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출애굽기 16강 영화롭고 아름다운 제사장 말씀/ 출애굽기 27:20-31:17 요절/ 28: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지난 말씀에서 하나님은 성막을 짓도록 지시하셨습니다(25-27장).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자, 성막이 지어졌으면 다음으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성막에서 일할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성막에서 봉사할 제사장을 누굴 세우고, 그의 의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며, 위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난번 말씀과 오늘 말씀에서 용어에 있어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지난 말씀에서 ‘성막’ 또는 ‘장막’이란 단어가 18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성막’이란 단어가 한번도 안 나옵니다. 반면에 ‘회막’이란 단어가 16번 등장합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세움으로 성소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만남의 장소’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의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I. 제사장의 예복(28장)
1-39절은 주로 대제사장의 예복에 관한 규례이고, 그 후 40-43절은 일반 제사장의 예복에 관한 규례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먼저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이 이스라엘 진 중앙에 있는 것이 좋을까요? 진 밖에 있는 것이 좋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 안에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중앙에 임재하시고 그의 백성은 주위에 포진하여 그분의 보호하심을 받으며 그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은혜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주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보면 진노하사 그들을 돌파하여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하나님께서 정한 경계를 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경계를 넘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서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지 마시고 모세에게 말하여 전달하도록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시내산, 즉 진 밖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진 안으로 들어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만나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악된 인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넘어 죽지 않고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제사장을 세워 그들의 제사와 봉사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만나고자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거룩함을 입고 나아감으로 죽지 않게 됩니다.
1절을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네 사람이 나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고,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됩니다. 그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 ‘엘르아살과 이다말’인데, 앞의 두 아들은 나중에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게 됩니다(레 10:1-2). 이에 엘르아살이 아론의 직위를 이어받아 대제사장이 됩니다(민34:17).
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하나님은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지어 입히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죄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뵐 때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죄를 범하였을 때 쫓아내신 것 아닙니까? 또한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제사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거룩은 ‘코데쉬’로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거룩한 옷을 지어 입힘으로 그들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십니다. 영화롭다는 것은 ‘품위가 있고, 영적인 무게가 느껴진다’란 말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존귀하고 찬란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왜 영화롭고 아름답습니까? 이 옷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이라 하였고, 3절과 4절에서 반복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전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식을 할 때도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은 일차적으로 사람을 향하여나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는 직분인 것을 알려줍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기에 영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옷을 입은 사람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입니까? 저는 지방에서 올라온 처형과 함께 서울대 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처형은 의사 가운을 입은 서울대 병원 의사들을 보면서 ‘야~. 정말 영화롭고 아름답네. 저런 의사를 사위로 삼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했습니다. 왜 이 말을 했을까요? 대한민국 수재 중에 수재들이 서울대 병원 의사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즈음 거리에서 대학 과잠을 입고 다니는 대학생들을 가끔 봅니다. SKY대학 과잠을 입고 있으면 한번 더 보게 됩니다. 저번에 성신여대역 근처에서 K대(국민대) 과잠을 보았는데, 멋있더라고요.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죄수복을 입게 된다면 어떨까요? 너무나 수치스러워 얼굴 가리기 급급할 것입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화롭고 아름다운 존재였습니다. 시편 8:5절에 보면 인간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이런 거룩하고 영화로운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7:26절은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심이라” 세상에 제사장들은 아무리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놓아도 실수를 하고 죄에 넘어집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하늘보다 더 높은 분으로서 한없이 영화롭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영화롭고 아름다운 삶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까?
우리는 과거에 죄 때문에 한없이 추하고 천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로 우릴 구원하시고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셔서 죄악된 세상에서 거룩한 삶, 영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영광스러운 신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들로 세우셨음을 확신하고 영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으로 옷 입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22-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갈수록 죄로 오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깨어서 투쟁하지 않으면 직분은 왕같은 제사장인데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나를 오염시키는 죄악된 습관들을 과감하게 벗어 버려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씀으로서 심령을 새롭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 영화로운 예수님의 형상이 점점 조각될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양들이 감동을 받고 나아와서 변화되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4절부터는 대제사장 옷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6가지를 만들라고 합니다. 흉패, 에봇, 겉옷, 반포 속옷, 관, 띠입니다(사진 참조). 그리고 이것에 쓸 실은 5가지입니다.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 가늘게 꼰 베실입니다. 금실은 존귀를, 청색은 하늘을, 자색은 왕권을, 홍색은 생명의 피를, 베 실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의 옷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에봇입니다.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죠. 이중 눈여겨 볼 것은앞, 뒤 에봇을 연결하는 견대 위에 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을 새기되, 한 보석에 6개 지파의 이름을 새기도록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이는 제사장이 이스라엘 12지파의 문제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짐과 죄 짐에 눌려서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사장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짊어지고 나아가는 자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며 평생 짊어지고, 함께 인생길을 헤쳐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부모도 인간인지라 자식의 문제를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쳐 쓰러지거나 방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죄 짐을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9절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태복음 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즘은 가족부양의 짐이 무겁기 때문에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늘어갑니다.