을 공권력의 박해에 넘겨줄 수 있습니다. 형제간에, 부모 자식 간에 이렇게 넘겨주는 것이 실제로 이슬람권에서, 공산권에서, 유교사회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회들도 복음증거의 좋은 기회로 쓰실 것입니다. 공권력의 박해라는 위압적인 분위기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안심할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우리안에 계셔 할 말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은 보혜사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도해 주십니다. 또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내시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당할 때 우리는 우리의 선생이요 주인이신 예수님이 받으셨으니 당연히 제자요 종인 우리도 박해를 받는 것임을 기억하고 박해를 당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연히 여기고 영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박해 당할 때 가져야 할 자세는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중상모략과 모욕을 당할지라도 진리는 승리할 것을 믿으며 오히려 담대히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덧입는 비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보다 영혼의 죽음을 선고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 두려워할 때 박해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성도는 함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참새는 하챦은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너무 값이 안 나가 1마리만 독자적으로 팔지 않았습니다. 이름만 참새였지 존재감 제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참새도 그냥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죽습니다. 하물며 주님의 사도, 주님의 종들은 어떻겠습니까? 절대로 그냥 죽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순교자의 영광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죽어도 하나님이 내게 최고의 영광을 주시는 것이니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 순교가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있다면 동시에 순교할 용기와 놀라운 평안함과 담대함도 주실 것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경우라도 두려움의 종이 되지 않고 자유롭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4-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동안 사랑했던 인간관계와 충돌하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아들과 아버지가, 딸과 엄마와,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싸우게 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부모든 자식이든, 누구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상을 보면, 자기십자가를 지고 자기목숨까지 버리고자 하는 결단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40-42절은 예수님의 사도와 제자의 존귀함과 자부심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귀히 여기고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습니다. 의인을 귀히 여기고 의인을 영접하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하고 마지막 남은 기름과 가루로 그를 섬겼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녀에게 끊이지 않는 기름과 가루를 상으로 주셨습니다. 수넴여자는 엘리사가 쉬어가도록 다락방을 만들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편의시설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상으로 주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별 볼일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제자라는 이유때문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주님이 절대로 그 상을 잃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냉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떠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보잘것없지만 냉수는 목마를 때는 정말 고마운 것이고 위로와 힘을 주는 귀한 것입니다. 때로는 힘들 때 보내주는 문자하나, 커피 한잔, 밥한 끼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제자의 삶을 보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스트레스도 많고 갈등도 많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허물과 부족한 점만 지적하고 그들의 헌신과 수고를 당연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고, 당연시 하지 않으며, 감사와 격려를 표시할 때 그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며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또한 사도들에 대해서 이런 냉수 한 그릇의 격려와 섬김을 감당하게 하시고 그들도 살리고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아직 연약하지만 열두 제자를 내보시며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천국복음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9:35-38절에서 자신이 친히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것을 제의하셨습니다. 그리고 12 제자들을 추수하는 일꾼들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추수할 영혼들을 안타까이 바라보시며 그 추수할 일꾼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코로나 19는 모든 면에서 삶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삶은 하나님앞에서 살며 하나님앞에서 결산되어야 합니다. 축구선수들도 무관중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배도 아무도 체크하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앞에서 드립니다. 만약 하나님이 코로나를 조금만 더 강하게 하시면 우리 모두는 삶을 끝내고 다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중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우리 삶의 포커스를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천국복음전파자의 삶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 목자의 삶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도서 1: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실질적인 헌신이 심정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과연 영적 추수에 가 있을 까요?
메시지를 준비함며 우연히 1983년에 있었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주로 6.25 전쟁 때 헤어져 30년 넘게 살았는 지 죽었는 지도 모르게 살던 이들이 다시 만나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아닌 드라마를 연출했습니다. 양쪽 다 한을 품고 살았는데 대개 한쪽은 어떤 계기로 가족과 헤어져서 고아원에서 자라거나 너무 가난해서 양자나 양녀로 가 헤어진 케이스들이었습니다. 카메라가 비추어주면 얼굴이 너무나 비슷해 물어보지 않아도 형제, 오누이, 부모자식인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이산가족찾기는 1983년에 단지 2시간 분량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몰려 결국 138일, 453시간 45분 동안 진행되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시청률은 무려 78%였는데 온국민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결국 10만 952건이 접수되어 10,180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하게 되었습니다. 이산가족들의 상봉대화 몇 개를 소개합니다. 언니 동생의 대화입니다. “언니, 나 얼마나 외롭게 살았는 지 알어? 얼마나 보고싶었는 지 몰라!” “우린 너는 죽은 줄 알았어” “이제 굶더라도 헤어지지 말고 살자”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나이인데 찾지 못한 오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묘소 꼭 찾아서, 묘소가서 원없이 울어봤으면 좋겠다!!” 또 잃어버린 누나를 찾은 한 남자는 누나에게 “누나, 엄마, 아버지 다 살아계셔, 만세, 만세, 만세” 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산가족의 헤어짐은 비극이며 만남은 눈물바다요 천국잔치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슬픔과 불행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헤어져 산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없이 고아처럼 살았습니다. 형제자매가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없이 살았습니다. 이것이 외롭고 불쌍한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불쌍한 인생들을 위해 추수할 일꾼, 곧 목자들을 세워달라고 하셨습니다. ‘추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헤어져 하나님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찾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 다스림을 받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고개숙인 영혼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족해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는 영적 추수역사에 우리 자신을 일꾼들로 드리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간절한 소원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부응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