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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17강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장)2020-06-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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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17

 

쉬게 하리라

 

말씀/ 마태복음 11

요절/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새롭게 발견하고 영접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현재 세례 요한은 헤롯 대왕이 남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한 일에 대해 이것이 잘못되었으니 회개하라고 책망한 결과 사해 동쪽에 위치한 마케루스 감옥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그가 투옥된 직후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신 것을 고려해 볼 때 그가 감옥에 갇힌 지 대략 1년 정도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1년의 기간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라고 예언했던 예수께서 하신 사역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예수의 사역은 그가 메시야에게 기대했던 것에 비해 실망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그의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하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읽는 가운데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불의와 죄를 심판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이사야서를 읽는 가운데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죄인들과 악인들이 심판을 받고 의인들은 독사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동산에서 메시야와 함께 참된 복락의 삶을 살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3:7~12절을 보면 그는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꾸짖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하였습니다. 메시야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하였습니다.

 

이후 요한은 그가 세례를 줄 때 성령이 임하는 자가 바로 메시야라는 주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예수께서 바로 그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1:33) 요한은 비록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이제 장차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하실 일에 대한 큰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남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한 헤롯의 음란과 정욕의 죄를 심판하시고 그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와 불의를 다 심판하시고 정의를 회복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본래 정의감과 의협심이 남달리 강한 세례 요한은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도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보내 당신이 오실 그이 곧 메시야가 맞는지 물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이 말씀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5-10장에서 하신 일을 요약한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야의 사역을 떠올립니다. 이사야 61:1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현재 하고 계신 일이 정확하게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종말의 심판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천국복음이 땅끝에 이르기까지 전파되고 모든 알곡이 다 무르익어 추수되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이것을 알고 실족하지 않도록, 그가 가진 믿음을 끝까지 굳게 붙들도록 도우셨습니다.

 