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목자님들, 선교사님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양들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여기고 같이 고민하고 씨름하며 돕고자 애를 씁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미국 시카고 제나목자님의 소감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그녀는 부모의 이혼과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절망과 허무속에 갇혀 지냈습니다. 탈출구로 미국유학을 떠났으나 딱 15일만 좋았고, 가지고 간 돈이 급격히 줄어들자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UBF 폴고 선교사님을 만나 성경공부하게 되었고, 그 집에서 몇 개월 살도록 배려를 받았습니다. 2006년 여름 수양회에서 돼지 2000마리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창세기 공부를 하면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결단하였고, 리치목자와 가정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섬겨준 UBF 선교사님들과 목자님들의 본을 따라 열심히 로욜라 대학을 섬겼습니다. 대학 옆에 있는 길거리에서 테이블을 펴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말씀공부에 초청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2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열매가 없어도 계속 했습니다. 그중 빅터라는 신입생이 마음을 열고 초대에 응하였고, 5년동안 신실하게 성경공부하여 지금은 UBF 인턴으로, 주일메신저로까지 성장했습니다. 제나목자님은 현재 로욜라 대학에서 UBF동아리와 3명의 양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국의 대학생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왕같은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그녀의 소감을 들을 때, 제가 보니 너무나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둘째, 판결 흉패입니다. 판결 흉패에는 열두 개의 보석을 붙였는데, 각 보석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각 보석의 종류와 색깔이 다 다릅니다. 이는 이스라엘 각 지파의 성격이 다 다양하고 독특한 장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열 두 제자가 다 그 성격이 다르지만 그들 모두를 보배처럼 가슴에 품고 3년 동안 공동생활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사장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인격적으로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특히 판결흉패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판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적 대소사를 결정하고 또 각 개인의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위해 판결흉패 안에 우림과 둠밈을 두도록 했습니다. 우림은 흰돌로서 빛을 상징하고, 둠밈은 검은 돌로서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한 후에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흰돌인 우림이 나오면 긍정의 뜻을, 검은돌인 둠밈이 나오면 부정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복음역사를 섬기다보면 방향을 잡고, 양들과 리더들의 문제들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양들을 보석처럼 여기고 가슴에 품고 간절히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덧입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 겉옷입니다. 제사장의 옷 가에 석류와 금방울을 달도록 했습니다. 33,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 놓고 금 방울을 간격을 두어 달되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 석류는 풍요와 많은 열매를 상징합니다. 금방울을 달도록 한 것은 제사장 자신의 영성을 깨우치는 목적도 있고, 백성들의 영성을 깨우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올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은 제사장이 성소나 지성소에 들어갔는데도 오랫동안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가 죽을 줄로 알고 끈을 잡아당겨서 시체를 끌어냈습니다. 제사장 직분은 참으로 큰 축복이지만 그만큼 책임도 따릅니다.
넷째, 패입니다. 제사장은 이마의 금띠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써야 했습니다. 사람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이마입니다. 제사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거룩이 생명입니다. 거룩에서 영적 파워가 나옵니다.
II. 제사장 위임식 (29장)
29장은 제사장 위임식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1-37절은 ‘제사장의 위임식’, 38-46절은 ‘매일 드리는 제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위임식의 규례를 정리해보면, 먼저, 몸을 씻고(1-4), 두 번째로 예복을 입고(5-6,8-9), 세 번째로 기름을 부으며(7), 네 번째로 제사를 드립니다(10-34). 제사는 가장 먼저 속죄제를 드립니다. 제사장도 죄인이기에 속죄가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화목제를 드립니다. 잡은 양의 피를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검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릅니다. 귓부리는 예속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의식입니다. 다음으로 소제입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로 성별을 의미한다. 이러한 위임식을 7일 동안 매일 반복하였습니다.
위임식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를 당신의 일꾼으로 만드시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다만 충성입니다(고전4: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제물을 갖고 언제나 성막에 나와서 직접 제사를 드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소수의 제사장들을 택하여 그들만이 제사를 드리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위임하신 자에게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 역할을 맡겨서 신성한 제사가 모독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처럼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인간 중재자가 필요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그 중재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인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이제 모든 사람이 영원한 중재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그 분을 의뢰하면 어느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30장은 성막 기사의 보충입니다.
1-10절은 분향단 규례로, 분향단은 지성소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향은 24시간 끊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기도가 그치지 않아야 함을 말해줍니다. 11-16절은 속전에 대한 규례입니다. 속전 제도의 기원은 인구 조사였습니다.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수를 의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기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삼하 24장), 그래서 그러한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 헤아림을 받는 모든 남자는 생명의 속전을 냈습니다. 속전은 이후에 성전세로 발전하였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동일하게 반세겔을 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영혼의 가치가 모두 같다는 것과 그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가족 단위가 아니라 개인적임을 알려줍니다. 각 개인이 직접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17-21절은 물두멍입니다. 제사장의 정결예식을 위해 있습니다. 성막 기구 중에 유일하게 규격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22-38절은 거룩한 향 기름과 향을 어떻게 만들며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31장은 회막과 기구들을 만들 사람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부르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이 있게 하심으로 그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부르신 자들에게 감당할 능력도 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성막 건설과 제사장 위임에 관한 말씀을 마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31장 15절부터 17절까지 읽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안식 규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자를 죽이라고 합니까?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 자를 죽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이라 합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간 일하고 칠일 째 쉬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창조 사역을 완성하시고 안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막을 건설하고 제사장을 세우는 일 후에 안식일을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새로운 창조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막이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는 소우주라면, 제사장은 새로 창조된 인류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하나님은 성막과 제사장을 통해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고 안식으로 인도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이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결론입니다. 제사장 직분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영화롭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 그 분을 만나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사 우릴 구원하시고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 삼으시고 영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축복된 삶으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세상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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