7-14절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7~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구약 시대를 살펴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 왕이 범죄한 후 그 범죄를 은닉하려 하였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그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은 일반적으로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삶을 살기보다 외진 곳, 광야에 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거칠고 험한 생활을 하며 말씀 묵상과 기도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며 메시지를 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광야에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 이후 무려 400년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전부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나간 까닭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함도 아니고 부드러운 옷을 입은 고관대작을 보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려 400년만에 등장한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고 그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실상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어떤 점에서 일반적인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입니까? 그는 말라기 3:1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종말의 때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지자보다 위대한 자입니다. 여기에서 위대하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나 인격이 그 어떤 선지자보다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하여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축구에서 골을 넣을 때 그 골이 이루어지까지 여러 결정적인 역할들을 한 선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골을 넣은 선수보다 기가막힌 어시스트를 한 사람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사실 골을 넣은 선수는 기가막힌 어시스트를 받아 발로 툭 건드렸을 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골은 발로 툭 건드린 선수가 넣은 것으로 기록됩니다. 어시스트는 말 그대로 어시스트에 불과합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한 선지자 중 가장 위대한 선지자는 아마도 이사야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그는 메시야에 대한 위대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죄인들을 위한 어린 양으로서 당할 수난과 고난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예언하였습니다. 이외에는 그는 약 60여년간 선지자로 활동하면서 주옥같은 메시야와 종말의 시대에 대한 예언을 남겼습니다. 세례 요한도 메시야에 대한 통찰력과 안목을 갖기까지 이사야서에 큰 빚을 졌음에 틀림없습니다. 요한은 이사야의 도움을 받아 결정적으로 목수의 아들 나사렛 예수께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9절에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이와같이 그가 예수님이 구약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정확하게 증거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입니다. 말하자면 결정적으로 골을 넣은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세례 요한이 모든 선지자들이 어시스트한 공을 몰아 결정적으로 골을 넣었다면 천국의 일군들은 드디어 예선을 끝내고 본선무대에 진출한 선수들과 같습니다. 물론 축구의 경우는 예선에서 뛴 선수가 본선에서 그대로 뜁니다. 그러나 총 4년안에 전부 끝나는 축구대회와 달리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수천년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일꾼이 동시에 신약시대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시대, 그러니까 예선 경기에서 본선진출을 최종결정하는 최종골을 이사야 선지자의 멋진 어시스트를 받아 넣었습니다. 이로써 본선이 시작되었습니다. 본선의 총 감독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완성하시고 이 복음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께 이 사명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들은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 구약의 선지자들과 차원이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으니 이 예수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으라는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지극히 작은 역할을 한 주의 제자라 할지라도 그는 어떤 의미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선에서 결정적인 골을 넣은 선수도 위대하지만 본선에서 작은 도움이라도 주는 선수가 또다른 의미에서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을 맡아 전하는 일군된 우리의 직분이 얼마나 귀한지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3:6-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지난 주 제가 지금까지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누가 있는지 한 번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30년이 넘는 신앙생활 가운데 나를 통해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의 수가 정말 미미해 보였습니다. 요즘 몇몇 사람들이 복음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도록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이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복음을 잘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이 우울하고 슬펐습니다. 나의 삶과 사역이 작고 하잘 것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통해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맡은 이 직분이 내가 보기에는 작고 하잘 것 없어 보여도 어떤 의미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보다 위대하고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보다 위대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새롭게 구령의 열정이 타오르고 영혼을 위한 기도에 마치 기름을 부은 것처럼 열정이 붙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이 말씀에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의 한글 번역처럼 수동태로 번역하여 천국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침노를 당하는데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는 특별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데 신약 시대가 되면 누구든지 자기가 자발적으로 영적 소원을 가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소원하면 기도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영어 성경 번역처럼 능동태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원문상 능동 수동 번역이 다 가능합니다.) 능동태로 번역하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박해를 받으며 폭력적인 자들이 그것을 취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NASB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violent men take it by force.”) 이렇게 해석할 경우 여전히 전자의 경우처럼 폭력적일 정도록 적극성을 띤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합니다. 다만 능동 해석의 경우 헤롯 대왕과 같이 폭력적인 이가 천국복음을 전하는 세례요한을 박해하고 이러한 박해를 통해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 경우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도 장차 폭력적인 로마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박해받을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 두 가지 해석 모두 본문의 맥락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말라기에서 예언한 종말의 때에 오리라 한 바로 그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왔다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메시야를 영접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표현은 이 결정이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데 귀를 기울여 잘 듣고 생각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16-19절에서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그러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비유에서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놀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 흥겨운 피리를 불면 다른 쪽에서 춤을 추는 그런 놀이입니다. 또 한 쪽에서 슬피 울면 다른 한 쪽에서 가슴을 치며 애가를 부르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 쪽에서 흥겨운 피리를 불어도 다른 쪽에서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또 한 쪽에서 슬피 울어도 다른 쪽에서 가슴을 치며 애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바로 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금식하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자 사람들은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인자, 곧 예수님이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돕고 회개한 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일 때 이 사람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완악하고 죄악된 모습을 지적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지적한 것처럼 메시야로서 죄인들을 심판하는 종말의 심판을 행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죄인들과 함께 만찬을 벌이는 종말의 잔치를 지금 시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래 만찬은 승리한 후 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함으로 멸망에 처할 그들의 영혼을 얻었습니다. 지옥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큰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만찬을 벌인 것입니다. 이 만찬에 기쁨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 자체로 그들이 메시야의 원수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편 이 만찬은 종말의 만찬의 때에 메시야께서 그 원수들을 모두 멸하실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만찬에 기쁨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은 큰 경각심을 가지고 자기들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메시야의 대적이 되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20-24절은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을 행하신 마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러한 권능을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셨다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버나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주로 거하며 활동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교한하여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심판날에 소돔 땅이 그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25-27에서 예수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곧 아버지께서 천국복음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버지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어떤 이는 본문 말씀이 마태복음의 전체 요절이고 마태복음의 나머지 모든 말씀은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11장 전반부에서 세례 요한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고 마태복음 1-11장까지의 총 결론이기도 합니다. 12장부터는 이 예수님의 초청에 대한 각 사람들의 반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초청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래 멍에를 메고 배운다는 것은 당시 구약 시대의 율법 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었습니다. 곧 토라(율법)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토라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온갖 세상 근심과 염려의 멍에를 멜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율법 없는 이방인들은 멍에를 메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배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배움이 없는 삶은 성장이 없습니다. 성장이 없고 발전이 없는 삶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랍비들은 율법의 멍에를 메고 그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 때 그 율법이 얼마나 귀한 생명의 말씀인지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쉬는 율법을 지킬 때 6일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 째 안식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때 저 하늘과 태양과 산과 들과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 째 안식하신 사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흘러가는 구름만 보아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나무 위에서 노래하는 새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와 함께 나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러한 창조주에 대한 거룩한 지식은 오직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때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추수할 때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부러 밭에 이삭을 많이 남겨놓으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이 율법을 지키면서 가난하여 추수할 땅이 없는 고아나 과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한 크리스챤은 집에 폐지나 쇠로 된 고물 등이 나오면 갖다가 파는대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가져가 용돈이라도 할 수 있도록 내어놓는다고 합니다. 이는 추수 때에 이삭을 밭에 남겨놓으라는 율법에 순종한 것과 유사합니다. 이와같은 율법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고 그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성장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곧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요 율법의 완성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정말 메시야 맞습니까 하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가 메시야가 맞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율법의 완성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자는 그 마음에 참된 쉼을 얻게 됩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죄가 주는 정죄와 수치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죄와 정죄로부터 자유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됨에서 오는 마음의 기쁨과 자유함과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또한 이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자기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흉악한 죄인들을 향해 미움과 분노를 표현하는대신 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낮추기까지 겸손하십니다. 이 분 앞에 가면 용서하시지 않을 죄가 없습니다. 이 분의 마음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으로 품고 감당하십니다. 이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으로 품고 용서하고 감당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먼저 체험할 때 그의 짐은 쉽고 가벼운 것이 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되십니다. 이 분 앞에 나올 때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울 때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쉼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